홍철훈 칼럼니스트
홍철훈 칼럼니스트17세기 후반 영란전쟁(1652~1674)의 패전과 낭트칙령 폐지(1685)*1 이후 국운이 기울고, 19세기에는 나폴레옹의 침략으로 주권이 상실된다. 또 20세기에는 제2차 세계대전 당시의 나치의 가혹한 수탈로 ‘기아의 겨울(Hongerwinter)*2’까지 겪었다. 그런 네덜란드가 어떻게 2026년 현재 인구 1천8백만에, 1인당 국민소득 약 8만 달러에 육박하는 세계 최고수준의 선진국으로 우뚝 설 수 있었을까? 인구대비 국민소득으로 보면 미국 다음이다. 그 저력은, 흔히 역사적으로 축적된 ‘고유의 제도적 자산’과 ‘구조적 유연성’으로 알려졌다. 사실상 영국에 ‘바다의 패권’은 넘겨 주었어도 17세기 ‘네덜란드 황금시대’에 구축해 놓았던 핵심 경제 인프라 DNA는 국민 가슴속에 문신처럼 새겨져 있었다. 그 예를 하나하나 살펴보자.
우선은, 로테르담 항(港)의 재건이었다. 라인강 하구에 있어 제2차 세계대전으로 폐허가 되었으나 유럽재건(마셜 플랜) 과정에서 유럽의 관문 역할을 독점해 다시 일어섰다. 또 세계 최초의 주식회사와 증권거래소를 만들었던 신용관리, 선박 금융, 보험 및 무역제도는 국가체제가 바뀌는 격변 속에서도 상인들과 은행가에 그대로 계승되었다.
또 하나는, 폴더모델(Polder Model)*3과 실용주의다. 이 사회적 합의 정신은 네덜란드의 가장 강력한 위기 극복 동력이 되었다. 국토의 반 이상이 바다가 넘치는 환경에서 국가적 재난(홍수)을 막기 위해 신분과 종교를 초월해 협력하던 전통이 현대 경제 체제에 그대로 반영되었다. 예컨대, 1970년대 석유파동과 ‘네덜란드 병(경제 부국이 제조업 경쟁력을 잃는 현상)’으로 경제가 파탄 지경에 이르렀을 때, 노ㆍ사ㆍ정은 대타협을 이뤄냈다. 소위 1982년 ‘바세나르 협약(Wassenaar Agreement)’이다. 노동계는 임금 인상을 자제하고, 회사 측은 근로시간 단축과 고용 안정을 보장했고, 정부는 세금 감면으로 화답했다. 그 결과 네덜란드는 ‘고비용 구조’를 깨고 ‘파업 없는 안정적 투자환경’을 구축해 1990년대 이후 장기 호황의 발판을 마련했다.
더구나 내수 경제의 한계를 명확히 인지하고, 전 세계를 무대로 한 ‘고부가가치 지식’과 ‘첨단 산업’에 집중했다. 예컨대, 반도체의 절대 강자인 ASML(반도체 공정 장비 제조기업)을 비롯해 필립스, 유니레버, 시그니파이(조명) 등 세계 시장을 선도하는 원천기술 기업들을 보유하게 됐다.
또 우리나라의 40% 정도에 불과한 좁은 국토로 일조량이 부족함에도 친환경ㆍICT 기술이 집약된 ‘첨단 온실 시스템’을 통해 세계 2위의 농산물 수출국이 되었다. 부동의 1위가 미국인 건, 한반도의 약 44배가 넘는 그 거대한 땅에서 밀, 옥수수, 대두 등을 끝없이 쏟아내는 ‘양(Quantity)의 대국’이니 당연하더라도, 덴마크, 프랑스를 제치고 네덜란드가 2위를 차지한 건 실로 흥미롭다. 그 까닭은 ‘농업’을 일차 산업(노동)에서 ‘첨단 지식 및 첨단 제조 산업’으로 ‘재정의’했기 때문이다.
예컨대, 온실(Greenhouse)의 기적*4을 이뤄, 전국에 밤에도 대낮처럼 밝은 첨단 온실 단지를 설치해, 지열과 공장 폐열을 이용해 온도를 조절하고, 컴퓨터가 이산화탄소 농도와 배양액을 한 방울 단위로 정밀 제어했다. 그 결과 노지(露地) 재배보다 ‘물은 90% 적게 쓰고 생산성은 10배 이상’ 끌어올렸다. 여기에 ‘고부가가치 품목’에 집중했다. 밀, 옥수수 등 값싼 농산물보다 화훼(花卉, 튤립 등), 고급 토마토, 파프리카, 그리고 유제품이나 종자 등에 집중하여 수출액을 폭발적으로 늘렸다. 미국국토의 240분의 1에 불과한 나라로서 실로 기적이 아닐 수 없다.
바다의 타임라인_네덜란드, 국가융성의 비결(3) 인포그래픽.무엇보다도, 이념보다 ‘생존ㆍ실리’를 택한 ‘철저한 노동개방 정신’이다. 역사적으로 종교적 박해를 피해 온 유대인과 위그노(프랑스 신교도)를 수용해 국부를 키운 건 다 알거니와, 오늘날에도 영어 통용률이 90%를 넘을 만큼 외부에 개방적이다. 특히 유럽에서 가장 유연한 노동 시장을 가지고 있고, 소위 ‘시간제 근무(Part-time)’가 활성화되어 있다. 여성은 육아하면서도 여가를 즐기고 경제 활동을 계속한다.
결국, 여성의 경제 활동 참가율이 높아지고 저출산 문제를 극복하는 기반이 되었다. 출산율이 1.5~1.6명으로 유럽에서도 안정적이라니, 사회적으로 유연한 이 노동 시스템 덕이라고 할 수 있다. 게다가 ‘풀타임 아니면 경력 단절’이라는 이분법을 줄여, 노동 시장 이탈이 적어 ‘생산 활동의 참여 비율’이 극도로 높다. 그 결과로, 인구밀도는 우리(509명/km2)보다 높고 세계 최고수준(541명/km2)인데도, 효율적으로 관리된다는 점이다. 기존인구가 100% 경제 활동에 참여할 수 있는 ‘사회적 시스템’ 덕이 크다 할 것이다. 낮은 출생률(0.8명, 2025)인 우리나라가 주목할 만한 대목이 아닐까.
요컨대, 네덜란드의 오늘은, 17세기 다져진 ‘물류ㆍ금융의 기초 체력’ 위에, 철저한 ‘기술 중심의 고부가가치화’, 또 ‘전 국민 경제 활동 참여’와, 무엇보다도 위기 때마다 빛을 발한 ‘사회적 대타협(폴더모델)’의 시민의식이 결합한 결과물일 것이다. 여기에, 외풍에 흔들릴지언정 부러지지 않는 ‘유연한 실용주의’도 빼놓을 수 없다.
역사적으로, 주변 강대국(스페인, 프랑스, 영국, 독일)의 일방적 패권 경쟁 속에서 ‘고래 싸움에 새우등’처럼 당한 그 숱한 국난을 그때마다 ‘오뚝이’처럼 일어서 극복해 왔다. 더욱 주목되는 건, 그 강대국 길목에서, 주변과 전쟁을 통한 그 흔한 ‘영토확장’이 아니라, ‘독자(독창)적인 생존 도구’ 이를테면, ‘물류ㆍ금융ㆍ첨단 기술, 그리고 국민 대타협’이라는 ‘인적방패’로 최고의 선진국에 올랐단 점이다.
반도 국가로서 수천 년간 대륙세력과 해양세력에 둘러싸여 국난을 겪었던 대한민국과 실로 처지가 닮았다. 사실상 대한민국도 5천 년 역사상, ‘영토확장’을 위해 주변국을 침탈한 바 없었고, 단지 ‘한반도 보존 평화’에 진력했었다. 6·25 이후, 그 지정학(地政學)적 한계를 넘어 ‘해외 진출ㆍ제조업 혁신ㆍ교육ㆍ첨단 반도체&문화 콘텐츠(K-컬처)’라는 오직 ‘인력ㆍ지식 자산(인적방패)’으로 돌파했다.
두 나라 모두, 자원이 없으면 사람이 자원이 되고, ‘제도ㆍ독창성’이 나라발전에 근본이 됐던 나라다. 그러기에, 과거 대한민국이 걸어온 길, 그리고 앞으로 걸어가야 할 길이 거울처럼 투영된다. 다만, 대한민국은 네덜란드처럼, 아직도 ‘자유민주주의적 시민 사회’가 정착되었다고 보긴 어렵다. 남북통일의 염원도 남아있다. 그러기에 그들의 ‘폴더정신’이 이 시점에서 무엇보다 필요한 때라 생각된다. 우선은, ‘나라 안’이 하나가 되고서야 다 가능한 일이 아니겠는가! 실로 네덜란드는 ‘대한민국의 오늘’을 위해 유익한 ‘참고문헌’일 것이다. (3부작 끝)
*1 낭트칙령: 1598년 4월 13일 프랑스 왕 앙리 4세가 브르타뉴의 낭트에서 공표한 칙령임. 칼뱅주의 개신교 교파인 위그노(프랑스의 신교도를 가리킴)에게 제한적인 종교의 자유가 주어졌고, 파리를 제외한 모든 지역에서 공동 예배가 가능해졌다. 프랑스 전역을 피로 물들인 신교와 구교 간의 위그노 전쟁을 끝내는 계가가 됨. 그러나 이 칙령은 1685년 10월 퐁텐블로 칙령으로 폐지되고, 개신교는 다시 가톨릭교회의 탄압을 받게 된다. 개신교 국가인 네덜란드는 국가적 역량 폭이 상대적으로 줄어들었다.
*2 기아의 겨울(Hongerwinter): 제2차 세계대전 말기인 1944.11~1945.5까지 나치 독일의 잔혹한 보복으로 인해 네덜란드 서부지역을 덮쳤던 인위적이고도 가혹한 대기근 사건임. 연합군을 돕기 위해 독일군 병력과 물자 수송 방해를 위해 노동자들의 전면 파업 행위에 대한 보복으로 네덜란드 서부지역(암스테르담, 헤이그, 로테르담 등)으로 유입되는 모든 식량과 연료 수송을 전면 금지했음. 이로 인해 약 450만 명의 시민들이 영하의 추위 속에 완전히 고립되었다. 18,000~22,000명의 아사자가 발생했고, 임산부가 영양실조 영아를 출산해 ‘후성유전학(Epigenetics)’이라는 새 학문 탄생의 계기가 되었다.
*3 폴더모델(Polder Model): 네덜란드의 ‘지리적 연대’ 정신이 20세기 후반 경제 제도로 승화된 게 바로 ‘폴더모델’이다. ‘폴더(Polder)’는 네덜란드의 독특한 역사적ㆍ지리적 배경에서 탄생한 네덜란드 고유명사로, ‘둑으로 둘러싸인 낮은 간척지’를 뜻한다. 바로 이 간척지를 유지하는 과정에서 태어난 철저한 공동체적 생존 의식이다. 제방이 무너지면 온 마을이 몰살당하게 되므로, 빈부, 종교, 상하층 상관없이 협력해야 했다. 따라서 폴더정신(Polder Mentalitiet)은 냉혹한 자연환경이 길러낸 적아(敵我) 가림 없는 극단적 실용주의 연대 정신이다. 1982년 ‘바세나르 협약’이 그 대표적인 사례다.
*4 온실(Greenhouse)의 기적: ① 지열과 폐열을 활용한 온도 및 에너지 조절(Trias Energetica & ATES)~지하 대수층 열저장(ATES)으로, 하계 온실 안이 과열되면 냉수로 식히고, 이 과정에서 더워진 물을 지하 100~200m 깊이의 지하수층에 저장해 뒀다, 동계에 그 물을 퍼 올려 온실 난방에 사용함. ② 온실 난방 수는, 지하수(온수)를 퍼 올려 열교환기를 거쳐 온실 난방 수로 순환함. ③ 열병합발전(CHP) 및 산업 폐열을 끌어와 난방에 활용. CHP 가동 시 발생하는 이산화탄소는 정화 후, 온실 내부로 공급해 작물 광합성을 촉진함에 사용함. 그 외에, 컴퓨터로 이산화탄소와 배양액을 정밀 제어하여 온실 내 이산화탄소 농도를 정밀 유지한다. 또 순환식 수경재배(Closed-loop system)를 적용해, 작물 흡수 후 남은 배양액을 회수ㆍ살균해서 재사용한다. 따라서 토마도 1kg 생산에 약 4~5L만 소요됨(90% 이상 절감).
부경대학교 해양생산시스템관리학부 명예교수
홍철훈(해양물리학 전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