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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문가 기고] 바다의 타임라인_17세기 해상대국, 패망 교훈(2)
  • 기사등록 2026-09-01 09:17:33
  • 기사수정 2026-09-01 09:32: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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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철훈 칼럼니스트네덜란드가 17세기 해상대국으로 우뚝 서자 이를 질시의 눈으로 바라본 주변국들이 늘어나기 시작했다. 그 선두 주자가 영국이었다. 영국의 호국경 올리버 크롬웰은 영국의 해군력을 강화하면서 호시탐탐 기회를 엿보다 마침내 1651년 소위 ‘항해조례’를 선포한다. 이 조례의 골자는 “영국과 영국 식민지에 들어오는 모든 물품은 생산지 배나 영국 배로만 수송해야 한다”는 것이다. 예컨대, 유럽인들에게 꼭 필요한 ‘후추’를 그 생산지인 인도네시아 배나 영국 배로 실어와야 한다는 것이다. 사실상 네덜란드 상인들의 장삿길을 막고 전쟁을 건 셈이다. 이로써 이른바 3차에 걸친 영란전쟁(Anglo-Dutch War, 1652~1674)이 시작되었다. 


그 1차(1652~1654)는 네덜란드의 대패였다. 흔히 국가끼리 전쟁은 ‘인지(認知)와 무지(無知)’에서 시작돼 지피지기(知彼知己)의 승(勝)으로 끝난다. 국가재정, 선박 수 등에서 압도적 우위였는데도 영국에 패한 것이다. 그렇다고 ‘지휘관 역량’이나 ‘작전 실패’ 때문이라 보기도 어려웠다. 실로 ‘국가 시스템’과 ‘군사적 패러다임’의 문제였다.


먼저는, 네덜란드의 해양 패권의 상징이었던 ‘플루이트(Fluyt) 선’이 치명적 독(毒)이 되었다. 전편에 이미 지적했듯, ‘화물 적재량 극대화’와 ‘비용 절감’을 위해 제작되었기에, 갑판은 좁고 선체가 가벼워 대포를 많이 실으면 배가 전복될 위험이 컸다. 게다가 선체 외벽도 얇았다. 전쟁이 나자 이 상선에 대포를 얹어 징발했지만, 본시 전시(戰時)용 군함이 아니었기에 전투력이 형편없었다. 반면, 올리버 크롬웰은 미리 전투 전용 함선(Man-of-war)을 개발하고 다량 건조했다. 전함들은 두꺼운 오크(Oak) 외벽을 가졌고, 무거운 대포를 수십 문씩 장착해도 끄떡없을 만큼 견고했다. 이를테면, 네덜란드는 ‘개조한 급조 무장(武裝)상선’으로 사전 준비된 ‘전투 전용 군함’에 대든 셈이다. 수적 우위를 믿었지만 이미 ‘체급과 군사력(화력)’에서 치명적 차가 있었다. 


전열함(戰列艦, Ship of the Line)또 하나는, 해전 패러다임이다. 네덜란드는 구태의연, 배들이 뒤엉켜 싸우다 적선에 올라타 백병전을 벌이는 방식, 소위 난전(亂戰, Melee)에 대비했다. 그러나 영국은 ‘혁신적 전술’을 들고 나왔다. 소위 ‘전열함(戰列艦, Ship of the Line)’ 체제요, ‘전열(戰列, Line of Battle)’*1전술이었다(그림). 당시는 범선용이고 ‘현측(舷側)에만 포를 설치’했는데 이 전술은 ‘현측포 일제사격’에 가장 유리한 신(新)전법이었다. 여기서 오늘날 해군의 주력함을 뜻하는 ‘전열함’이라는 단어가 생겼다. 네덜란드 배들은 속수무책 당했다. 영국의 ‘칼날 같은 함포 대형’에 접근하기도 전에 포탄에 침몰했다. 영국의 완승이었다.


여기에 지휘관과 조직력의 차도 컸다. 올리버 크롬웰이 이끄는 영국은 강력한 중앙집권적 독재체제 아래 일사불란하게 통제했다. 게다가 철저한 애국심과 충성심, 그리고 엄격한 규율에 청교도 정신으로 무장한 지휘관을 중심으로 ‘정규군인’을 구성했다. 반면, 네덜란드는 ‘구조적 모순’이 발목을 잡았다. 본시 7개 주의 연합국가였기에 5개의 ‘지방해군’으로 쪼개졌는데, 내분이 잦고, 상인들은 전쟁 중인데도 자기 주(State) 이익을 우선해 군자금 지원을 아꼈다. 영국이 ‘단일 연합체 국가(Decentralized)’였다면, 네덜란드는 이익 우선의 ‘상업자본주의 국가’였던 셈이다. 정작 전쟁에 돌입하자 장기전이 되면 ‘무역로’가 막혀 파산할까 싶어 오래 못 버텼다. 전쟁도 해본 국가가 유리한 것이다. 이미 스페인과 싸워 단련된 영국은 승전을 위해 시장을 통제했고, 국민 세금을 쥐어짜 해군에 올인했다. 이미 시작부터 판세는 결정적이었다. 


경제가 아무리 풍요롭고, 상업 네트워크가 강해도, 전쟁 위기 때 이를 극복할 ‘전문화된 국방 시스템’과 ‘국가 지휘부’의 혼연일체(渾然一體)가 안 되면, 결국 강력한 중앙집권 국가에 패할 수밖에 없다는 냉혹한 전쟁 현실을 보여주었다. 북핵(北核)으로 백척간두에 선 우리에게도 시사하는 바가 클 것이다.


'17세기 해상대국, 패망의 교훈(2)' 인포그래픽.역사 기술에선, 흔히 세 차례 영란전쟁에서 네덜란드가 모두 패했다고 알려져 있다. 그러나 네덜란드로서는, 1차는 영국에 완패, 2차는 네덜란드의 판정승, 3차는 무승부에 가깝다고 한다. 끈질기게 버틴 네덜란드의 국민성 덕분이다. 그러나 사실상 최종 패배는, 1689년 영국의 ‘명예혁명’이 일어나고서다. 네덜란드의 국가원수(네덜란드 총독)였던 빌럼 3세가 영국의 국왕(윌리엄 3세)으로 추대되고, 그 바람에 네덜란드의 상인들과 자본이 아예 영국 런던으로 대거 이주해 버리면서 네덜란드가 스스로 영국의 ‘하위 파트너’가 돼버린 까닭이다. 이로써 해양 패권의 바통이 완전히 영국으로 넘어갔다. 


지금까지 17세기 네덜란드의 융성과 몰락 과정을 살펴보았다. 청어 어장의 변동을 국가융성의 기회로 삼아 ‘선상 염장법’, ‘신(新) 어선ㆍ상선’ 등을 개발해, 조선업, 해운업, 금융업, 그리고 해군력까지 발전시켜 해상강대국으로 부상했으나, 영란전쟁의 패배로 쇠퇴의 길로 들어섰다. 그러나 이후 잦은 국난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인구대비, 미국 다음으로 높은 국민소득(약 8만 불, 2026)으로 세계 10위 경제선진국에 도약했으니 실로 놀랍다. 패망에서 다시 융성으로 국운을 바꾼 과정을 계속해서 살펴보자. (3부에 계속)


*1전열(戰列, Line of Battle): 1차 영란 해전(1652~1654)에서 영국해군이 새로 창안한 해전방식. 종래 난전(亂戰, Melee)과 달리, 함선을 항해형으로 일렬로 정렬해, 적선이 본선의 현측을 보도록 위치해 항진하면서 일제 포사격하는 방식이었다. 당시는 함포를 현측(舷側, Broadside)에만 설치할 수 있었으므로, 실로 ‘현측포 일제사격’ 대형이었다. 말하자면, ① 현측이 적선을 향(向)해야만 최대화력이 가능한 ‘현측포의 한계’를 극복하고, ② 맨 앞 지휘함이 바람 방향에 맞춰 항로를 잡으면 뒷배들이 따라와 일사불란하게 기동할 수 있었다. ③ 이 대형은 난전을 피하고 아군에 가려 적을 못 쏘는 치명적인 문제를 해결할 수 있었다. 실로 ‘범선 해전’의 효율성을 최대로 집약한 신(新) 해전방식이었다. 실로 1차 영일 전쟁에서 영국의 ‘창의적’ 전술우위가 돋보이는 대목이다. 물론 오늘날 함정은 ‘회전포탑’과 ‘유도미사일’을 장착해 어떤 대형이든 사격이 자유롭기에, 범선 시대처럼 일렬로 붙어 다니면 오히려 적의 대함 미사일이나 레이더 표적에 탐지돼 궤멸당하기 쉬워, 소위 ‘산개대형(방공대형 또는 대잠대형)’의 기동전술을 쓴다. 참고로, 2차 해전부터는 네덜란드도 영국의 ‘종대 전술’을 모방해 싸웠으므로 1차 해전 때처럼 일방적으로 당하지는 않았다.


부경대학교 해양생산시스템관리학부 명예교수 

홍철훈(해양물리학 전공)

hongch0692@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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