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 메일전송
[허태근의 역사 다시 읽기(30)] 일본 외무성과 한글 신문 기획의 그림자
  • 기사등록 2026-08-24 01:36:45
  • 기사수정 2026-08-24 02:21:54
기사수정

우리 사회는 그동안 대한제국의 멸망과 근대사를 ‘피해자와 외세’라는 하나의 익숙한 프레임 안에서만 바라봐 왔는지도 모릅니다. 본지는 역사 교과서의 이면을 들여다보고, 박제된 기억 뒤에 숨겨진 날것의 진실을 추적하고자 합니다. 부경대학교 사학과에서 후학을 양성하고 국채보상운동 학술자문교수로 활동해 온 역사학자 허태근 교수의 날카로운 시선을 통해, 우리가 미처 묻지 못했던 대한제국 망국의 진짜 원인과 ‘기억의 정치학’을 총 4부(13장)에 걸쳐 연재(주 3회)합니다. <편집자 주> 


지은이: 허 태 근 

ㆍ부경대학교 대학원 사학과 졸업(문학박사)

ㆍ전) 부경대 사학과 교수

ㆍ사) 국채보상운동 부울경 학술자문교수


---------------------------------

< 제2부 : 누가 근대를 설명하는가>

        5장. 독립신문은 누구의 신문이었는가

              ⑥ 일본 외무성과 한글 신문 기획의 그림자

                        ---------------------------------------------------------


서재필과 『독립신문』을 둘러싼 기억은 오랫동안 한국 근대사의 대표적인 성공 서사 가운데 하나로 자리해 왔다. 『독립신문』은 우리나라 최초의 민간신문이자 근대 언론의 출발점으로 기억되었고, 서재필은 개화와 독립을 이끈 선구자로 평가되어 왔다. 교과서 역시 대체로 이러한 흐름을 따르면서 『독립신문』을 민족 계몽과 자주독립 정신을 일깨운 신문으로 설명해 왔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에게 『독립신문』은 의심의 대상이 아니라, 근대 언론의 상징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그러나 역사는 시간이 흐를수록 새로운 질문을 던진다. 새로운 사료가 발견되고 익숙한 기록을 다시 읽기 시작하면, 오랫동안 당연하게 받아들였던 역사적 기억도 다시 검토할 필요가 생긴다. 특히 최근 확인되는 일본 측 외교문서와 대한제국의 각종 공문서는 『독립신문』의 창간 과정과 정치적 성격을 기존의 통설과는 다른 시각에서 바라볼 수 있는 단서를 제공한다. 

 

더욱 흥미로운 것은 『주한일본공사관기록』에 나타나는 몇몇 문서들이다. 이 기록들에는 일본 외무성과 주한 일본 공사관이 한글 신문의 창간 문제를 논의하거나, 창간에 필요한 기밀비와 장비·인력 지원을 협의한 것으로 해석될 수 있는 내용이 등장한다. 또한 서재필을 통해 대한제국의 외교 정보가 일본 측에 전달된 정황도 여러 차례 확인된다. 물론 이러한 기록만으로 곧바로 『독립신문』을 일본이 만든 신문이었다고 단정할 수는 없다. 그러나 적어도 『독립신문』이 순수한 민간 언론으로만 출발했다고 보기에는 설명하기 어려운 자료들이 존재한다는 사실만큼은 부인하기 어렵다.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에 우리는 『독립신문』을 다시 읽어볼 필요가 있다. 『독립신문』은 누구를 위해 만들어졌으며, 어떤 국제정치적 환경 속에서 탄생했는가. 그리고 그 신문이 말한 '독립'은 과연 누구의 시선에서 이해된 독립이었는가. 이 장은 바로 그 질문에서 출발하고자 한다. 

 

최근 축적된 사료다. 『독립신문』의 창간과 운영은 과연 순수한 민간 계몽운동이었는가. 아니면 그것은 국제정치와 제국주의 권력의 이해관계 속에서 형성된 보다 복합적인 정치 프로젝트였는가. 특히 1895년 말 일본 외무성과 주한 일본 공사관 사이에 오간 전보 자료들은 이 문제를 다시 생각하게 만드는 중요한 단서를 제공한다. 그 문서들 속에서 일본은 단순한 관찰자나 외교적 후원자가 아니었다. 오히려 한글 신문 창간 과정에 매우 구체적이고 실무적인 수준에서 개입하고 있었다. 

 

이 사실은 결코 가볍지 않다. 1895년 말의 조선은 극도의 정치적 혼란 속에 있었다. 을미왜변(현 교과서 을미사변) 직후 일본은 이미 군사력을 통해 조선 왕실과 정국에 직접 개입하고 있었다. 명성황후 살해사건은 단순한 궁중 권력 다툼이 아니었다. 그것은 일본이 조선의 정치 질서를 무력으로 재편하려 했음을 보여주는 사건이었다. 그리고 바로 그 직후, 일본은 총칼만이 아니라 언론이라는 수단을 통해 조선 사회 내부의 인식 구조를 바꾸기 시작한다. 1895년 12월 3일, 일본 외무대신 무츠 무네미쓰(陸奥 宗光 むつ むねみ)는 주한 일본 공사에게 조선 내 신문 문제와 관련된 지시 전보를 보낸다. 이 문건은 단순한 외교적 관심 수준을 넘어선다. 일본 외무성이 조선 내 신문 문제를 외교 채널을 통해 직접 관리하고 있었다는 사실은, 당시 한글 신문 창간이 단순한 출판 사업이 아니라 외교 전략의 일부로 인식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일본이 언론을 바라보는 시선이다. 그들은 조선의 언론 공간을 독립된 공론장으로 이해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것은 관리와 통제의 대상이었고, 조선 사회를 자신들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유도하기 위한 전략적 장치였다. 더욱 흥미로운 것은 그 다음 날 이어진 전보다. 

 

12월 4일 주한 일본 공사는 외무대신에게 회신을 보낸다. 그 내용은 신문 기자로 적합한 인물을 이미 검토하고 있다는 취지다. 이것은 단순한 관심이 아니다. 일본 측이 한글 신문 창간을 단순히 지켜보는 수준이 아니라, 인적 구성 단계부터 개입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다시 말해 조선에서 발간될 한글 신문은 자생적 민간 언론이라기보다, 일본 측이 일정 부분 기획과 운영 방향을 조율하려 했던 정치적 프로젝트였을 가능성을 보여주는 것이다. 

12월 5일에는 보다 노골적인 움직임이 나타난다. 일본 외무대신은 다시 전보를 보내 한글 신문 기자로 적합한 인물이 있는지를 재차 문의하였고, 같은 날 주한 일본 공사는 신문 제작 전반을 자신에게 일임해 달라고 요청한다. 이 장면은 매우 상징적이다. 신문은 겉으로는 민간 언론의 형식을 띠고 있지만, 그 이면에서는 일본 외무성과 공사관이 인사·제작·운영 구조 전체를 관리하려 하고 있었다. 이것은 단순한 외교 협조가 아니다. 일본은 언론을 외교 전략 수행을 위한 정치적 도구로 인식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 문제는 곧바로 자금 문제와 연결된다. 12월 6일 주한 일본 공사는 외무대신에게 한글 신문 창립비 명목으로 기밀비를 지출하고 싶다는 의사를 보고한다. 여기서 사용된 ‘기밀비(機密費)’라는 표현은 결정적이다. 기밀비는 일반적인 문화 지원금과 다르다. 그것은 정치 공작과 여론 조성을 위해 사용되는 비공식 자금에 가까웠다. 다시 말해 일본은 한글 신문을 단순한 출판 사업으로 본 것이 아니라, 조선 사회 내부의 여론 형성과 정치적 방향을 관리하기 위한 전략적 사업으로 이해하고 있었다. 

 

마침내 12월 7일, 일본 외무대신은 신문 창립비 지급을 승인한다. 동시에 신문 제작을 위해 관리(官吏)까지 파견하겠다는 뜻을 전보로 통보한다. 같은 날 1,200원이 전신환으로 송금되었다는 사실도 확인된다. 이 ‘1,200원’이라는 숫자는 단순한 해석의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일본이 조선 내 한글 신문 창설에 실제 자금을 투입했다는 직접적인 사료적 근거이다. 더구나 관리 파견 문제까지 함께 논의되었다는 점은 일본이 단순한 후원자에 머문 것이 아니라, 운영 과정 자체에 개입하려 했음을 보여준다. 

 

이 일련의 전보 자료들을 종합하면 하나의 흐름이 드러난다. 일본 외무성은 한글 신문 창간 과정에서 기획 단계부터 인사 구성, 재정 지원, 운영 관리에 이르기까지 매우 구체적이고 체계적으로 개입하고 있었다. 다시 말해 일본은 단순히 신문 창간을 지원한 것이 아니라, 일정 부분 설계하고 관리하려 했던 것이다. 

 

바로 이 지점에서 『독립신문』을 둘러싼 기존의 기억은 흔들리기 시작한다. 더욱 중요한 문제는 『독립신문』이 이미 대한제국 정부와 고종으로부터 일정한 재정 지원을 받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그럼에도 일본 측 자금이 일부라도 실제 투입되었다면, 『독립신문』은 더 이상 단순한 민간 독립 언론으로만 설명되기 어렵다. 그것은 정부 권력과 일본 외교 권력이 동시에 개입한 복합적 매체였을 가능성을 보여준다. 


일본 외무성과 한글 신문 기획의 그림자

이 문제는 독립신문』의 논조를 다시 바라보게 만든다. 신문 속에는 미국 중심적 세계관과 서구 문명 담론, 그리고 일본에 대한 상대적 침묵 혹은 우호적 태도가 반복적으로 등장한다. 기존 연구는 이를 대체로 서재필 개인의 개화사상이나 미국 체류 경험의 결과로 설명해 왔다. 그러나 만약 창간 과정 자체가 일본 외무성의 재정적·인적 개입 속에서 이루어졌다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그 논조는 더 이상 개인의 사상만으로 설명될 수 없다. 그것은 국제정치와 제국주의 권력의 이해관계 속에서 형성된 결과로 읽힐 가능성이 충분하다. 특히 『독립신문』이 사용한 ‘독립’이라는 언어 역시 다시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당시 일본은 조선을 청의 영향력에서 분리하여 자신에게 유리한 질서 속으로 편입시키려 하고 있었다. 따라서 『독립신문』이 말한 ‘독립’이 반드시 오늘날 우리가 이해하는 민족 자주독립과 같은 의미였다고 단정하기는 어렵다. 오히려 그것은 일본이 청의 종주권 체제를 해체하고 조선을 새로운 국제질서 속으로 편입시키는 과정에서 전략적으로 활용한 정치 언어였을 가능성도 존재한다. 결국 일본 외무성의 전보 자료는 『독립신문』을 둘러싼 기존의 신화적 서사에 중요한 균열을 남긴다. 그것은 근대 조선의 언론이 결코 권력으로부터 자유롭지 않았으며, 특히 제국주의 외교 권력의 이해관계 속에서 탄생할 수도 있었다는 불편한 진실을 보여준다. 

 

그러나 여기서 중요한 것은 단순한 단죄가 아니다. 이 문제를 제기하는 이유는 서재필 개인을 무조건 부정하거나 평가 절하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중요한 것은 『독립신문』이라는 상징 뒤에 가려져 있던 국제정치의 구조를 다시 보는 일이다. 근대 조선의 언론과 독립 담론은 순수한 이상만으로 형성된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언제나 외세와 권력, 자금과 외교 전략 속에서 움직이고 있었다. 

 

역사는 종종 아름다운 이름으로 기억된다. 그러나 그 이름 뒤에는 언제나 보이지 않는 권력의 흐름이 존재한다. 『독립신문』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것은 계몽과 독립의 상징이었지만, 동시에 제국주의 국제질서 속에서 탄생한 정치적 산물이기도 했다. 그리고 바로 그 복합성과 모순 속에서 우리는 조선 근대의 가장 불편하면서도 가장 중요한 진실과 마주하게 된다. 

 

• 일본의 『독립신문』 매수 계획은 사실인가. 

 

지금까지 확인된 사료를 종합하면, 일본 외교 당국이 『독립신문』의 매수를 검토하고 추진하려 했던 정황은 상당히 구체적이다. 물론 매수가 실제로 성사되었다고 단정할 수는 없지만, 일본 측이 단순한 관심이나 일시적 후원을 넘어 신문의 소유와 운영에까지 개입하려 했던 사실은 여러 기록에서 확인된다. 

 

1897년 말부터 1898년 초까지 『독립신문』을 둘러싼 상황은 이전과 다른 단계로 접어들고 있었다. 일본 외무성의 움직임이 처음에는 신문에 대한 관심과 지원처럼 보였으나, 시간이 흐르면서 신문 자체를 확보하고 운영 방향에 영향력을 행사하려는 구상으로 발전했기 때문이다. 이 무렵 『독립신문』은 일본의 관점에서 더 이상 하나의 민간신문에 머물지 않았다. 조선의 여론을 움직이고 정치적 방향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전략적 매체로 인식되고 있었다. 

 

당시 대한제국은 극심한 혼란 속에 놓여 있었다. 1895년 을미년 살해사건 이후 왕실의 권위는 크게 흔들렸고, 일본과 러시아는 한반도를 둘러싸고 치열한 영향력 경쟁을 벌였다. 대한제국은 두 세력 사이에서 위태로운 균형 외교를 시도했지만, 외세의 경쟁은 외교와 군사 영역에만 머물지 않았다. 조선의 언론과 여론 공간까지도 열강의 정치적 영향력 아래로 빠르게 편입되고 있었다. 바로 이러한 상황에서 일본 외교 당국은 『독립신문』의 정치적 가치를 주목하기 시작했다. 일본 측이 바라본 『독립신문』은 단순히 소식을 전달하는 신문이 아니었다. 조선 내부의 민심을 형성하고 정부의 정책을 비판하며, 국제정세를 해석하는 방향에 영향을 줄 수 있는 여론 형성의 창구였다. 따라서 『독립신문』을 확보하거나 그 운영에 개입하는 일은 곧 조선의 여론과 정치적 분위기에 영향력을 행사하는 수단이 될 수 있었다. 

 

이러한 배경에서 일본 외교문서에 나타나는 『독립신문』 매수 계획은 단순한 재정 지원의 차원을 넘어선다. 그것은 일본이 조선의 영토와 정부뿐 아니라 언론과 여론까지 외교 전략의 대상으로 삼고 있었음을 보여 주는 중요한 사례다. 이러한 움직임은 1897년 11월 25일 주한 일본 공사 가토 마스오(加藤增雄)가 일본 외무차관 고무라 주타로(小村壽太郎)에게 보낸 「기밀제2호(機密第2號)」에서 구체적으로 드러난다. 이 비밀 전문에는 『독립신문』에 대한 단순한 관심이나 후원을 넘어, 신문의 처리와 운영에 관여하려는 일본 측의 구상이 담겨 있었다. 

 

가토는 “헐버트의 동생이라는 자가 미국 신문 통신기자로 조선에 왔다”고 보고하면서, 그 인물이 서재필과 협의한 결과 “뜻하는 대로 잘 될 것 같다”고 전한다. 이어 『독립신문』 양도 금액이 약 4,000원 정도로 논의되고 있으며, 계약 성사 가능성도 높다고 판단하였다. 더 나아가 신문 운영을 맡을 기자 급료를 월 150원 수준으로 책정하는 방안까지 언급하고 있었다. 

 

『독립신문』 매수 계획의 실체 이미지 그림  이 장면은 매우 의미심장하다. 이미 일본 공사관은 단순히 신문을 관찰하는 수준이 아니라, 인수 비용과 운영 구조, 급여 체계까지 검토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것은 『독립신문』이 당시 외교 전략 속에서 단순한 언론이 아니라 “관리 가능한 정치 자산”으로 취급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더 주목해야 할 부분은 가토 공사가 “귀관의 생각 여하에 따라 본관이 개입하여 협의하겠다”는 취지의 입장을 밝히고 있다는 점이다. 이는 일본 외교 당국이 『독립신문』 문제를 민간 차원의 거래가 아니라 외교적 사안으로 인식하고 있었음을 의미한다. 언론의 소유권 문제 자체가 이미 국제정치의 영역 안으로 들어가고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정황은 서재필 역시 『독립신문』 처리 문제를 단순한 언론 활동 차원이 아니라 현실적인 정치·재정 문제로 접근하고 있었음을 시사한다. 물론 당시의 압박과 상황을 함께 고려해야 하겠지만, 최소한 일본 공사관과의 협의가 단순한 소문이나 추측이 아니라 실제 계약 가능성을 전제로 논의되고 있었다는 점은 부인하기 어렵다. 

 

그리고 이 흐름은 1898년으로 들어서며 더욱 노골적이고 구체적인 단계로 발전한다. 1898년 1월 15일 자 비밀문서 「≪독립신문≫ 매수의 건」(機密第3號)은 일본 측 구상이 단순한 가능성 검토를 넘어 실제 실행 계획 수준까지 발전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흥미로운 것은 일본 공사관이 오히려 자신들의 개입 사실이 드러나는 것을 매우 경계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가토는 일본 공사관이 직접 전면에 나서는 방식은 “형편이 좋지 못하다”고 판단하였다. 겉으로 보기에는 조심스러운 태도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반대였다. 만약 단순한 정상 거래였다면 굳이 은폐 구조를 고민할 이유가 없었기 때문이다. 결국 일본 측은 자신들의 개입이 드러날 경우 조선 내부와 국제사회에서 정치적 문제가 발생할 수 있다고 판단하였고, 따라서 우회 구조를 설계하기 시작한다. 

 

이 과정에서 등장하는 인물이 바로 헐버트(Homer Hulbert)였다. 문서에 따르면 일본 측은 서재필이 추천한 헐버트를 전면에 세우는 방안을 검토하였다. 형식상으로는 미국인 운영 신문처럼 보이게 하되, 실제 운영과 재정은 일본 공사관의 영향 아래 두려 했던 것이다. 가토는 먼저 헐버트를 서재필의 고용인 형식으로 두고, 그 급료는 일본 측이 부담하는 방안을 제안한다. 그리고 최종적으로는 일본에서 “적당한 미국인”을 새로 조선에 보내 공식 인수 절차를 마무리한 뒤, 다시 헐버트를 그 미국인의 고용인 형태로 두는 방안까지 검토하고 있었다. 

 

이 구조는 매우 흥미롭다. 겉으로는 미국인 소유 언론처럼 보이지만, 실제 자금과 영향력은 일본 공사관이 통제하는 방식이었다. 다시 말해 일본은 언론을 직접 장악하기보다, 국제정치적 부담을 피하기 위해 ‘미국인 명의의 우회 구조’를 고민하고 있었던 셈이다. 문서 속에서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장래의 운동상 편리(將來ノ運動上便宜)”라는 표현은 이 의도를 더욱 선명하게 보여준다. 여기서 말하는 ‘운동’은 단순한 언론 활동이 아니다. 그것은 조선 내부의 정치 환경과 여론을 자신들에게 유리하게 조성하기 위한 장기 전략에 가까운 표현이었다. 


더욱 주목되는 점은 서재필 역시 이러한 처리 방안을 “가장 좋은 방편”이라고 평가했다는 사실이다. 물론 이 표현만으로 서재필의 정치적 입장이나 의도를 단정할 수는 없다. 그러나 『독립신문』의 처리 문제를 두고 서재필과 일본 공사관 사이에 상당한 수준의 협의가 이루어지고 있었던 정황은 분명히 드러난다.  

 

그 정황이 담긴 문서의 마지막 부분은 이러한 협의와 서재필의 출국 문제를 연결해 보여준다. 가토 공사는 “서씨는 2만 4,000원을 받은 뒤, 이듬해 봄 날씨가 따뜻해지면 일시 출국할 것”이라고 보고하였다. 여기서 말한 2만 4,000원은 대한제국 정부가 서재필에게 지급하기로 한 잔여 봉급과 여비를 합한 금액과 정확히 일치한다. 이는 『독립신문』의 처리 방안이 서재필의 정부 고문직 정리와 보상금 수령, 출국 계획까지 서로 맞물려 논의되고 있었음을 보여 주는 중요한 대목이다. 

 

이 지점에서 『독립신문』 인수 논의와 일본 공사관의 개입, 그리고 서재필의 출국 문제는 서로 완전히 분리된 사건으로 보기 어려워진다. 기존의 역사 서술은 대체로 서재필의 미국 귀환을 정치적 탄압과 추방이라는 관점에서 설명해 왔다. 그러나 새롭게 확인되는 비밀문서들은 또 다른 해석의 가능성을 제시한다. 그의 출국 역시 『독립신문』의 처리와 소유권 문제, 그리고 당시의 외교적 이해관계와 일정 부분 맞물려 진행된 계획된 이탈이었을 가능성을 보여주는 것이다. 물론 이러한 해석은 앞으로도 더 많은 사료를 통해 신중하게 검토되어야 한다. 그러나 최소한 지금까지 익숙하게 받아들여졌던 단선적인 서사만으로는 당시의 복잡한 역사적 현실을 모두 설명하기 어렵다는 점만은 분명해 보인다. 

 

역사 에세이가 지니는 의미도 바로 여기에 있다. 역사 에세이는 오래도록 굳어진 영웅과 악인의 단순한 구도를 반복하는 글이 아니다. 기록의 이면을 살피고, 그 시대를 움직였던 권력과 이해관계, 인간의 선택과 시대적 한계를 함께 들여다보며 독자가 스스로 질문하도록 이끄는 글이다. 우리가 역사를 다시 읽는 이유는 과거의 인물을 함부로 단죄하거나 미화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복잡한 역사적 현실을 있는 그대로 이해하고 오늘의 시각으로 성급한 결론을 내리지 않기 위해서이다. 다시 말해 역사 에세이는 하나의 정답을 제시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너무 오랫동안 당연하게 믿어 온 역사적 상식에 질문을 던지고, 그 질문을 통해 역사를 더욱 깊고 입체적으로 이해하도록 돕는 과정이다. 그러한 관점에서 보면 『독립신문』 문제는 단순히 한 신문의 흥망이나 서재필 개인의 행적을 설명하는 사건으로 끝나지 않는다. 우리는 흔히 근대 언론을 민족 계몽과 독립 의식의 상징처럼 기억하지만, 실제 역사 속 언론은 언제나 권력과 자본, 외교와 국제정치의 영향 속에서 움직여 왔다.  

 

『독립신문』 역시 그러한 복합적인 구조 속에 존재하고 있었다. 그래서 중요한 것은 단순한 친일·반일의 이분법이 아니다. 오히려 당시 언론 공간이 어떻게 국제정치 속에 편입되고 있었으며, 어떤 방식으로 소유권과 영향력이 재편되고 있었는가를 냉정하게 바라보는 일이다. 역사는 종종 "누가 신문을 만들었는가"보다 "그 신문의 소유권이 누구의 손으로 넘어가고 있었는가"를 물을 때 훨씬 더 깊은 진실을 드러낸다. 결국 『독립신문』을 둘러싼 논쟁은 한 언론사의 역사를 넘어, 대한제국 시기 언론이 누구의 자본과 어떤 외교 전략 속에서 운영되고 있었는가를 묻는 문제이며, 동시에 우리가 근대사를 어떤 시각으로 읽어야 하는지를 다시 생각하게 만드는 중요한 역사적 질문이기도 하다.  


본 연재물의 저작권은 저자에게 있으며 향후 단행본 출간을 전제로 일부를 선공개하는 형태입니다." 

관련기사
0
기사수정
  • 기사등록 2026-08-24 01:36:45
기자프로필
나도 한마디
※ 로그인 후 의견을 등록하시면, 자신의 의견을 관리하실 수 있습니다. 0/1000
BNK경남은행
고리원자력본부
부산광역시교육청_260130
2026 02 06 부산광역시 상수도사업본부
한국전력공사 부산울산본부
부산경제진흥원
부산시설공단
부산교통공사 새해인사 배너
부산환경공단
최신뉴스더보기
대마도 여행 NINA호
2024_12_30_쿠쿠
한국수소산업협회
모바일 버전 바로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