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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태근의 역사 다시 읽기(25)] 조선을 떠난 서재필, 돌아온 이방인 ‘필립 제이슨’
  • 기사등록 2026-08-13 16:30:43
  • 기사수정 2026-08-13 16:52: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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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사회는 그동안 대한제국의 멸망과 근대사를 ‘피해자와 외세’라는 하나의 익숙한 프레임 안에서만 바라봐 왔는지도 모릅니다. 본지는 역사 교과서의 이면을 들여다보고, 박제된 기억 뒤에 숨겨진 날것의 진실을 추적하고자 합니다. 부경대학교 사학과에서 후학을 양성하고 국채보상운동 학술자문교수로 활동해 온 역사학자 허태근 교수의 날카로운 시선을 통해, 우리가 미처 묻지 못했던 대한제국 망국의 진짜 원인과 ‘기억의 정치학’을 총 4부(13장)에 걸쳐 연재(주 3회)합니다. <편집자 주> 


지은이: 허 태 근 

ㆍ부경대학교 대학원 사학과 졸업(문학박사)

ㆍ전) 부경대 사학과 교수

ㆍ사) 국채보상운동 부울경 학술자문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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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2부 : 누가 근대를 설명하는가>

        5장. 독립신문은 누구의 신문이었는가

              ① 조선을 떠난 서재필, 돌아온 이방인 ‘필립 제이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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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적 인물에 대한 국가의 평가는 언제나 확정된 결론으로 남는 것은 아니다. 한때 독립운동가이자 민족 지도자로 추앙받아 건국훈장을 받은 인물이 뒤늦게 친일 행적이 드러나면서 서훈을 박탈당하기도 한다. 『시일야방성대곡』을 쓴 언론인 장지연은 항일 언론인으로 높이 평가받았지만, 말년에 조선총독부 기관지에 친일적인 글을 기고한 사실이 밝혀지면서 훈장이 취소되었다. 동아일보와 보성전문학교를 세운 김성수 역시 민족교육과 언론 발전의 공로를 인정받아 건국훈장을 받았으나, 일제강점기의 친일 행적이 확인되면서 56년 만에 서훈이 취소되었다. 이처럼 국가는 한 인물의 공적을 기려 훈장을 수여하지만, 새로운 자료가 발견되고 역사적 관점이 달라지면 그에 대한 평가는 다시 이루어지기도 한다. 

 

서재필(徐載弼, 1864~1951)도 이러한 역사적 논쟁에서 예외는 아니다. 그는 조선 말기의 문신이자 개화 운동가로 갑신정변에 참여하였으며, 정변이 실패하자 미국으로 망명하였다. 그곳에서 의사가 되고 미국 시민권을 취득한 뒤에는 ‘필립 제이슨(Philip Jaisohn)’이라는 이름으로 활동하였다. 이후 조선으로 돌아와 『독립신문』을 창간하고 독립협회를 이끌며 근대 개혁운동에 참여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이러한 공적을 인정하여 1977년 그에게 건국훈장 가운데 최고 등급인 대한민국장을 추서하였다. 

 

이로 인해 학교에서 우리는 서재필을 우리나라 최초의 민간 신문인 『독립신문』을 창간한 선각자이자 독립협회를 이끈 개화운동의 지도자로 배워 왔다. 그는 민주주의와 근대 시민의식을 조선 사회에 소개하고 자주독립과 국민 계몽을 위해 헌신한 애국자로 기억된다. 그래서 오늘날의 교과서와 언론도 대체로 이러한 평가를 중심으로 그의 생애를 소개한다. 

 

그러나 훈장과 교과서의 평가가 곧 역사적 논쟁의 끝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일부 역사학자들은 갑신정변에서 그가 맡았던 역할과 일본 세력에 의존했던 개화파의 한계, 미국 시민권을 취득한 뒤 조선 정부로부터 받은 경제적 지원, 『독립신문』의 운영 자금과 정치적 성격까지 함께 검토해야 한다고 지적한다. 특히 조선으로 돌아온 뒤에도 자신을 조선인이 아닌 미국인으로 인식하고 행동했다는 사실은 그를 ‘조선의 독립운동가’로 평가하는 시각과 쉽게 조화되지 않으며, 지금까지도 적지 않은 논쟁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이처럼 서재필의 삶에는 개화와 독립에 기여한 공적뿐 아니라 그 이면의 복합적인 행적과 한계도 함께 존재한다. 따라서 그를 무조건 위대한 선각자로 추앙하거나, 반대로 몇 가지 과오만을 근거로 그의 공적 전체를 부정하는 태도는 모두 경계해야 한다. 국가가 수여한 훈장이나 교과서의 평가에만 머무르지 않고, 그가 남긴 공적과 한계를 구체적인 자료를 통해 함께 살펴볼 필요가 있다. 서재필을 둘러싼 논쟁은 한 인물을 어떻게 기억할 것인가를 넘어, 국가가 누구를 독립운동가로 규정하고 역사가 영웅의 모습을 어떻게 만들어 왔는가를 돌아보게 한다. 

 

이런 점에서 서재필(徐載弼, 1864~1951)만큼 평가가 크게 엇갈리는 인물도 드물다. 그는 조선 말기 문신이자 개화 운동가로 갑신정변에 참여했으며, 정변이 실패한 뒤 미국으로 망명하여 의사가 되었다. 미국 시민권을 취득한 이후에는 ‘필립 제이슨(Philip Jaisohn)’이라는 이름으로 활동하다가 조선으로 돌아와 『독립신문』을 창간하고 독립협회를 이끌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이러한 활동과 독립운동의 공적을 인정하여 1977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하였다. 그러나 국가의 공식적인 평가에도 불구하고 그의 삶과 활동을 둘러싼 역사적 논쟁은 지금까지 계속되고 있다. 

 

지금까지 우리가 배우고 알고 있는 서재필은 우리나라 최초의 민간 신문인 『독립신문』을 창간한 선각자이자 독립협회를 이끈 개화운동의 지도자다. 그는 민주주의와 근대 시민의식을 조선 사회에 소개한 인물이며, 나라의 자주독립과 국민 계몽을 위해 헌신한 애국자로 기억된다. 오늘날에도 많은 언론과 교과서는 이러한 평가를 중심으로 서재필을 소개하고 있다.  

 

1947~1948년경(83~84세 무렵으로 추정) 서재필 사진 

그러나 역사 속 서재필은 이처럼 단순한 한 가지 모습만으로 설명되는 인물은 아니다. 

그를 근대 언론의 선구자이자 애국계몽운동의 지도자로 평가하는 견해가 있는 반면, 그의 삶을 훨씬 비판적으로 해석하는 시각도 적지 않다. 일부 연구자들은 서재필이 미국 시민권을 취득한 뒤 조선으로 돌아와 활동한 점에 주목하며, 그의 개혁운동이 미국을 비롯한 서구 열강의 이해관계와 전혀 무관했다고 보기 어렵다고 주장한다. 또한 독립협회 활동 역시 순수한 민족운동이라기보다 당시 복잡한 국제정세 속에서 이루어진 정치운동으로 이해해야 한다는 견해도 있다. 

 

특히 『독립신문』을 둘러싼 논란은 지금까지도 이어지고 있다. 정부가 신문 창간 과정에서 상당한 재정적 지원을 했다는 기록을 근거로, 『독립신문』이 과연 완전한 민간신문이었는가를 문제 삼는 연구가 있는가 하면, 서재필이 미국으로 돌아가기 직전 『독립신문』의 운영권을 일본 측에 넘기려 했다는 설을 제기하는 자료도 있다. 또한 조선을 떠날 당시 정부로부터 거액의 보상금을 지급받아 미국에서 인쇄업을 운영하며 경제적으로 성공했고, 이후의 독립운동 역시 자신의 인쇄·출판 사업과 일정한 관련성을 가진 것이 아니냐는 해석도 제기된다. 

 

물론 이러한 주장들에 대해 다른 연구자들은 사료 해석이 과장되었거나 일부 사실을 확대 해석한 것이라고 반박한다. 따라서 이러한 내용을 단편적인 사실로 단정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서재필이라는 인물이 오늘날 우리가 교과서에서 접하는 것처럼 일방적인 찬사만 받는 인물도, 반대로 모든 비판이 입증된 인물도 아니라는 점이다. 

 

이 장에서는 이러한 상반된 평가 가운데 어느 한쪽의 주장만을 따르려는 것이 아니다. 『독립신문』 창간 자금의 출처는 무엇이었는지,  

정부 지원은 어느 정도였는지,  

일본 매각설은 어떤 사료에서 비롯되었는지,  

미국 귀국 과정에서의 보상금은 실제로 얼마였으며 어떤 성격의 돈이었는지  

등을 당시의 기록과 사료를 중심으로 별도의 장으로 만들어 하나씩 살펴볼 것이다. 그 이유라면 역사적 평가는 감정이 아니라 사료 위에서 이루어져야 하기 때문이다. 

 

더구나 역사는 한 사람을 칭찬하거나 비난하는 학문이 아니다. 그가 어떤 시대를 살았고, 왜 그런 선택을 했으며, 그 선택이 어떤 결과를 남겼는지를 차분히 살펴보는 과정이다. 서재필 역시 마찬가지다. 그는 애국자였을까, 아니면 자신의 이상과 현실 사이에서 끊임없이 선택을 반복했던 한 시대의 인간이었을까. 

 

그래서 이 장에서는 먼저 『독립신문』이 어떠한 시대적 배경 속에서 창간되었는지를 살펴보고자 한다. 아울러 그 과정에서 서재필이 맡았던 역할은 무엇이었으며, 오늘날 널리 알려진 그의 모습과 실제 기록 사이에는 어떠한 차이가 있는지도 하나씩 확인해 볼 것이다. 서재필을 둘러싼 찬사와 비판을 함께 살펴볼 때, 비로소 그의 삶과 사상은 물론 『독립신문』이 지닌 성격과 의미도 더욱 입체적으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먼저 『독립신문』 창간 이전에 서재필이 어떠한 삶을 살았는지부터 살펴볼 필요가 있다. 그 출발점은 갑신정변의 실패와 그에 따른 망명이었다. 그가 조선을 떠난 것은 단순히 정치적 위기를 피해 국경을 넘은 사건만은 아니었다. 그것은 자신이 살아온 시대와의 단절이자, 자신이 속해 있던 세계 전체가 무너지는 경험이었다. 갑신정변이 실패한 뒤 그는 조선이라는 정치 공동체 안에서 더 이상 살아남기 어려운 처지가 되었다. 살아남기 위해 조선을 떠나야 했으며, 그렇게 떠난 뒤에는 더 이상 이전의 자신으로 돌아갈 수 없었다. 

 

그 이름의 변화는 단순히 표기가 달라진 것을 의미하지 않았다. 이름은 한 인간의 소속을 나타내고 충성의 방향을 드러내며, 그가 어떠한 정치적·사회적 질서 속에서 살아가는지를 보여준다. 특히 조선 후기 사회에서 국왕에 대한 충성은 개인이 선택할 수 있는 단순한 정치적 입장이 아니었다. 그것은 인간관계와 사회질서를 떠받치는 윤리적 기반에 가까웠다. 그러한 세계에서 미국 시민권을 취득한다는 것은 법률상 국적만 바꾸는 행위가 아니었다. 자신이 속해 있던 정치 공동체와의 관계를 끊고, 전혀 다른 정치질서의 구성원으로 다시 태어나는 일이었다. 

 

이러한 변화의 의미는 미국 시민권을 취득하는 과정에서 이루어진 충성 선서를 통해 더욱 분명하게 드러난다. 현재까지 서재필 본인의 선서문은 확인되지 않았지만, 비슷한 시기에 미국 시민권을 취득한 서광범의 사례를 살펴보면 그 선서가 지닌 의미를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당시 시민권 선서의 핵심은 기존의 군주와 국가에 대한 충성을 포기하고 미국의 헌법과 질서에 충성하겠다고 선언하는 데 있었다. 따라서 미국 시민권의 취득은 신변 보호를 위한 법적 장치를 마련하는 데 그치는 일이 아니었다. 그것은 한 인간의 정치적 소속과 정체성이 새롭게 규정되는 ‘정치적 재탄생’에 가까운 절차였다. 조선에서 태어난 서재필이 법적으로 미국 시민 필립 제이슨이 되는 순간, 그는 더 이상 조선 국왕의 신민이 아니었다. 

 

그러나 오랫동안 자신이 속해 있던 정치 공동체와 결별하는 일이 결코 쉬웠을 리 없다. 서재필은 단순히 새로운 삶의 터전을 찾아 떠난 생활인이 아니었다. 그는 조선을 개혁하겠다는 꿈을 품고 갑신정변에 참여했던 인물이었다. 따라서 정변의 실패는 한 차례의 정치적 좌절을 넘어, 자신이 믿고 추구했던 세계 전체가 무너진 사건이었다. 그는 일본으로 피신했다가 다시 미국으로 건너가야 했으며, 살아남기 위해 새로운 세계의 질서와 규칙에 적응해 갔다. 근대의 격변은 그에게 개혁의 이상을 품은 채 살아남기 위해 오히려 조선에서 형성된 자신의 정체성 일부를 내려놓도록 요구하고 있었다. 

 

그러한 적응의 과정에서 미국 생활은 그의 사고방식과 삶의 기반을 크게 바꾸어 놓았다. 그는 워싱턴에서 학업을 이어 가며 의학을 공부했고, 마침내 의사로서 새로운 삶을 시작하였다. 1894년에는 정식 의사가 되었고, 이듬해에는 미국인 여성 뮤리엘 암스트롱(Muriel Armstrong)과 결혼하였다. 안정된 직업과 가정을 갖추면서 그는 미국 사회의 구성원으로 더욱 깊이 편입되었다. 이제 그는 조선에서 쫓겨난 망명객에 머물지 않았다. 미국 사회에서 전문직 시민으로 살아가는 필립 제이슨이 되어 가고 있었다. 

 

이러한 변화가 그의 내면과 일상에 얼마나 깊이 스며들었는지를 보여주는 인상적인 기록이 있다. 1893년 워싱턴에서 서재필을 만난 윤치호는 일기에 그가 “우리말을 거의 잊어버리고 있었다”는 취지의 글을 남겼다. 이 짧은 기록은 단순히 오랜 외국 생활로 언어 사용이 서툴러졌다는 사실만을 뜻하지 않는다. 언어는 인간이 생각하고 기억하며 세상을 이해하는 틀이기도 하다. 그런 점에서 모국어를 잊어 가는 모습은 그의 생활 기반뿐 아니라 정체성까지 새로운 세계 속에서 재편되고 있었음을 보여 주는 상징적인 장면이라 할 수 있다. 

 

그렇다고 해서 서재필이 조선에 대한 기억과 관심까지 완전히 지워 버린 것은 아니었다. 다만 그가 다시 조선으로 돌아가는 문제는 과거의 고향을 찾아가는 것처럼 단순하지 않았다. 갑신정변 이후 일본과 조선 정부는 여러 차례 망명자들의 귀환 문제를 논의했고, 변화된 정치 상황 속에서 박영효와 서광범을 비롯한 일부 개화파 인물들이 조선으로 돌아갔다. 그러나 서재필은 오랫동안 귀국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가 귀국을 망설인 이유를 단순히 신변에 대한 두려움만으로 설명하기는 어렵다. 당시 조선의 정세는 여전히 불안정했고, 개혁 세력은 정치 상황이 달라지면 언제든 다시 제거될 수 있었다. 더욱이 그는 이미 미국 시민권을 취득하고 직업과 가정을 갖춘 미국 사회의 구성원으로 살아가고 있었다. 이제 조선은 그에게 돌아가기만 하면 이전의 삶을 되찾을 수 있는 현실의 공간이 아니었다. 세월이 흐를수록 조선은 점차 멀어졌고, 그의 삶 속에서 현실의 고국이라기보다 상처와 이상이 함께 남아 있는 기억의 공간으로 변해 가고 있었다. 

 

그러다가 시간이 흐르면서 그의 마음도 흔들리기 시작했다. 갑오개혁 이후 조선 사회에는 새로운 변화의 가능성이 등장하고 있었고, 개화 세력 역시 다시 움직이고 있었다. 결국 그는 1895년 12월 조선으로 돌아가기로 결심한다. 그러나 이 귀국은 전통적인 의미의 귀향과는 달랐다. 그는 더 이상 조선인이 아니었다. 조선을 향해 떠나는 그의 여권에는 미국 정부가 발행한 이름, 곧 ‘Philip Jaisohn’이 적혀 있었다. 법적으로 그는 미국 시민이었다. 

 

바로 이 지점에서 서재필의 귀국은 근대의 역설을 압축적으로 드러낸다. 그는 조선을 바꾸기 위해 돌아왔지만, 조선인이 아닌 미국인의 신분으로 돌아왔다. 조선 내부의 개혁을 추진하기 위해 오히려 조선 바깥에 있는 존재가 되어야 했던 것이다. 이는 단순히 한 개인의 선택만으로 설명할 수 있는 일이 아니라, 당시 조선이 처해 있던 불안정한 정치적·외교적 현실과도 깊이 맞닿아 있었다. 

 

이러한 이중적 위치는 귀국 이후 그가 선택한 활동 방식에서도 그대로 나타났다. 그는 조선 정부의 정식 관리로 편입되기를 거부하고 ‘고문’이라는 자리에 머물렀다. 고문은 정부 정책에 일정한 영향력을 행사하면서도 그 결과에 대한 정치적 책임은 직접 지지 않는 위치였다. 이는 미국인이라는 신분을 유지한 채 조선의 개혁에 참여하려는 현실적인 선택이었지만, 동시에 조선의 정치체제 안으로 완전히 들어가기를 스스로 유보한 결정이기도 했다. 결국 그는 조선을 변화시키고자 했으나, 조선인으로 돌아오거나 조선 체제의 구성원이 되는 길까지 선택하지는 않았다. 

 

흥미로운 점은 바로 외국인 신분이 오히려 그에게 더 큰 영향력을 제공했다는 사실이다. 당시 조선 정부는 외국인 고문에게 높은 급여와 권한을 제공하고 있었다. 미국 시민 제이슨은 조선인 관리보다 훨씬 유리한 조건 속에서 활동할 수 있었다. 근대화의 압력 속에서 조선은 외부의 권위를 내부의 권위보다 더 신뢰하는 구조로 변해가고 있었다. 서재필은 바로 그 틈새를 활용해 조선을 바라보았고, 또 조선을 바꾸려 했다. 그리고 그의 이름 사용 역시 이러한 정체성을 잘 보여준다. 그는 귀국 이후에도 자신을 ‘서재필’보다 ‘제손 박사’ 혹은 ‘피 제선’과 같은 방식으로 표기하였다. 그것은 단순한 표기상의 취향이 아니었다. 이름은 자신이 누구인가를 선언하는 행위였다. 그는 조선을 위해 활동했지만, 다시 완전한 조선인으로 돌아가지는 않았다. 

 

이 때문에 후대 일부 연구자들은 그를 두고 ‘변절’ 혹은 ‘거리두기’라는 표현을 사용하기도 한다. 그러나 그러한 평가는 지나치게 단순하다. 보다 구조적으로 바라보면, 그는 근대 전환기라는 거대한 격변 속에서 살아남기 위해 복합적인 전략을 선택한 인물이었다. 조선인으로서는 발언권을 확보하기 어려웠고, 오히려 외국인이라는 위치에서만 조선 사회를 움직일 수 있었던 시대였다. 그는 조선을 버린 것이 아니라, 조선을 바라볼 수 있는 위치 자체를 바꾸었던 것이다. 

 

따라서 서재필의 삶은 근대가 개인에게 요구했던 가장 잔혹한 선택을 보여준다. 그는 국적을 바꾸어야 했고, 언어를 잃어가야 했으며, 이름조차 새롭게 불러야 했다. 충성의 대상 역시 다시 선택해야 했다. 근대는 인간에게 자유를 제공했지만, 동시에 그 자유를 얻기 위해 자신의 원래 세계와 단절할 것을 요구했다. 

 

그러고 보면 서재필의 귀국은 단순한 귀향이 아니었다. 그것은 단절 위에서 다시 시작되는 새로운 출발이었다. 조선을 바꾸기 위해 돌아왔지만, 그는 더 이상 예전의 조선인이 아니었다. 조선을 위해 말했지만, 미국 시민의 이름으로 말해야 했다. 조선을 향해 손을 내밀었지만, 그 손은 이미 조선 바깥의 세계를 거쳐 온 손이었다. 그리고 바로 그 지점에서 우리는 조선 근대의 비극적 역설과 마주하게 된다. 조선을 바꾸기 위해서는 조선인이기를 온전히 유지할 수 없었던 현실, 그것이야말로 근대가 요구한 가장 잔혹한 선택이었다. 서재필은 영웅도, 단순한 이방인도 아니었다. 그는 무너지는 조선과 새로운 세계 사이에서 자신의 이름을 바꾸며 살아남아야 했던 한 인간이었다. 


"본 연재물의 저작권은 저자에게 있으며 향후 단행본 출간을 전제로 일부를 선공개하는 형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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