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경제신문 편집국

지은이: 허 태 근
ㆍ부경대학교 대학원 사학과 졸업(문학박사)
ㆍ전) 부경대 사학과 교수
ㆍ사) 국채보상운동 부울경 학술자문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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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2부 : 누가 근대를 설명하는가>
5장. 독립신문은 누구의 신문이었는가
⑤우리가 몰랐던 『독립신문』의 두 얼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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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몰랐던 『독립신문』의 사람들은 흔히 ‘두 얼굴’이라는 말을 들으면 겉과 속이 다른 사람이나 태도를 떠올린다. 앞에서는 정의와 공익을 말하면서 뒤에서는 자신의 이익을 좇는 이중적인 모습이 대표적인 예다. 그러나 두 얼굴이 언제나 위선이나 기만만을 뜻하는 것은 아니다. 하나의 인물이나 제도 안에 서로 다른 성격과 지향이 함께 존재할 때도 우리는 ‘두 얼굴’이라는 표현을 사용한다. 빛이 밝을수록 그 뒤의 그림자가 선명해지듯, 역사적 성취가 큰 대상일수록 그 이면에는 시대적 한계와 모순이 함께 자리할 수 있다.
고대 로마의 신 야누스가 서로 반대 방향을 바라보는 두 얼굴을 가진 모습으로 표현된 것도 이와 비슷하다. 한 얼굴은 지나온 시간을 돌아보고, 다른 얼굴은 다가올 미래를 바라본다. 두 얼굴은 어느 하나가 거짓이라는 뜻이 아니라, 하나의 존재 안에 서로 다른 시간과 시선이 공존한다는 의미다. 역사 속 인물과 제도 역시 한쪽 얼굴만으로는 온전히 이해하기 어렵다. 무엇을 이루었는가와 함께 무엇을 보지 못했는지, 어떤 이상을 내세웠는가와 함께 어떤 권력과 현실에 기대었는지를 살펴보아야 그 실체가 드러난다.
『독립신문』도 그러한 두 얼굴을 지닌 신문이었다. 우리는 흔히 『독립신문』을 조선 최초의 민간신문이자 근대 언론의 출발점으로 기억한다. 그래서 『독립신문』을 떠올리면 자연스럽게 언론의 자유와 계몽, 자주독립, 그리고 서재필이라는 이름을 함께 연상한다. 실제로 『독립신문』은 한글을 중심으로 새로운 지식과 국제정세를 전달하고, 백성에게 국가와 사회의 문제를 생각하게 했다는 점에서 중요한 역사적 의미를 지닌다.
그러나 이것은 『독립신문』이 지닌 한쪽 얼굴이다. 다른 한쪽에는 격변하는 국제정세와 국내 정치 세력의 이해관계, 정부의 재정 지원과 개화 관료들의 후원, 그리고 일본을 비롯한 외세에 대한 복합적인 인식이 자리하고 있었다. 『독립신문』은 단순히 새로운 형식의 신문이 아니라, 대한제국 성립 직전의 혼란한 국제정세와 권력 재편 과정에서 탄생한 정치적 산물이기도 했다.
1890년대 조선은 국가의 진로 자체가 불확실한 시대였다. 청일전쟁으로 청나라의 영향력이 약화되자 일본이 그 자리를 차지하려 했고, 러시아와 서구 열강도 조선을 둘러싸고 치열한 경쟁을 벌였다. 조선은 어느 한 나라의 힘에 의존해서는 주권과 생존을 온전히 지키기 어려운 처지였다. 왕실과 개화파, 보수 세력도 국가가 나아갈 방향을 두고 서로 다른 해법을 제시하며 충돌했다.
이러한 시대에 여론은 더 이상 부차적인 문제가 아니었다. 새로운 국가를 어떤 방향으로 이끌 것인지, 백성에게 무엇을 근대와 문명이라고 설명할 것인지, 복잡한 국제정세를 어떤 시각으로 이해시킬 것인지가 중요한 정치적 과제로 떠올랐다. 바로 그 역할을 맡으며 등장한 것이 『독립신문』이었다.
서재필은 권력을 직접 장악하기보다 신문을 통해 여론을 움직이고 조선 사회의 변화를 이끌려 했다. 그러나 『독립신문』은 오늘날의 의미에서 완전히 독립된 민간 언론으로 출발한 것은 아니었다. 창간과 운영 과정에서 조선 정부의 재정 지원을 받았고, 개화 관료들의 정치적 후원을 기반으로 삼았다. 또한 당시 국제정세 속에서 일본과 미국을 비롯한 외세의 영향과도 무관하지 않았다. 따라서 『독립신문』은 언론인 동시에 정치적 실천의 수단이었고, 계몽을 추구하면서도 권력과 자금의 관계 속에서 움직이는 신문이었다.
바로 이 점을 이해해야 한다. 그래야만 『독립신문』의 논설이 조선의 자주독립을 강조하면서도 때로는 일본을 우호적으로 평가한 이유, 일본에 맞서 봉기한 의병을 사회 질서를 어지럽히는 세력으로 비판한 이유, 그리고 ‘독립’이라는 말을 오늘날과는 다른 의미로 사용한 배경을 제대로 이해할 수 있다. 그리고 『독립신문』이 말한 독립은 모든 외세로부터 벗어난 완전한 주권국가의 독립이라기보다, 우선 청나라의 오랜 간섭에서 벗어나는 것을 의미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 때문에 일본은 조선의 독립을 위협하는 새로운 제국으로 인식되기보다, 청의 영향력을 몰아내고 조선의 개혁을 도운 우호적 세력으로 평가되기도 했다. 자주독립을 말하면서도 일본의 개입을 충분히 경계하지 못했던 모순은 바로 이러한 시대 인식에서 비롯되었다.
그렇다고 『독립신문』의 계몽적 성과를 부정하거나 처음부터 친일적 목적을 가진 신문이었다고 단정해서는 안 된다. 그러한 평가는 『독립신문』을 무조건 민족 언론으로 찬양하는 것만큼이나 역사를 단순화할 위험이 있다. 중요한 것은 어느 한쪽만을 선택하는 일이 아니라, 두 얼굴이 어떤 관계 속에서 함께 나타났는지를 살펴보는 일이다.
한쪽 얼굴에는 한글을 통해 민중과 소통하고 새로운 지식과 민권 의식을 확산하려 했던 근대 언론의 선구적 모습이 있었다. 다른 한쪽 얼굴에는 정부와 개화 관료의 지원을 받으며 특정한 정치적 방향을 제시하고, 일본의 팽창 의도를 충분히 간파하지 못한 채 서구 중심의 문명관으로 조선 사회와 의병을 바라본 한계가 있었다. 이 두 모습은 서로 완전히 분리된 것이 아니라 하나의 신문 안에 겹쳐 존재했다.
오늘날 『독립신문』은 근대 언론의 출발점이자 민족 계몽의 상징으로 기억된다. 교과서 역시 서재필을 개화와 독립의 선구자로, 『독립신문』을 자주독립과 민권 의식을 일깨운 신문으로 설명해 왔다. 이러한 평가는 분명 근거가 있다. 그러나 실제 논설과 당시의 정부 문서, 외교 자료를 함께 살펴보면 『독립신문』의 정치적 위치와 현실 인식은 우리가 익숙하게 알고 있는 이미지보다 훨씬 복합적이었다.
『독립신문』의 두 얼굴 가운데 어느 하나만이 진실인 것은 아니다. 계몽과 정치, 자주와 의존, 민권과 엘리트 의식, 근대화의 열망과 제국주의에 대한 오판이 함께 존재했다. 밝은 얼굴만 바라보면 그 신문이 지닌 한계와 모순을 놓치고, 어두운 얼굴만 강조하면 조선 사회에 새로운 공론장과 언론 문화를 열어 놓은 역사적 성과를 외면하게 된다. 따라서 『독립신문』을 다시 읽는 일은 그것을 찬양하거나 단죄하기 위한 작업이 아니다. 한 시대의 신문이 무엇을 꿈꾸었고 무엇을 잘못 판단했는지, 무엇을 보았으며 무엇을 보지 못했는지를 함께 살펴보는 일이다. 바로 그 두 얼굴 사이에서 『독립신문』의 실체와 조선 근대사의 복잡한 모습이 비로소 드러난다.
그러한 차이는 여러 주제에서 확인된다. 그 가운데서도 국가의 군사력에 관한 인식은 『독립신문』의 정치적 성격을 가장 뚜렷하게 보여주는 사례 가운데 하나다. 당시 조선이 직면한 가장 절박한 과제는 단순히 제도를 개혁하는 데 그치지 않고, 외세의 위협으로부터 나라를 스스로 지킬 수 있는 힘을 어떻게 갖출 것인가 하는 문제였다. 그런데 바로 이 중대한 문제를 둘러싸고 일본 정부가 조선에 요구한 방향과 『독립신문』이 제시한 논리가 적지 않은 부분에서 맞닿아 있었다.
이러한 공통점은 『독립신문』이 창간되기 전 일본이 조선에 요구했던 내정개혁안에서부터 나타난다. 청일전쟁이 진행 중이던 1894년, 일본 공사 이노우에 가오루는 고종에게 이른바 ‘제2차 내정개혁안’을 제출하였다. 그 안에는 조선의 군비를 '내란을 진정할 수 있는 정도의 병력' 수준으로 제한해야 한다는 내용이 포함되어 있었다. 이것은 단순한 군사 개혁안이 아니었다. 조선이 외세에 맞설 수 있는 군사력을 갖추지 못하도록 하려는 정치적 의도가 담긴 제안이었다. 다시 말해 일본은 조선을 자주적으로 국방력을 갖춘 국가가 아니라, 국내 치안만 유지할 수 있는 제한된 군사력을 가진 국가로 남겨 두려 했던 것이다.
그런데 흥미로운 점은 『독립신문』의 논조 역시 이와 상당히 유사한 방향을 보였다. 서재필은 논설에서 조선이 대규모 육군과 해군을 유지할 필요는 없으며, 동학이나 의병 같은 이른바 '토비'를 진압할 정도의 병력만 있으면 충분하다고 주장하였다. 물론 서재필과 일본 정부의 의도까지 동일했다고 단정할 수는 없다. 그러나 최소한 국가의 군사력을 어디까지 필요하다고 보았는가라는 점에서는 두 시각이 일정 부분 겹쳐 보인다는 사실은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 지점에서 묘한 긴장이 발생한다. 고종은 대한제국을 지키기 위해 강병을 추진하고 있었지만, 『독립신문』은 오히려 군비 축소에 가까운 논리를 전개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특히 당시 고종은 의병 세력과의 연계를 모색하며 항일 저항 가능성을 고민하고 있었다. 그런데 『독립신문』은 의병을 자주독립의 주체라기보다 사회 질서를 어지럽히는 존재처럼 묘사하였다. 이는 『독립신문』의 논리가 대한제국의 강병 노선을 뒷받침하기보다, 일본이 설정한 ‘치안 국가’ 수준의 군사 구조를 사실상 정당화하는 방향으로 작용하게 한 것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단순한 친일 여부의 문제가 아니다. 더 본질적인 문제는 『독립신문』이 어떤 국가를 상상하고 있었는가 하는 점이다. 고종에게 국가란 스스로를 지킬 군사력을 가진 주권국가였다. 그러나 『독립신문』의 논조 속 조선은 강한 군사 국가라기보다 질서와 개혁을 통해 외부 세계와 조화를 이루는 계몽 국가에 가까웠다. 문제는 그 질서의 중심에 일본이 존재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이러한 긴장은 외교 문제에서도 드러난다. 『주한일본공사관기록』에는 서재필을 통해 대한제국의 외교 관련 정보가 일본 공사관 측에 전달된 정황이 여러 차례 나타난다. 『주한일본공사관기록』 11권에 수록된 「露韓密約一件」, 문서번호 機密 號外(皮封必親展), 1897년 11월 17일 자 문서는 이러한 정황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이다.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수록 본의 해당 문서에서 잘 알 수 있다. 이 기록에 따르면 민영환의 러시아 외교 교섭 내용이 윤치호를 거쳐 서재필에게 전달되고, 다시 일본 공사관으로 흘러 들어갔다는 것이다.
또한 미국 공사 존 실이 러시아 군사 고문 고빙의 임명을 반대하도록 이완용에게 압력을 행사한 사실 역시 서재필을 통해 일본 측에 전달된 것으로 나타난다. 『주한일본공사관기록』 11권에 수록된 「露國士官聘用ニ關シ當地駐在外交官其他二三著名人士間ノ談話」, 문서번호 機密第三○號, 1897년 5월 25일자 문서에도 서재필이 미국 공사 실과 알렌의 러시아 사관 고빙 관련 발언을 일본 공사관 측에 전한 정황이 나타난다.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수록 본의 해당 문서에 전한다. 물론 이것이 의도적인 친일 행위였는가에 대해서는 논쟁의 여지가 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결과였다. 결과적으로 일본은 대한제국의 외교 전략을 더 빠르게 파악하고 대응할 수 있었고, 이는 대한제국의 자주 외교에 상당한 부담으로 작용하였다.
이쯤 되면 우리는 다시 질문하게 된다. 『독립신문』은 과연 누구의 입장에서 조선을 바라보고 있었는가. 그 신문은 조선 내부의 시선으로 국가 생존을 고민했는가. 아니면 국제질서 속에서 조선을 개혁의 대상으로 바라보았는가. 이 문제는 서재필 개인의 정체성과도 연결된다. 그는 언제나 자신을 미국 시민으로 인식하고 있었다. 그는 조선을 사랑했지만, 동시에 조선을 외부자의 시선으로 바라보는 경향이 강했다. 그의 글 속에는 조선 사회에 대한 강한 비판과 일본에 대한 상대적 우호가 자주 함께 등장한다. 일본을 근대화의 선도 국가로 보고, 조선을 낙후된 사회로 바라보는 시선은 결국 조선을 자주적 개혁의 주체라기보다 외부 개입이 필요한 대상으로 인식하게 만들 위험성을 가지고 있었다.
그렇다고 해서 『독립신문』과 서재필의 역할을 모두 부정할 수는 없다. 『독립신문』은 한글을 활용해 대중적 공론장을 형성하려 했고, 근대적 언론 형식을 조선 사회에 도입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그것은 분명 조선 후기 언론사에서 의미 있는 전환점이었다. 그러나 동시에 그 계몽 담론이 일본 중심 질서와 일정 부분 결합되어 있었다는 사실 역시 외면할 수 없다.
더 흥미로운 부분은 서재필을 둘러싼 ‘추방’의 기억이다. 오늘날 그는 흔히 대한제국 정부에 의해 억울하게 추방된 인물처럼 기억된다. 그러나 실제 기록은 훨씬 복합적이다. 대한제국 정부는 그의 중추원 고문직 해임 이후 계약 잔여 급료와 귀국 여비를 포함한 거액의 보상금을 지급하였다.
당시 경제 수준을 고려하면 그것은 결코 적은 돈이 아니었다. 일반적으로 서재필은 정부의 탄압으로 '추방'된 인물로 알려져 있다. 실제로 오늘날 공훈전자사료관 등에서도 이러한 표현을 사용하고 있다. 그러나 당시 대한제국 정부의 회계기록과 계약 관련 문서를 함께 살펴보면, 이러한 통설만으로는 설명하기 어려운 사실들이 확인된다. 서재필은 대한제국 정부와 계약을 맺고 활동하였으며, 귀국 당시에는 계약 종료에 따른 정산 절차를 거쳐 상당한 금액을 지급받았다. 만약 단순한 강제 추방이었다면 이러한 계약 정산이 이루어진 이유는 무엇이었는지 함께 설명되어야 한다.
따라서 서재필의 귀국은 '정치적 갈등'이라는 측면뿐 아니라 '정부와의 계약 종료 및 정산'이라는 측면에서도 함께 검토할 필요가 있다. 실제로 서재필은 1896년 4월 귀국하여 『독립신문』을 창간하고 독립협회 활동을 이끌었다. 당시 그는 대한제국 정부와 일정 기간 계약을 체결하고 정부의 재정적 지원을 받으며 활동하였다. 계약 기간이 끝나자 정부는 이를 연장하지 않았고, 계약 조건에 따라 정산 절차를 진행하였다.
그 당시 계약상 지급하기로 한 금액은 연봉 28,200원과 여비 600원을 합한 28,800원이었다. 이 가운데 이미 지급된 지방 체재비 4,400원을 공제한 뒤 실제로 지급된 금액은 24,400원이었다. 이는 당시 경제 규모를 고려하면 매우 큰 금액이었다. 1898년 무렵 황소 한 마리의 가격이 20~40원이었다. 이를 평균 30원으로만 계산해도, 24,400원은 황소 약 813마리를 살 수 있는 규모였으며, 현재 소 한 마리 평균 가격 1.000만 원으로 계산하면 약 81억 3.000만 원이 된다. 다시 말해, 근무 기간이 채 2년이 되지 않은 시점에서 오늘날 수십억 원에 해당하는 보상을 받은 셈이다.
이러한 사실은 우리가 익숙하게 기억해 온 '비극적인 추방'이라는 이미지와는 상당한 거리가 있다. 물론 당시 독립협회 활동을 둘러싸고 정부 내부의 정치적 갈등과 보수 세력의 압력이 존재했던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적어도 계약 관계와 금전 정산이라는 측면에서 보면, 서재필은 아무런 보상도 받지 못한 채 일방적으로 쫓겨난 인물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따라서 서재필의 귀국 과정을 단순히 '추방'이라는 한 단어로 규정하기보다는, 정부와의 계약이 종료되었고 그에 따른 정산을 마친 뒤 미국으로 돌아간 과정으로 이해할 필요가 있다. 역사는 어느 한 장면만으로 결론을 내리기보다, 정치적 상황과 계약 관계, 재정 기록을 함께 살펴볼 때 비로소 당시의 실상을 보다 입체적으로 이해할 수 있다.
서재필 출국과 보상에 관한 이해 이미지 그림
미국에서의 삶 역시 마찬가지다. 그는 필라델피아에서 인쇄업과 문방구 사업을 운영하며 상당한 규모의 사업체를 꾸려 나갔다. 물론 이후 독립운동 활동의 의미를 부정할 수는 없지만, 전 재산을 독립운동에 바친 무일푼의 혁명가라는 이미지는 실제 삶의 모습과 다소 차이가 있었다. 또 하나 중요한 문제는 『독립신문』 창간 과정 자체이다. 『주한일본공사관기록』에는 일본 외무대신과 일본 공사 사이에서 한글 신문 창간 지원을 위한 기밀비와 장비, 인력 지원 문제를 논의한 정황이 등장한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독립신문』은 순수한 민간 독립 언론이라기보다 국제정치와 외세 전략 속에서 만들어진 복합적 매체로 보아야 한다.
결국 서재필과 『독립신문』의 문제는 단순히 영웅인가 친일인가의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대한제국기 조선이 어떤 국가를 꿈꾸었는가에 대한 문제이며, 동시에 근대라는 이름 아래 어떤 기억은 강조되고 어떤 기억은 지워졌는가에 대한 문제이다. 독립을 말하면서 강병을 부정하고, 계몽을 외치면서 민중 저항을 폄훼했던 이 역설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불편한 질문을 남긴다. 우리가 기억하는 ‘독립’은 과연 누구의 시선으로 구성된 것인가. 그 기억 속에서 배제된 목소리는 누구의 것이었는가.
대한제국기의 정치사는 바로 이 질문 속에서 다시 읽혀야 한다. 역사는 한 인물이나 한 신문을 찬양하거나 단죄하는 작업이 아니다. 중요한 것은 그 시대 사람들이 무엇을 보았고, 무엇을 보지 못했는지를 함께 바라보는 일이다. 그리고 바로 그 지점에서 『독립신문』은 조선 근대의 가능성과 한계를 동시에 보여주는 가장 복잡한 정치적 텍스트 가운데 하나로 남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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