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경제신문 편집국

지은이: 허 태 근
ㆍ부경대학교 대학원 사학과 졸업(문학박사)
ㆍ전) 부경대 사학과 교수
ㆍ사) 국채보상운동 부울경 학술자문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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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2부 : 이름이 역사를 바꾼다. >
7장. 독립인가, 광복인가
③ 대한제국은 언제 사라졌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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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년 8월, 일본 제국이 패망하던 날 한반도 사람들은 모두 같은 시간을 지나고 있었다. 그러나 그들이 맞이한 현실은 결코 같지 않았다. 어떤 이는 거리로 뛰쳐나가 두 손을 번쩍 들고 만세를 외쳤고, 어떤 이는 집 안에 숨어 문을 걸어 잠근 채 세상이 정말 바뀐 것인지 숨죽여 지켜보았다. 누군가는 오래전 장롱 깊숙이 감추어 두었던 태극기를 꺼내 먼지를 털었고, 또 누군가는 혹시 일본 경찰이 다시 들이닥칠까 두려워 태극기를 품속에 감춘 채 눈물만 흘렸다.
그날 서울과 평양, 부산과 대구, 인천과 광주의 거리에는 전에 없던 낯선 풍경이 펼쳐졌다. 사람들은 서로 모르는 사이였지만 길에서 마주치면 웃으며 손을 맞잡았고, "조선이 살아났다."는 말을 몇 번이고 되풀이했다. 아이들은 어른들이 왜 우는지 알지 못한 채 함께 뛰어다녔고, 노인들은 하늘을 바라보며 "이날을 살아서 보다니."라고 중얼거렸다. 시장에서는 장사를 하던 상인들마저 가게를 비워 둔 채 거리로 나왔고, 곳곳에서 즉흥적인 만세 행렬이 이어졌다. 오랫동안 일본어만 사용해야 했던 사람들은 조심스럽게 우리말을 크게 외쳤고, 이름까지 일본식으로 바꾸어 살아야 했던 이들은 잃어버렸던 자신의 이름을 다시 불러 보며 감격했다.
그러나 그 기쁨은 오래지 않아 불안과 뒤섞이기 시작했다.
일본이 패망했다고 해서 당장 새로운 나라가 세워진 것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총독부는 여전히 건재했고, 행정기관도 그대로 남아 있었다. 일본 관리들은 아직 자리를 지키고 있었고, 경찰 역시 하루아침에 사라지지 않았다. 거리에서는 만세를 외치면서도 사람들은 서로에게 "정말 끝난 것이 맞느냐.", "혹시 일본군이 다시 돌아오는 것은 아니냐."고 묻곤 했다. 해방은 찾아왔지만 앞으로 나라가 어떻게 될 것인지는 아무도 알지 못했다.
그 혼란은 사람들의 표정에도 그대로 드러났다.
누군가는 앞으로 우리 손으로 나라를 세울 수 있다는 희망에 가슴이 벅찼지만, 또 다른 누군가는 생계를 먼저 걱정해야 했다. 공장에서 일하던 노동자는 내일부터 공장이 계속 돌아갈지 알 수 없었고, 농부는 가을 수확을 앞두고 세금은 누구에게 내야 하는지조차 알지 못했다. 일본 회사에서 일하던 사람들은 직장을 잃을지 모른다는 불안에 떨었고, 가족을 일본으로 떠나보낸 사람들은 다시 만날 수 있을지 기약할 수 없었다. 기쁨 속에서도 사람들은 새로운 시대가 가져올 혼란을 예감하고 있었다.
해외에서도 비슷한 모습이 이어졌다.
중국과 만주, 연해주에서 독립운동을 이어 오던 수많은 사람들은 "드디어 조국으로 돌아갈 수 있다."는 소식을 듣고 서로를 끌어안으며 눈물을 흘렸다. 그러나 기쁨은 오래가지 않았다. 귀국할 배도 부족했고, 돌아온 조국에는 이미 새로운 정치 세력이 등장해 있었다. 오랫동안 독립을 위해 싸웠던 사람들조차 앞으로 어떤 나라가 세워질지 알지 못했다. 독립운동가 아니 광복운동가들에게 해방은 끝이 아니라 또 다른 시작이었다.
더구나 해방은 곧 분단의 그림자를 품고 있었다.
북쪽에는 소련군이, 남쪽에는 미군이 들어오기 시작했고, 사람들은 처음에는 그것이 잠시 머무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를수록 한반도는 두 개의 체제로 나뉘기 시작했다. 해방의 기쁨은 채 식기도 전에 새로운 갈등이 싹트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1945년 8월의 환호는 단순한 승리의 함성이 아니었다. 그것은 나라를 되찾았다는 감격과 함께 앞으로 어떤 나라를 만들어야 하는지 알 수 없었던 불안이 함께 섞인 역사적 순간이었다.
생각해 보면 그날 사람들의 눈물은 하나의 감정만으로 설명할 수 없다.
어떤 눈물은 잃어버린 나라를 되찾은 감격이었고, 어떤 눈물은 36년 동안 쌓여 온 설움의 분출이었다. 또 어떤 눈물은 앞으로 닥쳐올 현실을 알 수 없는 두려움에서 흘러나온 것이었다. 같은 날, 같은 하늘 아래 있었지만 사람마다 해방을 받아들이는 방식은 달랐다. 기쁨과 혼란, 희망과 공포가 한순간에 뒤섞여 있었던 것이다.
역사는 흔히 그 순간을 '광복'이라는 한 단어로 정리한다.
그러나 실제로 그 시대를 살아간 인간들의 마음속에는 훨씬 더 복잡한 감정들이 존재하고 있었다. 나라를 잃고 살아간다는 것이 무엇인지 몸으로 견뎌 온 사람들에게 1945년은 단순한 정치적 사건이 아니었다. 그것은 짓눌렸던 이름이 다시 살아나는 순간이었고, 동시에 앞으로 어떤 나라가 세워질 것인가를 둘러싼 새로운 불안의 시작이기도 했다.
그리고 흥미로운 것은 바로 그 이후였다.
같은 식민지 경험을 공유했던 남과 북은 점차 서로 다른 언어로 역사를 설명하기 시작했다. 북한은 일관되게 “해방”이라는 말을 사용했고, 남한은 점차 “독립”이라는 말을 중심에 두게 되었다. 같은 사건을 두고도 서로 다른 개념 체계를 선택한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단순한 어휘의 차이가 아니었다. 그것은 각 체제가 자신들의 정통성을 어떻게 만들고 싶어 했는가를 보여주는 정치적 선택이었다. 다시 말해 해방과 독립이라는 말은 단순한 역사 용어가 아니라, 국가 권력이 스스로를 정당화하기 위해 선택한 기억의 언어였다.
우리는 흔히 역사를 사실의 기록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실제 역사는 언제나 선택된 언어 속에서 구성된다. 어떤 단어를 사용하는가에 따라 사건의 의미는 달라지고, 인간들의 기억 역시 다른 방향으로 배열된다. 그래서 역사는 단순한 도덕 교과서가 아니라 인간과 권력의 기록이다.
먼저 북한의 경우를 보면 이 점은 더욱 분명해진다.
북한은 1945년 이후 항일투쟁의 역사를 일관되게 “조국해방투쟁”으로 설명하였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해방’이라는 말이 단순히 일본 패망의 결과를 의미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북한의 공식 서술 속에서 해방은 김일성을 중심으로 한 항일무장투쟁이 제국주의 지배를 타파한 혁명적 성취로 설명된다. 즉 해방은 우연히 주어진 결과가 아니라, 혁명 세력이 스스로 쟁취한 역사적 승리로 재구성된다.
생각해 보면 이것은 매우 정치적인 언어였다.
왜냐하면 해방의 주체를 누구로 설정하느냐에 따라 이후 국가 권력의 정통성이 결정되기 때문이다. 북한은 해방의 중심에 김일성과 만주 항일 유격대를 배치함으로써, 자신들의 정권이 단순한 국가가 아니라 항일혁명의 계승자라는 이미지를 만들고자 했다.
그러나 역사에세이는 여기서 한 걸음 더 들어가야 한다.
왜 사람들은 그런 서사를 만들었는가.
왜 권력은 특정 기억만 강조하려 했는가.
그리고 그 과정 속에서 어떤 인간들의 기억은 사라졌는가를 보아야 한다.
북한의 해방 서사 속에서는 수많은 항일운동의 흐름이 점차 주변부로 밀려났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계열의 독립운동도, 사회주의 계열 외의 항일 세력도, 이름 없는 민중의 저항 역시 점차 축소되었다. 혁명 권력은 복잡한 역사를 단일한 영웅 서사 속으로 정리하기 시작했다.
왜냐하면 권력은 복잡한 인간의 얼굴보다 단순한 영웅의 얼굴을 더 좋아하기 때문이다.
복잡한 인간의 역사는 질문을 만들지만, 단순한 영웅의 역사는 체제 충성을 만들기 쉽다. 그래서 북한의 ‘해방’은 민족 전체의 다양한 저항을 설명하는 언어라기보다, 혁명 권력의 정통성을 구축하기 위한 정치적 언어로 기능하게 된다.
그러나 동시에 북한의 ‘해방’이라는 개념에는 일정한 논리적 일관성도 존재했다.
왜냐하면 식민지 조선은 이미 국가가 소멸한 상태였기 때문이다. 독립이라는 말이 기본적으로 국가의 존재를 전제로 하는 개념이라면, 해방은 식민지 현실에서 벗어나는 행위를 보다 직접적으로 설명할 수 있었다. 이 점에서 북한은 ‘국가를 되찾는다’기보다 ‘식민 상태에서 벗어난다’는 의미를 강조하고 있었던 셈이다.
반면 남한의 경우는 훨씬 복잡한 길을 걸어갔다.
1945년 직후 남한 사회에서도 사람들은 “해방 조선”이라는 말을 자연스럽게 사용했다. 거리와 신문, 연설 속에서 해방이라는 표현은 매우 흔했다. 실제로 그 시대를 살았던 사람들에게 가장 먼저 와닿았던 감정은 “나라를 되찾았다”는 정치적 인식 이전에 “억압에서 풀려났다”는 감각에 가까웠을 것이다.
그러나 미군정과 대한민국 정부 수립 과정을 거치면서 상황은 달라지기 시작한다.
남한은 점차 “독립”이라는 개념을 중심 언어로 채택하게 된다. 항일투쟁은 ‘독립운동’으로 재정의되었고, 그 주체들은 ‘독립운동가’라는 이름으로 기억되기 시작했다.
이것은 단순한 명칭 변경이 아니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자신들을 일제 강점 상태로부터 벗어나 새롭게 탄생한 독립국가로 설명하고자 했다. 따라서 독립이라는 말은 신생 국가의 정통성을 강화하는 데 매우 효과적인 개념이었다.
그러나 그 과정 속에서 또 다른 문제가 발생하게 된다.
남한의 독립 담론은 항일투쟁을 “이미 존재하던 국가의 회복”이라기보다 “새로운 국가의 탄생”이라는 방향 속에서 재배열하기 시작했다. 그 결과 조선과 대한제국의 역사적 연속성은 상대적으로 약화되었고, 1948년 대한민국 수립이 새로운 국가의 출발점처럼 이해되는 경향이 강해졌다. 다시 말해 북한이 ‘혁명 권력의 정통성’을 위해 해방을 선택했다면, 남한은 ‘신생 국가의 정통성’을 위해 독립을 선택했던 셈이다.
그러나 두 체제 모두 일정한 한계를 가지고 있었다.
북한의 해방 담론은 항일투쟁의 다양성을 지나치게 억압했다. 반대로 남한의 독립 담론은 대한제국과 식민지 시기의 역사적 연속성을 충분히 설명하지 못했다.
흥미로운 것은 바로 이 지점에서 ‘광복’이라는 개념이 다시 떠오른다는 사실이다.
광복은 남북 어느 체제에서도 중심 개념이 되지 못했다. 북한에서는 해방 속에 흡수되었고, 남한에서는 독립 담론 속에 밀려 주변부로 남았다.
그러나 어쩌면 바로 그렇기 때문에 광복은 더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광복은 단순히 외세에서 벗어난다는 뜻이 아니다.
그것은 문자 그대로 “빛을 다시 회복한다”는 의미이다.
여기서 말하는 빛은 단지 정치 권력만이 아니다. 그것은 역사적 정통성이었고, 민족 공동체의 존엄이었으며, 식민지 시대 속에서 짓밟혔던 인간의 자존심이었다.
그래서 광복은 해방과 독립을 모두 넘어서는 개념이 될 수 있다.
해방이 식민 상태에서 벗어나는 행위를 강조한다면, 광복은 잃어버린 역사와 존엄을 다시 회복하는 과정을 강조한다. 독립이 국가 주권의 회복을 중심에 둔다면, 광복은 공동체 전체의 기억과 인간의 존엄까지 함께 복원하려 한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1945년 8월 15일을 사람들은 단순히 “독립” 또는 “광복”이라고 부르지 않았다. 그날은 나라의 이름만 돌아온 날이 아니라, 오랫동안 빼앗겼던 인간의 존엄과 기억이 다시 살아나는 순간이었기 때문이다.
결국 남북한의 역사 인식 차이는 단순한 용어의 차이가 아니다.
그것은 권력이 어떤 기억을 선택했고, 어떤 인간들의 얼굴을 남기려 했는가의 차이였다.
「해방의 언어, 독립의 국가」그림 이미지 역사는 언제나 선택된 기억 속에서 구성된다.
그리고 권력은 늘 자신에게 유리한 언어를 선택한다.
그러나 역사에세이가 해야 할 일은 바로 그 언어 뒤에 가려진 인간들의 복잡한 얼굴을 다시 복원하는 일이다.
누군가는 해방을 말했고, 누군가는 독립을 말했다.
그러나 그 시대를 살아낸 평범한 사람들에게 가장 절실했던 것은 어쩌면 단순한 정치 체제의 이름이 아니었을지도 모른다.
그들은 단지 인간답게 살고 싶었고, 자기 나라의 이름을 잃지 않고 싶었으며, 더 이상 타인의 지배 속에서 침묵하며 살고 싶지 않았을 뿐이다.
그래서 역사는 단순히 국가의 기록이 아니다.
그것은 잃어버린 이름을 되찾으려 했던 인간들의 기억이며, 권력 속에서도 끝까지 존엄을 잃지 않으려 했던 사람들의 이야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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