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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태근의 역사 다시 읽기(18)] 대한제국은 왜 국제법을 믿었는가
  • 기사등록 2026-07-15 06:58:45
  • 기사수정 2026-07-15 07:0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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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사회는 그동안 대한제국의 멸망과 근대사를 ‘피해자와 외세’라는 하나의 익숙한 프레임 안에서만 바라봐 왔는지도 모릅니다. 본지는 역사 교과서의 이면을 들여다보고, 박제된 기억 뒤에 숨겨진 날것의 진실을 추적하고자 합니다. 부경대학교 사학과에서 후학을 양성하고 국채보상운동 학술자문교수로 활동해 온 역사학자 허태근 교수의 날카로운 시선을 통해, 우리가 미처 묻지 못했던 대한제국 망국의 진짜 원인과 ‘기억의 정치학’을 총 4부(13장)에 걸쳐 연재(주 3회)합니다. <편집자 주> 


지은이: 허 태 근 

ㆍ부경대학교 대학원 사학과 졸업(문학박사)

ㆍ전) 부경대 사학과 교수

ㆍ사) 국채보상운동 부울경 학술자문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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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2부 : 이름이 역사를 바꾼다. >

       6장. 을사조약인가, 을사늑약인가

              ③ 대한제국은 왜 국제법을 믿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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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다 보면 힘으로는 이길 수 없는 상대를 만날 때가 있다. 그럴 때 사람들은 마지막으로 법과 약속을 믿는다. 예를 들어 교통사고를 당했을 때 상대가 더 큰 힘과 영향력을 가진 사람이라 해도 대부분은 먼저 경찰과 법원을 찾는다. 계약 분쟁이 생겨도 사람들은 상대보다 힘이 약하다고 해서 곧바로 포기하지 않는다. 계약서와 법률이 자신의 권리를 지켜 줄 것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이러한 모습은 개인의 삶에서만 나타나는 것이 아니다. 힘이 약한 개인일수록 법의 보호를 기대하듯, 규모가 작은 기업은 계약과 제도를 통해 자신의 권리를 지키려 하고, 약소국은 국제사회가 합의한 규범과 국제법에 기대어 생존의 길을 찾으려 한다. 법이 언제나 정의로운 결과를 보장하는 것은 아니며, 현실에서는 힘이 법보다 앞서는 경우도 적지 않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법을 포기하지 않는다. 법이 완벽해서가 아니라, 힘이 부족한 사람에게는 그것이 마지막으로 의지할 수 있는 질서이기 때문이다.


국가도 다르지 않다. 강대국은 군사력과 경제력을 바탕으로 자신의 뜻을 관철할 수 있지만, 약소국은 국제법과 국제사회의 여론, 그리고 조약과 외교 질서에 더 큰 기대를 걸 수밖에 없다. 국제법은 모든 나라를 완벽하게 보호하지는 못하지만, 적어도 힘이 아닌 규범으로 국제관계를 유지하려는 최소한의 약속이기 때문이다. 대한제국 역시 이러한 믿음 속에서 국제법과 국제사회의 정의를 통해 나라의 주권을 지킬 수 있으리라 기대했다.


대한제국 역시 그러한 믿음을 가지고 있었다. 

국력이 약해지고 외교적으로 고립되어 가는 상황에서도 대한제국은 마지막까지 국제법을 포기하지 않았다. 일본의 군사력에 맞설 힘은 없었지만, 국제법과 국제사회의 여론만큼은 자신들의 편이 되어 줄 것이라고 기대했던 것이다. 그래서 고종은 헤이그에 특사를 보내 을사조약의 부당함을 세계에 알리려 했고, 대한제국은 끝까지 자신이 국제법상 독립국임을 주장하였다.


그렇다면 일본은 왜 대한제국을 무력으로 점령하면서도 굳이 조약을 체결하는 형식을 거쳤을까. 이미 군사력을 장악하고 있었는데도 왜 국제사회의 비난을 의식하며 합법이라는 외형을 만들려 했을까. 그리고 대한제국은 왜 승산이 거의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마지막 순간까지 국제법에 호소했을까.


이 장에서는 대한제국이 국제법을 어떻게 이해했고, 일본은 국제법을 어떻게 이용했으며, 당시 국제사회는 이 문제를 어떤 시각으로 바라보았는지를 함께 살펴보고자 한다. 이를 통해 대한제국의 멸망이 단순히 군사력의 패배만이 아니라 국제법과 국제정치가 교차하는 복합적인 과정이었다는 사실을 이해하게 될 것이다.


약자들은 국제법을 정의의 언어라고 생각한다. 

국가 간의 분쟁을 공정하게 해결하고, 강대국의 힘을 제한하며, 약소국의 권리를 보호하기 위해 만들어진 보편적인 규범이라고 믿는다. 실제로 국제법은 국가의 주권과 영토 보전, 조약의 효력, 외교관의 보호 등 국제질서를 유지하는 중요한 원칙들을 담고 있다. 그러나 현실의 국제정치는 언제나 정의만으로 움직이지 않았다. 국제법은 정의를 위한 규범인 동시에, 때로는 강대국이 자신의 행동을 정당화하는 도구로도 활용되었다.


대한제국이 마주한 국제법도 바로 이러한 이중적 성격을 지니고 있었다. 

겉으로는 모든 나라의 주권과 독립을 보장하는 보편적 규범처럼 보였지만, 실제로는 그것을 해석하고 적용하는 힘이 강대국에게 집중되어 있었다. 약소국은 국제법을 통해 자신을 지키고자 했지만, 강대국은 국제법의 형식을 빌려 침략을 합법처럼 포장하려 했다.


19세기 말 조선은 바로 그 거대한 전환기 속에 놓여 있었다. 전통적인 중화 질서는 무너지고, 서구 열강과 일본이 앞세운 근대 국제질서가 동아시아로 밀려오고 있었다. 조선은 오랫동안 중국 중심의 조공 질서 속에서 존재해 왔지만, 이제 더 이상 그 질서만으로 나라의 안위를 보장받을 수 없었다. 서구 열강과 일본은 근대 국제법 체계를 앞세워 동아시아 질서를 새롭게 재편하려 했고, 조선은 그 변화의 한가운데로 끌려 들어갔다. 문제는 조선이 이러한 변화 속에서 국제법 질서를 충분히 이해하고 능동적으로 대응할 준비가 되어 있지 못했다는 점이었다.


대한제국은 왜 국제법을 믿었는가. 그림 이미지

1876년 강화도조약은 바로 그 충돌의 시작이었다.

일본은 운요호 사건 이후 군사 압박을 통해 조선과 조약 체결을 강요하였다. 그리고 조약 제1관에서 “조선은 자주국이며 일본과 평등한 권리를 가진다”라고 규정하였다. 표면적으로만 보면 조선의 독립을 인정한 것처럼 보인다. 실제로 조선 내부에서도 일부 개화파 인사들은 이를 통해 청나라의 간섭에서 벗어나 보다 독자적인 외교 질서를 구축할 가능성을 기대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고종의 시선은 조금 더 복합적이었다.

고종은 기본적으로 조선의 독립성과 왕권 강화를 원하고 있었다.


당시 조선은 청나라의 전통적 종주 질서 속에 있었지만, 동시에 일본과 서구 열강의 압박도 강해지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고종은 한편으로는 청의 간섭을 줄이고 싶어 했고, 다른 한편으로는 일본이 조선을 완전히 장악하는 것도 경계하고 있었다. 즉 고종에게 ‘자주국’이라는 표현은 분명 매력적인 언어였지만, 그것이 일본의 전략 속에서 사용되고 있다는 사실 역시 점차 인식하게 되었던 것이다.


흥미로운 것은 바로 이 지점에서 국제법의 언어가 본격적으로 등장하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일본은 조선을 단순한 속국이 아니라 국제법상 독립국으로 규정함으로써 이후 청나라의 개입 명분을 약화시키려 했다. 즉 국제법은 약소국 보호의 언어인 동시에, 강대국 전략의 도구이기도 했던 것이다.

실제 『고종실록』과 『승정원일기』를 보면 고종은 국제질서 변화 속에서 조선의 독립국 지위를 매우 중요하게 생각하고 있었다. 특히 임오군란 이후 청나라의 내정 간섭이 강화되자, 고종은 조선이 독립된 국가라는 점을 반복적으로 강조하려 하였다. 그러나 동시에 그는 일본의 급속한 영향력 확대 역시 경계하였다. 다시 말해 고종이 바랐던 것은 ‘청으로부터의 독립’이 곧 ‘일본 의존’으로 바뀌는 것이 아니었다.


고종은 국제법 질서 속에서 대한제국이 독립국으로 인정받기를 강하게 희망하였다.

1897년 대한제국 선포 역시 단순히 황제 칭호를 사용하기 위한 문제가 아니었다. 그것은 국제사회 속에서 대한제국이 청과 대등한 자주국임을 선언하려는 의미가 강했다. 황제 칭호 사용은 중국 황제 중심 질서에서 벗어나겠다는 상징적 선언이기도 했다. 즉 강화도조약의 “조선 자주국” 조항은 이후 고종이 국제법 질서 속 독립국 지위를 추구하는 데 일정한 외교적 명분으로 작용하게 된다. 그러나 시간이 흐를수록 고종은 일본이 말하는 ‘자주국’의 의미가 조선을 위한 것이 아니라 일본의 대륙 전략 속에서 사용되고 있음을 깨닫게 되었다.


일본은 조선을 독립국이라고 규정했지만, 실제 목적은 청나라의 간섭을 배제하고 자신들이 조선 문제에 직접 개입할 수 있는 구조를 만드는 데 있었다. 다시 말해 일본이 말한 ‘자주’는 조선의 완전한 자율성을 보장하려는 개념이 아니라, 청의 영향력을 제거한 뒤 일본 영향권 안으로 편입시키기 위한 국제법적 논리였던 셈이다.


이 점은 청일전쟁 이후 더욱 분명해졌다.

1895년 시모노세키조약에서 청나라는 “조선의 완전무결한 자주독립국” 지위를 인정하였다. 그러나 현실에서 조선은 진정한 독립을 얻은 것이 아니라 일본의 영향력 아래 더욱 깊이 들어가게 되었다. 고종은 바로 이 지점에서 큰 위기의식을 느끼게 된다. 그래서 러시아를 비롯한 열강 외교를 활용해 일본을 견제하려 했고, 아관파천 이후에는 국제 균형 외교를 통해 대한제국의 생존을 모색하려 하였다.


결국 고종에게 “조선은 자주국이다”라는 국제법 언어는 두 가지 의미를 동시에 가졌다.

하나는 청 중심 질서에서 벗어나 독립국가로 살아남고자 하는 희망이었다. 다른 하나는 일본이 그 언어를 이용해 조선을 새로운 국제질서 속 영향권으로 편입시키려 한다는 두려움이었다.


청일전쟁 이후 대한제국은 더욱 국제법에 의존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현실은 냉혹했다. 국제법은 문서 위에서는 국가의 평등을 말했지만, 실제 국제정치는 힘의 균형에 의해 움직였다.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미국과 영국의 지지를 바탕으로 조선 지배권을 사실상 국제적으로 인정받고 있었다. 1905년 미국과 일본 사이의 가쓰라-태프트 밀약, 영국과 일본의 제2차 영일동맹은 대한제국의 운명이 이미 열강 외교 속에서 거래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그래서 고종은 국제법을 끝까지 붙잡으려 했다.

대표적인 사건이 바로 헤이그 특사 파견이었다. 1907년 고종은 이상설·이준·이위종 등을 네덜란드 헤이그 만국평화회의에 파견하였다. 목적은 단순했다. 을사조약이 강압적으로 체결되었으며, 대한제국의 외교권 박탈은 국제법적으로 부당하다는 사실을 국제사회에 호소하려 했던 것이다. 그는 국제사회가 최소한 법과 조약의 원칙만큼은 지켜 줄 것이라 기대했다. 그러나 현실의 국제정치는 법보다 힘에 가까웠다. 일본은 국제법의 언어를 사용하면서도 실제로는 군사력과 외교 압박을 통해 대한제국의 주권을 잠식해 갔다.


그러나 결과는 참담했다.

열강은 대한제국 특사의 참석 자체를 거부하였다. 일본은 이미 대한제국 외교권을 장악했다고 주장하였고, 열강 역시 일본과의 관계를 고려해 이를 사실상 묵인하였다. 국제법은 약소국의 권리를 말했지만, 현실의 국제정치는 강대국의 이해관계를 중심으로 움직이고 있었던 것이다.


일본 역시 국제법의 중요성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일본은 대한제국 병합 과정에서 끊임없이 ‘합법성’을 강조했다. 을사조약, 정미7조약, 한일병합조약 등 모든 과정에서 일본은 외교문서 형식을 유지하려 했다. 총칼로만 지배하는 것이 아니라, 국제사회가 인정할 수 있는 법적 외형을 만들려 했던 것이다. 다시 말해 일본은 무력뿐 아니라 국제법의 형식까지 이용해 식민지 지배의 정당성을 구축하려 했던 셈이다.


이에 따라 강화도조약의 “조선 자주국” 조항은 아이러니한 장면을 남긴다.

겉으로는 조선 독립을 인정하는 선언처럼 보였지만, 실제로는 청나라 영향력을 제거하고 일본이 조선 문제에 직접 개입하기 위한 국제법적 출발점이 되었기 때문이다. 고종은 그 속에서 독립국의 꿈을 보았지만, 일본은 그 속에서 새로운 지배 전략을 보고 있었던 셈이다.


결과적으로 대한제국의 비극은 단지 군사력 부족만이 아니었다.

그것은 국제법의 이상과 국제정치의 현실 사이에서 벌어진 충돌이었다. 대한제국은 법과 외교를 통해 살아남으려 했지만, 세계는 이미 제국주의 경쟁의 논리로 움직이고 있었다. 국제법은 존재했지만, 정의는 힘과 분리되어 존재하지 못했다.


우리는 흔히 국제법을 문명의 규범처럼 생각한다.

그러나 대한제국의 역사는 우리에게 더 복잡한 질문을 던진다. 법은 누구를 위해 존재하는가. 국제사회는 정말 약소국을 보호하는가. 그리고 정의는 힘 없이 유지될 수 있는가. 대한제국은 끝까지 국제법을 붙잡았지만, 결국 세계는 대한제국보다 일본의 힘을 선택하였다. 어쩌면 대한제국의 마지막 외교는 단순한 실패가 아니라, 국제질서의 냉혹한 본질을 보여주는 역사적 장면이었는지도 모른다.


"본 연재물의 저작권은 저자에게 있으며 향후 단행본 출간을 전제로 일부를 선공개하는 형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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