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경제신문 편집국
박성범 / 유엔후손지원재단 서울센터장(케이피네트웍스 전략본부장)가을빛이 아늑하게 물들던 지난 10월 21일부터 30일까지 십일간, 큰애 부부 초청으로 가족과 함께 미국 워싱턴 D.C.를 방문했다. 백악관을 기점으로 내셔널몰(National Mall) 일대를 차분히 걸으며, 미국이라는 국가가 지나온 역사의 궤적과 그들이 가슴 깊이 간직해 온 숭고한 이념을 돌아보는 뜻깊은 시간이었다.
워싱턴 D.C.의 중심축을 이루는 내셔널몰은 단순한 도시의 상징 공간이나 공원이 아니다. 이곳은 미국 건국의 역사와 인류 보편의 가치가 정교하게 배치된 거대한 ‘자유의 성전’이자 산 역사관이다. 도시를 구상하던 초기 단계부터 기독교적 정신과 신앙적 가치에 기초를 두고 주요 건축물의 동선과 배치를 설계했다는 점은 실로 깊은 인상을 남긴다.
1620년 청교도들이 신앙의 자유를 열망하며 플리머스 신대륙에 첫발을 내디딘 순간부터,영국 왕실의 통제에 맞서 피 흘린 독립전쟁, 국가의 분열을 막고 인간 존엄을 세운 남북전쟁, 그리고 불굴의 의지로 미지의 영역을 일궈낸 서부개척시대에 이르기까지—내셔널몰 곳곳에 서 있는 유서 깊은 건축물과 박물관들은 그 거대한 서사를 묵묵히 웅변하고 있었다.
스미소니언 자연사박물관과 미국역사박물관, 인디언박물관을 지나 링컨기념관, 제퍼슨기념관, 국회의사당, 워싱턴기념탑으로 이어지는 웅장한 축선을 둘러보며 더욱 깊은 감명을 받은 것은 그들의 철저한 역사의식이었다. 미국인들은 자신들의 유산을 일시적인 땜질 방식으로 보수하는 것이 아니라, 건립 당시의 원형에 가장 가깝게 고치고 정성을 다해 관리하며 보존해 오고 있다. 과거의 기억을 온전히 보존하여 후대에 계승하려는 그들의 고집스러운 진정성은, 한 국가의 자부심이 어디서 비롯되는지를 대변해 준다.
그러나 이번 여정 중 필자의 가슴을 가장 격정적으로 흔들고 신선한 충격을 안겨준 공간은 단연 ‘6.25전쟁 참전용사 기념공원(Korean War Veterans Memorial)’이었다.
유엔후손지원재단 서울센터장으로서 그동안 세계 각국의 참전 유산과 기록을 수없이 접해왔지만,이곳에 조성된 공간 미학과 상징적 깊이는 사뭇 다르게 다가왔다.
'워싱턴 D.C. 내셔널몰에서 읽은 자유의 유산과 숭고한 경의' 인포그래픽 기념공원 중심부에는 판초 우의를 입고 긴장감 속에 행군하는 19명의 참전용사 청동상이 자리하고 있다.정교하게 계산된 삼각형 구도 안에 배치된 19인의 동상은,조국과 자유,그리고 일면식도 없던 타국의 인류애를 위해 생명을 바친 무명 용사들의 숭고한 헌신을 투영한다.
무엇보다 필자를 깊은 감동으로 이끈 것은 19라는 숫자가 지닌 미학적이며 역사적인 반사 효과였다. 19인의 동상은 바로 옆을 감싸고 있는 검은 화강암 벽면에 그대로 투영된다. 실물 청동상 19인과 화강암에 반사된 19인의 형상이 하나로 합쳐지는 순간, 정확히 '38'이라는 숫자가 완성된다. 이는 한반도의 아픈 상처이자 비극인 ‘38선’을 의미함과 동시에, 6.25전쟁 당시 38개월간 이어진 치열했던 치전(熾戰)의 기간을 형상화한 정밀한 건축적 오마주다.
화강암 벽면에 비친 19인의 그림자를 아우르며 숫자 38의 의미를 체감한 순간, 정수리를 때리는 듯한 전율과 함께 깊은 충격이 밀려왔다. 전쟁의 비극과 한반도의 분단 현실, 그리고 이 땅을 지켜낸 이들의 희생을 이토록 정교하고 서정적인 건축 철학으로 녹여냈다는 사실에 절로 숙연해졌다. 벽면에 굵게 새겨진 *"Freedom is not free(자유는 공짜로 주어지지 않는다)"*라는 명문은 그 어떤 웅변보다 강력한 울림으로 가슴을 파고들었다.
십일간의 워싱턴 D.C.여정을 마감하며 내린 결론은 명확하다. 한 국가의 품격과 미래는 '누구를 기억하고,그 기억을 어떻게 보존하는가'에 달려 있다. 자유와 조국, 인류애를 위해 생명을 바친 무명용사들과 영웅들을 끝까지 기억하고 숭고한 가치로 승화시키는 미국의 역사의식은, 오늘날 우리가 역사와 참전용사들을 어떠한 태도로 대해야 하는지 명징하게 보여준다.
한반도의 평화와 유엔 참전국 후손들의 미래를 고민하는 이로서, 이번 워싱턴 방문에서 얻은 깨달음과 성찰을 가슴 깊이 새기고 나아가고자 한다. 내셔널몰의 검은 화강암 벽에 비쳤던 38의 상징과 19인 용사들의 묵묵한 행군은, 향후 우리가 걸어가야 할 기억과 보훈의 길을 밝혀주는 영원한 이정표가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