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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문가 기고] 바다의 타임라인_F. Drake, ‘해지지 않는 나라’로 이끈 영웅(1)
  • 기사등록 2026-07-07 13:01:56
  • 기사수정 2026-07-07 13:04: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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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철훈 칼럼니스트필자의 ‘바다의 타임라인(time line)’ 세 번째로, 이번엔 ‘영국의 국민적 영웅’으로 일컫는 ‘프랜시스 드레이크’(Francis Drake, 1540~1596)를 올린다. 그는 16세기 세계 해양 최강국이었던 스페인을 누르고 바다의 패권을 영국으로 가져와 ‘해지지 않는 나라’로 이끄는 데 결정적 역할을 한 인물이었다. 흥미로운 건, 그가 천출인 ‘해적’이었는데 어떻게 영국 여왕으로부터 기사 작위까지 받고 오늘날까지 ‘대영제국의 해양 개척 시대를 연 국가적 영웅’으로 칭송받을까 하는 점이다. 


여기선 그의 성장 과정과 인물됨, 시대적 배경, 또 업적 등을 살펴보면서 ‘인물’을 보는 동서양의 시각을 검토해 볼 것이다. 

그가 태어난 16세기 중반의 영국은 유럽 종교개혁의 여파로 가톨릭과 개신교의 대립 시기였다. 그의 고향인 데번(Devon)주도 종교폭동(Prayer Book Rebellion)으로 이 소용돌이에서 못 벗어났다. 특히 기층민 개신교 농부였던 부친은 이 통에 데번에서 쫓겨나 폐선(廢船)을 개조해 해안가에서 난민처럼 살았다. 그러니까 드레이크는 소년 시절을 ‘선상의 부랑민 집’에서 보내 이 결핍된 생활로 일찍부터 바다에 길든 셈이다. 


10대 초반에 템스강과 프랑스를 오가는 ‘소형연안 무역선’의 도제(연습생)로 들어갔고, 얕고 험한 템스강 하구와 북해의 거친 파도 속에서 항해술을 배워 장차 스페인의 거대한 대형 범선(갤리온, Galleon)들이 흉내 낼 수 없는 드레이크만의 ‘민첩하고 대담한 조선술’의 밑바탕이 된다. 훗날 선주로부터 배를 물려받음으로써 비로소 그의 진짜 바다가 시작된다. 1568년, 친척 가문의 노예무역 선단에 선장으로 참여해 대서양에 나갔다가 멕시코 동쪽 베라크루스 부근에서, 휴전 약속을 어긴 스페인 총독이 지휘하는 해군의 기습을 받고 궤멸 상태에서 목숨만 간신히 건져 귀국했다. 이 일로 전 생애에 걸쳐 스페인에 대한 복수심을 갖게 되었다. 


드레이크가 적극적인 해적활동을 시작한 건 1570년 이후부터이고 그 대상은 주로 스페인 상선이었다. 그 노략질이 얼마나 심했던지 스페인엔 공포의 대상이 되어 그를 “El Draque (용, 龍)”라 불렀다. 그러나 영국엔 “바다의 영웅”이었다. 개인의 복수심으로 시작된 그의 해적 행위는 장차 영국왕실이 스페인의 해양독점에 균열을 내기 위해 드레이크를 적극적으로 기용하게 되는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F. Drake, ‘해지지 않는 나라’로 이끈 영웅(1) 인포그래픽.당시 영국은 대륙의 강대국(스페인, 프랑스) 눈치나 보던 변방의 가난한 섬나라였다. 신대륙의 금과 은은 스페인이 싹쓸이했고, 영국은 양모(wool) 수출 외에는 먹고 살길이 없었다. 1492년 콜럼버스가 미대륙을 발견한 이후, 스페인과 포르투갈은 다른 유럽국가 모르게 교황을 은밀히 내세워 토르데시야스 조약(1494)*1을 체결해 세계 바다를 양분하고는 온갖 이권을 독차지했다. 후발 주자인 영국은 합법적으로 끼어들 틈이 없었다. 게다가 엘리자베스 1세 여왕이 즉위(1558)하면서 가톨릭 국가인 스페인과는 정치ㆍ종교적 이유로 철천지원수가 돼 영국이 봉쇄될 위기에 몰렸다. 영국으로선, 바다로 나가 스페인을 털거나 굶어 죽거나 침략당할 절박한 외통수에 걸린 셈이었다. 그 때문에, 드레이크를 비롯한 여러 해적 선단은 암묵적(暗黙的)으로 영국 여왕의 비호 아래 해적활동이 용인된 선박, 즉 ‘사략선(私掠船, Privateer)’*2 해적으로 활동할 수 있었다. 실로 해적을 등에 업고 스페인과 대적한 셈이다.


드레이크가 국가적으로 주목받는 결정적 계기는 ‘세계 일주(1577.11~1580.9)’였다. 엘리자베스 1세 여왕의 은밀한 지시로 진행된 이 대항해는 스페인의 철저한 감시와 해상봉쇄 속에 ‘이집트 무역’으로 위장해 수행되었다. 흥미로운 건, 이 항해에 영국 여왕(1,000크라운)*3은 물론, 백작, 대법관 등이 거금을 투자해, 실로 ‘사략선 해적 대항해’임에도 국가가 참여했다는 점이다. 천출인 해적 드레이크는 ‘국가’가 후원하는 대항해의 선장으로서 가슴 벅찬 자긍심에 출범했을 것이다. 그러나 실상은 바다 곳곳에 있는 적함(스페인)을 피해 미지의 거친 바다와 싸우는 처절한 모험의 항해였다. 


그의 기함 ‘골든 하인드(Golden Hind)호’(외 4척)는 1577년 가을, 영국 프리머스를 출발했다. 고작 길이 약 30m, 선속 8노트, 100여 톤 선박으로 세계 바다를 일주하겠다고 나선 야심 찬 항진이었다. 남미 동해안을 따라 남하해, 최남단 케이프 혼→마젤란 해협 돌파(기함 ‘골든 하인드호’만 남음)→드레이크 해협(거대 바다) 발견→ 칠레ㆍ페루 해안 북상→ 북미 서안 북상→ 태평양 횡단(68일간)→ 필리핀→ 인도네시아→ 말루쿠 제도(향료 군도)→ 인도양 횡단→ 희망봉을 돌아 출항한 지 2년 10개월 만인 1580년 9월, 만신창이가 된 ‘골든 하읻드호’를 이끌고 플리머스 항구로 귀환했다(그림). 생존 선원은 겨우 50여 명이었다. 이는 마젤란 세계 일주(1522) 이후 2번째로 이룬 역사적 쾌거였다. 선장이 살아서 일주한 것으론 최초였다.


놀라운 건, 항해 도중에, 스페인이 안전해역이라 여겨 방심했던 페루 앞바다에서 ‘카카푸에고호’를 기습 나포해 은괴 26톤, 금 80파운드, 보석 등을 약탈해 영국왕실을 파산에서 구했고, 여왕을 포함해 모든 투자자에게 5,000%에 달하는 경이로운 수익을 안겨준 것이었다. 특히 도중 캘리포니아(샌프란시스코 부근)에 도착해서는 “뉴 알비온(New Albion)”(새로운 영국)을 선포해, 훗날 영국이 북미 대륙 영유권을 주장하는 근거가 되었다. 한편, 항해학적으로는, 북미 서안에서 과감하게 서쪽으로 항진해, 북미와 필리핀을 잇는 새 태평양 항로를 최초로 개척하였다. 더구나 남미와 남극 대륙 사이를 통과하면서 그가 발견한 세계에서 가장 큰 해협(폭이 약 650km), 소위 ‘드레이크 해협(Drake Passage)’은 오늘날까지 그의 이름으로 기억되고 해양학적으로도 큰 의미를 부여했다. 


Drake의 세계일주도(1577.11~1580.9) 드레이크의 이 ‘세계 일주’는 단순한 ‘지리적 이동’이 아니었다. 사방에 스페인 해군으로 바글대던 바다에서 오직 단 1척만으로 마지막까지 생존해 지구를 일주한 ‘기적의 레이스’였다. 실로 인간 정신의 승리였다! 이를 기려 여왕은 이듬해 1581년 4월, 골든 하인드호에 승선해 드레이크에게 기사 작위를 수여했다. ‘천출’의 드레이크가 마침내 영국의 귀족 반열에 오른 순간이었다! ‘기사 작위 수여’는, 그에게 있어 더는 ‘해적’이 아닌 ‘국가 영웅’의 다른 이름이었다. 그의 심정이 어떠했을까? 만경창파 속, 생사를 넘나든 온갖 고초를 극복한 보람과 자긍심, 그리고 자신을 영웅으로 품어준 ‘국가의 파격적인 예우’에 끝내 눈시울을 붉혔을 것이다.


그의 ‘세계 일주’가 더욱 중요했던 것은, ‘한 개인의 성취’를 넘어 향후 세계 해양 패권을 둘러싼 정치적 프로젝트의 첫 일보였단 점에서다. 더욱 주목할 건, 이 ‘항해’에 여왕이 모험을 실었고, 영국 조정이 합세했다는 점이다. 실로 한나라의 융성은 ‘단합된 정치적 권력(국가와 인재의 공조)’에서 비롯됨을 보여주는 대목이 아니겠는가! 이제 바야흐로 스페인을 누르고 영국이 바다의 왕자로 등극하는 과정에서 드레이크가 영국의 ‘역사적 영웅’으로 우뚝 솟는 과정을 살펴보자(2편에 계속). 


*1토르데시야스 조약(Treaty of Tordesillas, 1494): 콜럼버스의 미대륙발견(1492) 이후, 스페인과 포르투갈이 새로 발견될 ‘새 땅 나눠 먹기’를 위해 은밀히 교황을 내세워 세계 바다를 양분(兩分)한 조약. 아프리카 서쪽 카보베르데(Cabo Verde)에서 약 2,000km 더 서쪽으로 떨어진 지점의 경도선을 기점으로 동쪽은 포르투갈, 서쪽은 스페인이 차지하는 것으로 합의했다. 그 결과, 초기 아메리카대륙은 모두 스페인이 가져갔고, 1500년에 발견된 브라질만 이 경계선에 걸려 포르투갈 식민지가 되어 오늘날까지 유일하게 아메리카대륙에서 포르투갈어를 쓰게 되었다. 

*2사략선(私掠船, Privateer): 국가의 허가를 받아 타국(주로 적국) 선박을 나포해도 처벌받지 않는 대신, 그 노획물을 국가와 배분하는 선박. 13세기부터 시작되었으나, 17~18세기 대항해시대 때 가장 유행하였다. 

*3크라운(Crown): 16세기 말 엘리자베스 1세 여왕 당시 영국의 화폐단위. 여왕이 투자한 ‘1,000크라운’은 현재 약 12만~15만 파운드(한화 약 2억~2억5천만 원)지만, 당시 파산 직전의 여왕 비자금에서 ‘하이 리스크’, ‘하이 리턴’의 해적질에 투자하기론 거금이었고, 결국 그녀는 이 모험으로 국가의 운명을 바꾼 셈이 되었다. 


부경대학교 해양생산시스템관리학부 명예교수 

홍철훈(해양물리학 전공)

hongch0692@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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