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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사회는 그동안 대한제국의 멸망과 근대사를 ‘피해자와 외세’라는 하나의 익숙한 프레임 안에서만 바라봐 왔는지도 모릅니다. 본지는 역사 교과서의 이면을 들여다보고, 박제된 기억 뒤에 숨겨진 날것의 진실을 추적하고자 합니다. 부경대학교 사학과에서 후학을 양성하고 국채보상운동 학술자문교수로 활동해 온 역사학자 허태근 교수의 날카로운 시선을 통해, 우리가 미처 묻지 못했던 대한제국 망국의 진짜 원인과 ‘기억의 정치학’을 총 4부(13장)에 걸쳐 연재(주 3회)합니다. <편집자 주> 


지은이: 허 태 근 

ㆍ부경대학교 대학원 사학과 졸업(문학박사)

ㆍ전) 부경대 사학과 교수

ㆍ사) 국채보상운동 부울경 학술자문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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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2부 : 이름이 역사를 바꾼다. >

       2장. 임오군란은 정말 '군란'이었는가.

          ② 명칭속의 권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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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는 단지 사건을 기록하는 작업이 아니다. 

역사는 사건에 이름을 붙이는 작업이기도 하다. 그리고 바로 그 이름 속에는 언제나 권력이 개입한다. 사람들은 흔히 역사 속 명칭을 객관적인 표현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실제로는 어떤 이름이 선택되느냐에 따라 사건의 의미와 기억의 방향은 완전히 달라진다. 같은 사건이라도 누구는 ‘혁명’이라 부르고, 누구는 ‘폭동’이라 부른다. 어떤 인물은 ‘영웅’이 되고, 어떤 인물은 ‘역적’이 된다. 결국 명칭은 단순한 언어가 아니라, 권력이 사건을 해석하는 방식이며 기억을 통제하는 수단이다. 

 

우리는 이미 수많은 역사 속에서 이 장면을 반복적으로 목격해 왔다. 

대표적인 사례는 조선 후기 동학농민운동이다. 한때 이 사건은 ‘동학난(東學亂)’ 혹은 ‘동비(東匪)의 난’으로 불렸다. 여기서 ‘난’과 ‘비(匪)’라는 표현은 이미 동학군을 국가 질서를 어지럽히는 폭도로 규정하고 있다. 실제로 조선 정부와 지배층은 동학군을 반란 세력으로 인식하였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사건에 대한 재평가가 이루어졌고, 오늘날 공식 명칭은 ‘동학농민혁명’으로 바뀌었다. 

 

이처럼 명칭 하나가 바뀌었을 뿐인데 사건을 바라보는 사회적 시선은 완전히 달라졌다.  

과거에는 진압 대상이었던 집단이 이제는 민중의 저항과 근대 변혁 운동의 주체로 기억되기 시작한 것이다. 결국 이름의 변화는 단순한 단어 교체가 아니라 역사 인식의 변화였다. 

 

1980년 광주민주화운동 역시 마찬가지다.  

군사정권 시절 이 사건은 오랫동안 ‘광주사태’라고 불렸다. ‘사태’라는 표현은 국가 폭력과 시민 저항의 본질을 흐리는 효과를 가졌다. 그것은 민주주의를 요구한 시민들의 저항을 단순한 혼란 상황 정도로 축소시키는 정치적 언어였다. 그러나 민주화 이후 공식 명칭은 ‘5·18 민주화운동’으로 바뀌었다. 이후 광주는 더 이상 단순한 지역 소요가 아니라 민주주의를 위한 시민 저항의 상징으로 기억되기 시작했다. 이처럼 역사는 단순히 사실을 기록하지 않는다. 역사는 사건을 어떻게 부를 것인가를 선택한다. 그리고 그 선택 과정에는 언제나 권력이 존재한다. 

 

실제로 근대 이후 제국주의 국가들은 식민지 지배를 정당화하기 위해 명칭을 적극적으로 활용하였다. 일본은 대한제국 침탈 과정에서 자신들의 행동을 ‘보호’와 ‘개혁’이라는 이름으로 포장하였다. 1905년 체결된 을사조약 역시 일본은 ‘한국보호조약’이라는 표현을 사용하였다. 그러나 ‘보호’라는 단어 속에는 지배와 강압이라는 본질이 숨겨져 있었다. 식민지 지배를 침략이 아니라 보호와 안정의 문제로 포장한 것이다. 

 

일본 제국주의는 조선 지배 과정에서도 언어를 정치적으로 활용하였다.  

조선 침략은 ‘합방’이라는 표현으로 불렸다. 그러나 ‘합방(合邦)’이라는 단어는 마치 두 국가가 대등한 위치에서 결합한 것 같은 인상을 준다. 실제 현실은 군사력과 외교 압박 속에서 이루어진 강제 병합이었다. 그래서 오늘날 많은 연구자들은 ‘한일병합’ 혹은 ‘강제병합’이라는 표현을 사용한다. 이름 하나가 사건의 성격을 완전히 다르게 보이게 만드는 것이다. 

 

권력은 왜 이렇게 명칭에 집착할까.  

이유는 단순하다. 사람들은 사건의 복잡한 구조보다 먼저 그 사건에 붙여진 이름을 기억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권력은 언제나 사건을 자신들에게 유리한 언어로 규정하려 하였고, 바로 그 과정 속에서 명칭은 단순한 표현이 아니라 기억과 인식을 통제하는 정치적 도구가 되었다. ‘병합’과 ‘합방’의 차이 역시 이러한 명칭의 정치성을 잘 보여주는 대표적 사례다. 두 단어는 모두 국가가 하나의 체제로 결합되는 상황을 의미하지만, 그 안에 담긴 역사적 뉘앙스와 권력의 시선은 전혀 다르다. 병합(倂合)의 ‘병(倂)’은 “합쳐 넣다”, “편입하다”는 의미가 강해 한 국가가 다른 국가를 흡수하는 성격을 담고 있는 반면, 합방(合邦)은 “함께 나라를 이룬다”는 뜻을 가지고 있어 마치 대등한 국가 간 자발적 결합처럼 들리게 만든다.  

 

문제는 실제 역사 속 1910년 한일 관계가 결코 그러한 대등한 통합이 아니었다는 점이다.  

당시 대한제국은 이미 외교권을 박탈당한 상태였고, 일본군과 통감부의 압박 아래 주권이 심각하게 제한되어 있었다. 즉 현실은 일본 제국이 대한제국을 강제로 흡수한 구조에 가까웠다. 그러나 일본은 이를 침략이나 강제 병탄으로 표현하지 않고 ‘한일합방(日韓合邦)’이라는 용어를 적극 사용하였다. 왜냐하면 ‘합방’이라는 단어는 식민지 지배의 폭력성과 강압성을 흐리고, 마치 두 나라가 자발적이고 평등한 위치에서 하나가 된 것처럼 보이게 만드는 정치적 효과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실제로 일본 제국주의는 침략을 ‘보호’로, 지배를 ‘개혁’으로, 강제 편입을 ‘합방’으로 포장하며 언어를 전략적으로 활용하였다. 결국 명칭은 현실을 설명하는 수단이 아니라 현실을 재해석하고 기억을 통제하는 장치였던 셈이다. 그래서 오늘날 한국 역사학계에서는 ‘한일합방’보다 ‘한일병합’, 혹은 ‘강제병합’이라는 표현을 더 많이 사용한다.  

 

이는 당시 상황이 결코 대등한 국가 통합이 아니었다는 역사 인식을 반영하는 동시에, 식민지 지배의 본질을 보다 분명하게 드러내려는 시도이기도 하다. 결국 ‘병합’과 ‘합방’의 차이는 단순한 어휘의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사건을 어떻게 이해하고 기억할 것인가를 둘러싼 해석의 문제이며, 동시에 명칭 속에 숨어 있는 권력과 기억의 정치학을 보여주는 대표적 사례라고 할 수 있다. 

 

이런 사례의 역사도 또 있다.  

고대 로마의 ‘담나티오 메모리아(Damnatio Memoriae)’처럼 권력이 기억 자체를 통제하려 했던 사례 말고도 대표적인 사례 가운데 하나가 바로 중국 명나라의 『영락대전(永樂大典)』 편찬 이후 벌어진 정치적 기록 통제 문제다. 

 

명나라 영락제(永樂帝)는 대규모 역사 편찬 사업을 통해 자신의 정통성을 강화하려 하였다. 문제는 그가 본래 정식 황위 계승자가 아니었다는 점이다. 영락제는 조카인 건문제(建文帝)를 무력으로 몰아내고 황위에 올랐다. 즉 권력 장악 과정 자체가 쿠데타에 가까웠다. 그런데 영락제가 즉위한 이후 가장 먼저 시도한 일 가운데 하나가 바로 건문제 시기의 기록을 축소·삭제하는 작업이었다. 

 

실제로 건문제 관련 기록 상당수는 의도적으로 수정되거나 누락되었고, 건문제를 따르던 신하들의 이름 역시 역사에서 지워지거나 반역 세력으로 재규정되었다. 심지어 건문제의 최후에 대해서도 공식 기록은 매우 모호하게 처리되었다. 궁궐 화재 속에서 죽었다는 기록이 남았지만, 민간에서는 탈출설이 오랫동안 떠돌았다. 중요한 것은 사실 여부가 아니라, 권력이 공식 기억을 독점하려 했다는 점이다. 영락제는 단순히 황제가 되려 했던 것이 아니라, 자신이 “처음부터 정당한 황제였던 것처럼” 기억되기를 원했다. 

 

조선에서도 비슷한 사례를 찾을 수 있다.  

연산군이 대표적이다. 조선왕조실록에서 연산군은 폐위 이후 ‘종(宗)’이나 ‘조(祖)’라는 왕호를 사용하지 못하고 단지 ‘군(君)’으로 격하되었다. 그 호칭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조선 시대에서 왕에게 붙는 ‘조(祖)’, ‘종(宗)’, 그리고 ‘군(君)’이라는 호칭은 단순한 이름이 아니었다. 그것은 그 인물을 국가가 어떻게 평가하고 기억할 것인가를 결정하는 정치적 상징이었다. 다시 말해 왕호(王號)는 단순한 예우의 문제가 아니라, 정통성과 역사적 정당성을 부여하는 권력의 언어였다.

            

「명칭 속의 권력 」그림 이미지우선 ‘조(祖)’는 보통 새로운 왕조의 기반을 세우거나 국가 체제를 크게 전환한 군주에게 붙여졌다. 대표적으로 태조 이성계가 그렇다. 조선을 건국하였기 때문에 ‘태조(太祖)’가 되었다. 이후 세조 역시 조카 단종을 몰아내고 즉위했지만, 결과적으로 국가 권력 구조를 재편하고 자신의 왕통을 정당화하는 데 성공하면서 ‘조’의 칭호를 받았다. 즉 ‘조’는 단순한 왕이 아니라 “새로운 질서를 세운 존재”라는 상징적 의미를 담고 있었다. 

 

반면 ‘종(宗)’은 정상적인 왕통 계승 속에서 왕위를 이어받은 군주들에게 주로 붙여졌다. 세종, 성종, 중종, 숙종, 정조 등이 대표적이다. 여기서 ‘종’은 왕조의 정통 계보 안에 포함된 정식 군주라는 의미가 강하다. 다시 말해 ‘종’이라는 칭호는 단순한 존칭이 아니라 “국가가 공식적으로 인정한 정상적 군주”라는 정치적 승인에 가까웠다. 

 

그런데 연산군과 광해군은 다르게 처리되었다.  

그들은 폐위 이후 ‘종’이나 ‘조’를 받지 못하고 단지 ‘군(君)’으로 불렸다. 여기서 ‘군’은 원래 왕자나 왕족에게 사용되는 칭호였다. 즉 왕보다 한 단계 아래의 지위다. 따라서 왕이었던 인물을 사후에 ‘군’으로 낮춘다는 것은 단순한 호칭 변경이 아니라, “정상적인 군주로 인정하지 않는다”는 정치적 선언과 같았다. 

 

연산군의 경우 중종반정 이후 폭정과 패륜의 상징으로 규정되었고, 왕조는 그를 공식 군주 계보에서 사실상 배제하였다. 그래서 그는 ‘연산군’이 되었지 ‘연산종’이나 ‘연산조’가 되지 못했다. 광해군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는 임진왜란(壬辰戰爭) 이후 국가 재건과 실리 외교에서 상당한 정치적 역량을 보였지만, 인조반정 세력 입장에서는 자신들의 쿠데타를 정당화해야 했다. 따라서 광해군은 폭군과 폐주 이미지로 재구성되었고, 결국 ‘광해군’으로 격하되었다. 

 

흥미로운 점은 이것이 단순한 역사 평가가 아니라는 사실이다.  

새로운 권력은 자신들의 정통성을 강화하기 위해 이전 권력을 부정적으로 만들어야 했다. 즉 인조반정 세력은 “광해군은 정당한 왕이 아니었다”는 서사를 만들어야 자신들의 권력 찬탈이 아니라 ‘정상화’로 보일 수 있었다. 그래서 왕호 자체가 정치 투쟁의 결과물이 되었다. 

 

결국 조선 시대에서 

‘조(祖)’는 창업과 체제 재편의 상징, 

‘종(宗)’은 정통 군주의 승인, 

‘군(君)’은 폐위되거나 정통성을 박탈당한 존재라는 의미를 담고 있었다. 

 

따라서 왕호는 단순한 사후 명칭이 아니었다.  

그것은 누가 정통인가, 누가 정상적 권력인가를 국가가 공식적으로 선언하는 정치적 언어였다. 그리고 바로 이 지점에서 우리는 다시 확인하게 된다. 역사는 단순히 사건을 기록하는 작업이 아니라, 이름을 통해 권력을 재구성하는 작업이기도 하다는 사실을 말이다. 

 

프랑스혁명 이후에도 비슷한 장면이 나타난다.  

혁명 세력은 왕정의 흔적을 제거하기 위해 루이 16세 관련 상징물과 왕실 문장을 대대적으로 파괴하였다. 혁명 달력까지 새로 만들며 기존 왕정 질서 자체를 기억에서 지우려 하였다. 단순히 정권 교체가 아니라 “새로운 시대가 시작되었다”는 기억을 만들려 했던 것이다. 

 

20세기에는 스탈린 시대 소련이 대표적 사례다. 숙청된 인물들은 단지 정치적으로 제거되는 데 그치지 않았다. 그들은 사진 속에서도 사라졌고, 교과서와 기록에서도 삭제되었다. 레닌과 함께 찍힌 혁명 지도자 트로츠키가 사진에서 사라진 사례는 매우 유명하다. 권력은 단지 사람을 제거하는 데서 끝나지 않았다. 그 사람이 “원래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만들려 했다. 

 

이 모든 사례의 공통점은 하나다.  

권력은 현재만 지배하려 하지 않는다. 권력은 과거의 기억까지 지배하려 한다는 점이다. 왜냐하면 사람들은 사실 자체보다 “기억된 역사”를 통해 현실을 이해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권력은 이름을 바꾸고, 기록을 수정하며, 어떤 존재는 지우고 어떤 존재는 영웅으로 만든다. 결국 역사는 단순한 과거의 기록이 아니라, 기억을 둘러싼 권력의 투쟁이라고도 할 수 있다. 

 

20세기 전체주의 국가들 역시 비슷한 방식을 사용하였다.  

스탈린 시대 소련에서는 숙청된 인물들이 사진 속에서 사라졌다. 실제로 스탈린과 함께 찍힌 사진 속 인물들이 정치적으로 제거된 뒤 사진에서도 지워진 사례는 매우 유명하다.⁵ 교과서와 기록에서도 그들의 이름은 사라졌다. 이것은 단순한 기록 수정이 아니었다. 권력이 기억 자체를 재편한 것이다. 

 

결국 역사 속 명칭은 중립적 언어가 아니다.  

그것은 특정 시대 권력의 시선이며, 사건을 바라보게 만드는 틀이다. 그래서 역사 연구는 단지 사건을 확인하는 데서 끝나서는 안 된다. 오히려 왜 그런 이름이 붙었는지를 질문해야 한다. 누가 그렇게 불렀는가. 왜 다른 표현은 배제되었는가. 그리고 그 이름 속에서 무엇이 지워졌는가를 함께 살펴야 한다. 

 

특히 교과서는 이러한 명칭을 반복적으로 학습시키는 공간이다.  

학생들은 교과서를 통해 사건의 이름을 배우고, 그 이름 속 의미를 자연스럽게 받아들인다. 문제는 이 과정에서 이름에 담긴 권력성과 정치성이 잘 드러나지 않는다는 점이다. 사람들은 명칭을 객관적 사실처럼 받아들이게 된다. 그러나 역사 속 대부분의 이름은 이미 누군가의 해석을 통과한 결과다. 

 

따라서 역사를 다시 읽는다는 것은 단지 새로운 사실을 찾는 작업만이 아니다. 그것은 익숙하게 사용해 온 이름들을 다시 의심하는 작업이기도 하다. 왜 ‘임오군란’인가. 왜 ‘동학난’이었는가. 왜 ‘광주사태’였는가. 이런 질문을 던지는 순간 우리는 비로소 기록 뒤에 숨어 있던 권력의 구조를 보기 시작한다. 결국 역사는 사건의 기록인 동시에, 기억을 둘러싼 권력의 투쟁사이기도 하다. 그리고 그 권력은 언제나 이름 속에 숨어 있다. 


"본 연재물의 저작권은 저자에게 있으며 향후 단행본 출간을 전제로 일부를 선공개하는 형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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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사등록 2026-06-17 18:54: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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