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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문가 기고] 바다의 타임라인_일본, 패망 딛고 한반도 핏값으로 부흥(5) 홍철훈 칼럼니스트 2026-10-12 19:49:29

홍철훈 칼럼니스트지금까지, 에도 막부 농노 봉건국가 일본이 ‘미 페리 제독의 흑선(黑船)(1853)’으로 개항해 ‘메이지 유신(1868)’과 더불어 근대 국가로 탄생하는 과정과 세계열강에 진입해 동남아 침탈로 이어지고, 결국엔 미국에 전쟁을 걸어 패망하는 과정까지 살펴봤다. 이 과정에서 요시다 쇼인의 ‘부국강병론’을 실천해가는 제자들의 단결력과 애국심, 국민적 단합, 그리고 과정 과정마다 지식인들의 ‘대타협’ 등은 실로 일본의 놀랍고 서늘한 저력을 실감케 했다. 또 봉건국가에서 ‘속성(速成)’ 근대 국가로 성장하면서 일본군부의 국가적 오만과 동아시아 제국(諸國)에 대한 무자비한 살상은 전율을 느끼게 했다. 그 과정 하나하나가 결국엔 한반도와 유관했음으로 한시도 눈을 뗄 수 없었다.  


그러나 태평양전쟁에 패망 후, 그들의 빠른 경제 부흥은 그들로 불행했던 이웃 나라 대한민국 국민의 한 사람으로선 결코 손뼉 칠 심정이 못됐다. 그 역사적 불공평과 아이러니를 살펴보자. 


1945년 패망 직후 일본은 1인당 국민소득이 100달러 미만의 최빈국으로 떨어졌다. 미국의 ‘밀가루 원조’가 생명줄이었다. 그래도 유럽 부흥에 ‘마셜 플랜’처럼, 미 점령국 일본에는 ‘GARIOA(점령지역 구호자금)’와 ‘EROA(점령지역 경제부흥자금)’라는 원조 플랜이 있어, 극심한 기아로 도쿄 거리마저 노숙자가 넘치고 아사자가 속출하자 응급처치로 식량, 의약품, 비료, 석유 등 생존 물자를 대거 무상으로 지원했다.  


맥아더의 GHQ(연합군 최고사령부)는 패망 직후 일본이 다시는 전쟁을 못 일으키도록 대기업 재벌을 해체하고 군수 공장을 파괴하는 사실상 ‘무력화 정책’을 시도했다. 그러나 1947~1948년 기간, 냉전이 본격화하고 중국이 공산화(1949)될 조짐이 보이자, 미국의 대일 정책이 180도로 바뀐다. 즉 일본을 동아시아 공산화를 막는 소위 ‘반공의 보루’로 재건해야 한다는 거였다. 그래 EROA 규모를 대폭 늘려 약 20억 달러의 원조금을 지원하였다.  


비록 도시와 공장은 B-29 폭격으로 잿더미가 되었으나, 메이지 유신 이후 80년간 축적해 온 엔지니어와 관료조직 시스템은 그대로 살아있었다. 따라서 제로센 전투기를 만들던 미쓰비시의 항공 기술자들은 오토바이, 삼륜차, 자동차(토요타ㆍ닛산)를 만드는 엔지니어로 변신했고, 전시 광학 병기(망원경ㆍ조준경)를 만들던 기술은 카메라(니콘ㆍ캐논) 산업으로, 군함 건조 기술은 세계 최고의 조선업으로 순식간에 탈바꿈했다.  


이 와중에, 6.25 한국전쟁 특수(特需)(1950~1953)는 실로 ‘신이 내린 은혜’요, 경제적 나락에서 탈출할 결정적 부활의 복권이었다. 오죽하면 당시 일본 총리 요시다 시게루(吉田茂)가 “이것은 하늘이 내린 은혜(天佑)다.”라고 말했다는 것이다. 한국전쟁은 미군의 엄청난 군수 물자(트럭, 섬유, 모래주머니, 철강, 통신장비, 군화 등)와 장비 수리를 모두 일본에 발주했다. 단 3년 동안 미군이 일본에 지급한 특수(特需)자금만 약 24억~30억 달러에 달했다. 이는 패망 후 미국이 제공한 전체 원조액을 웃돌았다. 


6.25 직전, 일본의 1인당 GNP가 약 100~130달러였던 것이 휴전 직후 약 200~250달러로, GDP 성장률은 연평균 9~10%로 대폭발한 데다, 광공업 생산지수는 2배 이상 급증했다. 외화보유고는 채무 누적에 바닥이었던 것이 24~30억 달러로 증가했다. 실로 ‘숫자’가 말해주는 ‘한반도 핏값의 부흥’이었다! 


불과 3년 만에 이웃 나라의 피비린내 나는 전쟁 특수로 부흥해, 1956년 경제백서에 “이제 더는 ‘전후(戰後)’가 아니다”*1라며 탈빈곤의 샴페인을 터뜨린 것이다. 이 무슨 역사의 불공평이요, 아이러니인가! 아시아에 재앙을 안겨줬던 국가라면 의당 해당 주변국에 정중히 사죄하고 속죄함으로써 국가 간 인간적ㆍ도덕적 관계를 먼저 회복해야 하는 것 아닌가!  


같은 제2차 세계대전 패전국인 독일은 연합국에 의해 완전히 분리되고 철저한 역사적 재판과 교육을 받았다. ‘나치 청산(Denazification)’과 방대한 사죄, 보상을 통해 유럽 공동체의 일원으로 속죄하며 도덕적 리더십을 얻었다. 반면 일본은 미국의 단독 점령(GHQ)하에서 ‘반공 보루’라는 이유로 ‘도쿄재판’이 조기에 흐지부지되었고, 제국주의 시대를 이끌던 전범들이(예컨대, 기시 노부스케, 岸信介; 훗날 내각총리대신이 됨) 전후 정계와 재계로 대거 복귀했다. 일본의 반성 없는 부흥은 ‘미ㆍ소 냉전’이라는 현대사의 또 다른 비극이 낳은 ‘기형적인 사면권’ 덕분이었다. 더구나 자국 고유의 역량만으로 성취해 낸 정당한 부흥도 아니었다. ‘한반도 분단’과 ‘6.25 전쟁’이라는 피비린내 나는 ‘비극’을 자양분 삼아 일어선 ‘반사적 번영’이었다. 자신들이 아시아에 안겨준 재앙의 피눈물이 채 마르기도 전에, 그 재앙의 연장선상(한국전쟁)에서 돈을 벌어 아시아 제일의 경제국이 된 셈이다.  


문제는 경제 대국으로 복귀했어도 도덕적ㆍ지성적으로 여전히 ‘과거의 굴레에 갇힌 가해자’에 머물고 있다는 점이다. 대동아전쟁(‘태평양전쟁’을 일인들은 흔히 이렇게 말한다)의 불가피성을 변명하고, 피해국에 정중한 사죄는 외면한 채, 되레 ‘피해자 코스프레(원폭 피해 강조)’하는 태도다. 한 나라의 국체가 이렇다는 건, 참으로 보기 역겹다. 실로 ‘지혜의 빈곤’일 뿐 ‘진정한 리더’의 모습은 아닐 것이다. 그들이 과거의 죄업을 변명으로 일관하는 한, 바다 건너 조선ㆍ동아시아를 침략했던 그 섬뜩한 전혼(戰魂)이 사라졌다 믿긴 어렵다. 역사의 법정에서 징벌과 성찰을 유예받은 채, ‘이웃의 피’와 ‘냉전의 그늘’을 딛고 일어선 일본의 부흥은 놀라울 만하나 ‘도덕적’으로는 실로 불완전했다.  


독일은 스스로 가해성(유대인 학살 및 침략)을 성찰하는 교육을 ‘국가 정체성’으로 삼았지만, 일본은 자국을 제2차 세계대전의 ‘유일한 원폭 피해자’로 부각하며 ‘기억의 왜곡’을 만들었다. 이로써 자국의 ‘가해 책임’은 덮고 ‘피해만을 강조’하여 주변 국가와의 진정한 ‘역사적 화해’를 스스로 차단한 가해국의 전형이 되었다.  


역사적으로 왜구침탈, 임진왜란, 일제 강점 등으로 그들 ‘전혼(戰魂)의 관성’을 몸으로 겪어온 대한민국으로서는 그 ‘성찰 없는 국체(國體)’에 경계의 시선을 뗄 수 없다. 이는 늘 ‘한일 선린’에 이창(裏窓, うらまど)’으로 작용할 것이다. 사실상, 일본은 절대적 선악도 진정한 반성도 아닌 ‘오직 현실적 생존과 힘’만을 윤리의 잣대로 삼아왔음을 한일 역사로 추론할 수 있다. 예컨대, 도요토미 히데요시(豐臣秀吉)는 내부 영주들의 불만을 밖으로 돌리고 정권의 안정을 도모한다는 지극히 ‘내부 생존 논리’로 한반도를 7년간 짓밟았다. 또 서구열강이 아시아로 밀려오자, 일본의 선각자 지식인, 요시다 쇼인은 ‘정한론과 아제국주의보상론’을 내세워, 우리는 살아남고(自衛) 그 힘으로 한반도와 아시아를 집어삼켜야 한다는 것이었다. 미국과의 전쟁도 그렇다. 미국의 ‘석유 엠바고(1941.8)’로 말라 죽게 생겼으니 ‘자위자존(自衛自存)’을 위해 어쩔 수 없었다고 자국과 자국민을 속였다. 문화 인류학자 루스 베네딕트가 <국화와 칼>에서 분석했듯이, 일본 윤리는 ‘신이나 양심 앞에 절대적인 옳고 그름’이 아니라 ‘타인이나 국제사회의 눈에 어떻게 보이는가’가 기준이 된다.  


바다의 타임라인_일본, 패망 딛고 한반도 핏값으로 부흥(5) 인포그래픽.흥미로운 건, 그들이 사용하는 역사 용어에서 그들 본심이 드러나는 점이다. ‘임진왜란’을 자국 연호를 따서 ‘분로쿠(文錄)의 역(役, えき)*2’라고 가르친다. 여기서 ‘역’은 정당한 국가적 군사행동이나 정벌을 뜻하는 단어로, ‘타국을 침탈한 범죄성’을 완전히 탈색한 용어다. 후손들이 ‘임진왜란’에 대해 사죄 의식이 생기겠는가! 그들이 ‘대동아전쟁(大東亞戰爭)’이라 고집하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요시다 쇼인의 ‘아제국주의보상론’을 위장한 ‘대동아공영권(大東亞共榮圈)’을 선포해 실상은 기존 열강의 식민지를 침략하여 ‘자리바꿈’했을 뿐인걸, 마치 아시아를 서양 열강으로부터 ‘해방’하려는 ‘정의의 전쟁’이었다고 ‘사상적 정당화’로 주변국과 자국 국민을 속였기 때문이다. 아키히도 일왕의 “통석의 염(1990.5)*3”도 그렇다. 조선 침략에 대해 사죄의 의미는 다 뺀 모호한 미사여구였다. 과거청산에 이렇듯 늘 발뺌하는 일본에 어찌 주변국이 ‘진정한 선린(善隣)’으로 성큼 다가서겠는가! 


우리가 일본을 감정적으로 미워하기에 앞서, 그들의 역사적 속성과 생존 논리를 냉철하게 간파해야 하는 이유는 우리 자신을 지켜야 할 ‘자존(自存)’ 때문이다.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가 없듯, 이웃의 속성을 냉철히 읽지 못하는 국가에는 안보가 없다. 대륙에 대한 ‘사대(事大)’에 쏠려 바다를, 바다 세력을 천시했던 누를 되풀이해선 안 된다.  


그 모든 침략전쟁의 죗값을 역사의 법정에서 유예받은 일본이 그 죄업을 끝내 변명하는 한, 한반도가 새겨야 할 단 하나의 진리는 분명하다. 우리가 자신을 지킬 힘을 잃는 순간, 바다 건너 그 ‘침묵의 야수성(野獸性)’은 언제든 ‘이창(裏窓)’에 비친 다른 얼굴로 우리에게 총구를 겨눌 것이라는 사실이다. 

(5부작 끝. 바다의 타임라인_‘에필로그’로 계속) 


*1“이제 더는 ‘전후(戰後)’가 아니다”: 1956년 7월, 일본 경제기획청이 발표한 쇼와(昭和) 31년 ‘연차경제보고’(경제백서)의 결어(結語) 단락에 실린 문구다. 일본 원어로는, “もはや、‘戦後’ではない”로서, 이제 ‘전후 복구’ 시기는 끝났고, 새로운 성장을 도모해야 한다는 경각의 메시지로서 담았다. 6.25 전쟁이 끝나(1953.7) 3년째 나왔다. 이미 1955년 GDP가 태평양전쟁 이전 수준을 완전히 회복함에 따라, ‘고도 경제 성장기’로 진입했음을 알린 상징어가 되었다. ‘한국전쟁 특수(特需)’가 ‘일본 경제’에 얼마나 단기간에 큰 영향을 미쳤나 역설적인 상징 표현으로도 해석될 수 있다. 

*2 역(役, えき): 국가가 공식 명령으로 부역이나 군사를 동원하는 ‘정당한 국가적 공무(公務)’를 뜻함. 일본이 임진왜란을 당시 연호(文祿)을 붙여 ‘문록의 역’이라 부르는 건,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일본의 영주(다이묘)들에게 공식적으로 ‘군역(軍役, 에키)’을 부과해 치른 정당한 국가사업이란 뜻이다. 실로 남의 나라를 침략했음에도 ‘역(えき)’이라 하여 ‘불법적 침략’이나 ‘학살’이라는 침략적 본질을 은폐하고, ‘정당한 공적 동원령으로 치른 정규 전쟁’으로 미화하려는 의도가 깔렸다. 또 황국사관적 관점에서, 오랑캐나 이국을 정벌(征伐)하려 군대를 동원한 과업(役)이고, 중앙 집권적 정통 권력(막부)이 수행한 정식 전쟁의 뜻으로 위장하기 위함이었다. 다른 예로, 청일전쟁을 ‘일청의 역’, 러일전쟁을 ‘일러의 역’이라 하였다. 흥미로운 건, 미국과 싸운 ‘태평양전쟁’은 ‘역’이라 안 쓰고 ‘대동아전쟁’이라 썼다. 전후, GHQ가 ‘대동아전쟁’은 못쓰게 하여 공식적으로는 ‘태평양전쟁’으로 쓴다. 

*3 통석(痛惜)의 염(念): 1990년 5월 24일 노태우 대통령의 방일 환영 만찬사에서 아키히토(明仁) 일본 일왕이 일제강점기 과거사 관련해 사용한 표현. “일본에 의해 초래된 이 불행했던 시기에 귀국의 국민이 겪으셨던 고통을 생각하며 ‘통석의 염’을 금할 수 없다.”라는 발언에서 나왔다. 일상에서도 안 쓰는 말로, 뜻은 ‘매우 슬퍼하고 애석히 여기는 마음’이지만, 제삼자적 표현처럼 비치고, ‘사죄의 의미’는 담겨있지 않다. 그렇기에 주변국에서 ‘진정성이 없다’라고 비판받았다. 


부경대학교 해양생산시스템관리학부 명예교수  

홍철훈(해양물리학 전공) 

hongch0692@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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