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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의 기운에 가장 민감한 반응을 보이는 오동나무 잎새가 힘 없이 떨어지고 있다. 그래서 일찍이 전원시의 대가인 도연명선생은 “階前梧葉已秋聲(개전오엽이추성)”이라 했다. 이 뜻은 ‘뜰 앞의 오동나무 잎사귀는 이미 가을 소리를 내는 구나’라 해서 세월의 無常(무상)과 인생의 무상함을 노래 하였다.

왜 가을이 오면 哲人이나 詩人, 그리고 文人들은 斷想에 잠기고, 想念에 침윤되는지, 이것은 뭐니뭐니해도 諸行無常(제행무상)과 세월의 무상, 그 중에서도 인생의 무상을 가장 심도 있게 감지하기 때문이리라! 봄과 여름을 통과하여 이 가을이 되면 눈으로 보는 것이 많고 , 뿐만아니라 , 입으로 즐길 것 마저 많아서, 영육간에 풍요에 含藏(함장)되어지니 어찌 좋지않으랴!

그러니까 이 가을은 풍요와 무상, 그리고 황량함을 동시에 연속으로 느끼는 절묘한 대자연의 연출을 우리는 보게 된다. 들판에서는 황금파도가 물결치고 , 산자락의 과수원이나 집 주변의 감나무에서 는 잎사귀를 젖히고 노오랗게 익으면서 속살의 완숙미를 노정시키는, 거기서 자연만이 가능한 ‘氣’를 한 껏 맛본다.

밤송이가 벌이 쏘지 않아도 벌어지고 ,사과가 연지를 찍으며 숙성되어 지고 배 또한 종이 봉지를 뒤집어 쓰고 속살을 채우며 무게가 더 해진다. 그런가 하면 길가에는 코스모스가 상량한 바람에 하늘거리고, 울타리 밑의 맨드라미꽃은 산바람으로 있다가 내려온 가벼운 바람을 목덜미에 맡기고 있다. 산비탈 언덕 배기에서는 노오란 小菊과 구절초 꽃이 흐드러지게 피어서 깊어지는 가을의 향기를 發散浮流(발산부류) 시키고 있으니 여간 좋은 게 아니다.

울타리로 심어 놓은 茶나무 꽃이 하얀 찔레꽃 보다, 아니 백장미 보다 더 단아하면서 결백하게 피어서 가을이 절정에 이르고 있음을 한 층 더 느끼게 한다. 차꽃은 순백의 꽃잎에다가 황금싸라기 같은 수술을 머금고 있어서 東茶頌에서 ‘초의선사’는 “素花濯霜發秋榮(소화탁상발추영)”이라 읊었다.

이 뜻은 ‘흰 꽃이 서리에 씻어져서 가을에 영화롭게 피어나네’라는 의미이다. 이와 더불어 竝發(병발)되어 지고, 爭發(쟁발)되어 지는 花友(화우)가 있으니 그게 뭐냐하면 바로 국화이다. 국화도 노오란 황국이 있는가 하면 빨간 紫菊(자국)이 있다.

하얀 차꽃 옆에 빨간 자국이 더불어 피니 그 경치야말로 이 가을 에 느끼는 최고의 佳景(가경)이며 眞善美라고 예찬을 아끼고 싶지 않다. 이러한 진경을 서창을 열어 놓고 힐끗힐끗 훔쳐 보면서 잘 농축되고 성숙되어진 작설차나 보이차 한잔을 음미해 보면 눈과 입, 코, 혀 그리고 목구멍, 또 뜻까지 좋은 현상을 동시에 감지 하게 된다.

그래서 필자는 부득이 불교 말을 빌리지 않을 수 없음을 만나게 된다. 무슨 의미냐 하면 바로 반야심경에 나오는 六根六識(육근육식)이 청정하다고 하는 것이다. 육근이란, 眼耳鼻舌身意(안이비설신의)이고, 육식이란 色聲香味觸法(색성향미촉법)이다. 그래서 이 가을이 되면 누구나 조금 더 사려 깊게 느껴보면 그대로 탈속한 도인이 되는 것이지 아닐까 싶다. 또 논어나 맹자 그리고 주역들의 고전을 탐독하다가 눈이 피로해져서 높게 멀어져 간 하늘을 올려다 보면 가을 창공만이 연출하는 또 하나의 가경을 포착하게 된다. 뭔고 하면 저 먼 북방으로부터 南下하는 기러기 행렬을 만나게 된다. 기러기란 새는 모름지기 짝을 짓거나 행렬을 지어서 날아 온다.

다양하고 다변화로 글자를 쓰면서 질서 정연하게 비상하며 온다. 여기다가 끼럭끼럭 소리를 질러대며 가을 하늘의 쓸쓸함을 더 느끼게 해준다. 하늘에는 기러기떼가 날고, 지상에는 온갖 과일과 꽃들이 협연을 하며 자기나름대로의 진면목을 자랑하고 있으니 어찌 좋을 씨고가 아니나오랴!  또 귀는 가만히 있겠는가?

귀뚜라미떼들이 풀밭에서 놀다가 밤 기온이 내려가니 처마밑으로 몰려온다. 몰려온 귀뚜라미떼들이 가냘프고 , 청랑한 소리를 빚어내며 울어대니 깊어가는 가을 밤 秋夜(추야)를 전설의 향연으로 초대한다. 秋夕이란 명절도 ‘달 밝은 가을 밤’ 이 가장 좋은 밤이라서 정해진 명절이다. 음악을 들으며 讀經(독경) 삼매에 들면 여기가 바로 무아지경이며, 寂然不動(적연부동)의 세계가 아닐까 싶다.

해서 필자는 이 가을을 두고 玄妙(현묘)한 가절이며 풍요와 황량함을 동시에 맛보는 變易(변역)의 절정이라고 말하고 싶다. 또 이 가을은 산이 단풍으로 물들며 멋을 마음껏 부리는 자연이 빚어내는 ‘카드색션’의 총화라고 부르고 있다.

그래서 일찍이 唐詩 에서는 “霜葉紅於二月花(상엽홍어이월화)”라 했다. ‘서리 묻은 잎새가 이월의 꽃보다 붉구나’라는 뜻이다. 차가운 서리맛을 본 잎새들이 심한 자극을 받아 千紫萬紅(천자만홍)으로 변색되어지니 서리가 주는 毒針(독침) 맛이 어느 정도인지 가늠하게 된다.

여기에서 우리 인생도 배울 것이 있다. 모진 추위속에서 殘雪(잔설)을 맛보고 매화가 피듯이, 서리를 맛보고 단풍이 되는 것에서 우리 삶도 먼저 고통을 이겨내야 뜻을 이룰 수 있다는 의미를 건져 내보는 것이다. 고통을 경험하지 않는 성공은 오래가지 않는다.

이런 견지에서 고통은 우리 인생에 엄청난 무게와 의미를 부여하게 된다. 화려한 단풍이 있기 전에 차가운 서리가 있고, 단아한 매화가 피기 전에 잔설이 있다. 삶도 성취가 있기 전에 먼저 風霜(풍상)을 맛보아야 한다. 그래서 성공한 사람은 千辛萬苦(천신만고)를 통과하게 되는 것이리라!

계절이 주는 가르침, 여기서 우리는 숙연해 지는 것이다. 봄에는 감윤한 봄비와 화기찬 바람이 일어서 만물을 깨어나게 하고, 여름에는 염열과 폭서에 무성함을 만나게 되고, 이 가을 이 오면 스산한 바람을 입으며 결실을 보게 된다.

또 겨울이 되면 모든 것을 온축하고 함장해 놓으며 모진 추위를 이겨내는 것이다. 어느 한 계절이 우리 인생에게 스승이 아닌 것이 있으랴, 중요하지 않은 것이 있겠냐 마는 인생이란 , 그래도 수확이 있고, 결실이 있으며, 소득이 있어야 虛虛(허허)하지 않다. 實實(실실)이 있어야 세상이 돌아가고 인생이 경영되어 진다. 그래서 주역의 중천건괘에서 ‘元亨利貞(원형이정)’이라 했다.

이 뜻은 원은 봄이고, 형은 여름이고, 이는 가을이고, 정은 겨울이다. 利(이)인 가을은 이로울 利(이)자로 표현한 것에서 심사숙고해 볼 필요가 있다고 본다. 그런데 이 利(이)자에는 꼭 따르는 것이 있다. 뭐냐하면 ‘의리로울 義(의) 이익에는 의리운 것이냐, 不義(불의)로운 것이냐’ 여기에 큰 문제가 걸려 있다. “의리롭지 아니한 이익은 뜬 구름 같다.”고 논어에서 공자님은 설파하고 있다. 반드시 모름지기 이익은 의리로워야만한다. 그렇지 않으면 자신과 남, 그리고 사회와 국가에 해악이 된다.

이익이 눈앞에 오면 보통의 사람들은 정신이 혼미해지고 미혹되어진다. 그래서 공자님은 “見利思義(견리사의)”라고 축약시켜 말씀하셨나보다. 남의 과실을 따먹으면 불의로운 처사이다. 아무리 지천으로 널려있는 과실이지만 주인의 허락없이 손대면 안된다. 손을 댈 것과 안댈 것, 혀를 댈 것과 안댈 것 여기서 慧(혜)가 발휘되어져야 한다.

色香(색향)가지고는 현행범은 되지 않는다. 무슨 얘기냐 하면, 눈으로 보는 색과 코로 맡는 향기가지고는 범죄가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지나면서 과실들의 과향을 맡고 지날 수 있으며 눈으로 볼 수 있는 것이지 않는가?

우리는 냄새를 맡는 권리와 눈으로 볼 권리는 제한받지 않고 있다. 산과 들녘에 풍요롭게 펼쳐진 과실과 곡식을 마음껏 색향으로 만끽하면서 이 가을을 맞이 하고 있다. 그리고 다가오는 황량함도 감지하면서 實(실)과 虛(허)를 동시에 交感(교감)하면서 이 가을을 보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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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사등록 2012-11-15 00: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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