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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보훈처는 일제시대 신사참배를 거부한 항일 기독교 순교자 주기철 목사를 11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했다.

주기철은 경남 창원 사람으로서, 개통학교 졸업반이었던 1912년 당시 오산학교 교사로 있던 춘원 이광수가 웅천에 내려와 오산학교의 학생모집과 학교후원을 위한 강연을 했다. 오산학교는 남강 이승훈이 설립한 학교로 이광수·유영모·조만식 등의 교사진이 포진하여 있던 서북지역의 대표적인 기독교계 사립학교였다.

그는 1913년 봄 그의 사촌인 주기용과 함께 오산학교에 입학해 1916년 3월 제7회 졸업생으로 이 학교를 졸업하고 4월에 신설학교인 서울의 조선예수교대학교(연희전문학교의 전신) 상과에 진학했다.

1920년 9월 인생의 목표를 잃고 실의에 빠져 방황하던 주기철에게 일대 전환점이 된 계기가 찾아왔다. 마산 문창교회에서 열린 김익두 목사 부흥회에 참석하여 ‘중생의 체험’을 한 그는 1922년 3월 봄학기부터 평양 장로회신학교에서 신학공부를 시작했다.

당시 평양의 장로회신학교는 졸업생이 305명, 재학생이 461명으로 국내 최대 규모의 신학교였는데 주기철은 1923년 봄부터 경남노회 소속 양산읍교회 조사(助事)로 부임하여 첫 목회를 시작해 1925년 12월 22일 평양신학교를 제19회로 졸업하고, 그 며칠 후 30일에는 열린 제20회 경남노회에서 목사 안수를 받았다.

이후 부산 초량교회의 청빙을 받아 1926년 1월 10일 그 교회 담임목사로 취임, 그해부터 노회에서 운영하는 경남성경학원 강사로 출강하며 후진 양성에도 힘을 기울여 1928년 1월 제24회와 1930년 6월 제28회 경남노회에서는 부노회장에 피선되기도 했다.

주기철 목사는 1931년 6월 21일 초량교회에 사임 의사를 밝히고 당시 분규에 싸여 있던 마산교회(문창교회)의 목회를 맡은 후 1936년 7월 평양 산정현교회의 청빙을 받아 그곳에 담임목사로 부임하게 됐다.

당시 평양은 기독교 학교에 대한 일제의 신사참배 강요로 전통 깊은 기독교 학교들이 폐교의 위기에 처해 있었는데 1937년 7월 중일전쟁을 도발한 일제는 전시체제를 구축하기 위해 황민화 정책을 강화하며 신사참배를 독려했다.
주기철 목사가 신사참배 거부 문제와 관련하여 일제 경찰의 주목을 받기 시작한 것도 이 무렵부터였다.

총독부 경무국은 1938년 2월 이른바 “기독교에 대한 지도 대책”이라는 것을 수립하고, 경찰력을 동원하여 학교와 학생들에게 뿐만아니라 교회와 일반 기독교인들에게까지 신사참배를 강요했다.

한국 기독교계 특히 장로교는 신사참배가 기독교의 교리에 위반되고 양심과 종교의 자유를 침해는 것으로 강력히 반대했지만, 일제의 강요가 심해지자 이에 굴복하는 개인과 교회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는데 장로회 노회 가운데서 가장 먼저 이 문제에 굴복한 것은 평북노회였다.

1938년 2월9일 평북 선천읍 남예배당에서 열린 제53회 평북노회에서 “신사참배는 종교가 아니요 국가 의식임을 시인”하기로 결의했던 그 시기 주기철 목사는 봄 신사참배 거부 문제로 평양경찰서에 1차 구속을 당했으며 신사참배 거부자로 지목되어 일제 경찰의 집중적인 감시와 탄압을 받게 됐다.

주기철 목사가 다시 검속된 것은 그해 8월 말경이었다. 결국 일제는 신사참배를 거부하는 총대들을 예비 검속하고 참석한 총대들을 위협해 9월 10일 제27회 장로회 총회에서 신사참배를 가결하고, 그 즉시로 각 노회 대표들을 부총회장인 김길창 목사의 인솔로 평양신사에 참배하게 했던 것이다.

이 사건에 연루된 주기철 목사가 대구경찰서에서 석방돼 평양으로 돌아온 것은 이듬해인 1939년 1월 29일이었다. 그의 석방이 늦어진 것은 끝까지 신사참배를 거부했기 때문이었다. 일제 경찰에 일단 검속이 되면 심한 구타와 고문을 당했으며 주기철 목사 일행도 마찬가지였다.

주기철 목사가 산정현교회로 돌아오기는 하였지만, 건강이 나빠져 혼자서 목회하기 어려운 지경이었다. 주기철 목사는 석방 후에도 일제와 조금도 타협하지 않고 신사참배를 거부해 신사참배 문제에 순응한 교회의 교인들로부터도 존경을 받았다.

그러자 일제 경찰은 1939년 10월에 모인 평양노회에 압력을 가해 신사참배를 하지 않는 목사나 장로는 주일 예배에서 설교나 기도를 하지 못하도록 결의하게 했다. 그리고 주기철 목사가 이에 개의치 않고 산정현교회에서 설교를 계속하자, 10월 중순경 일제 경찰은 정부의 명령에 불복종하는 사람을 공적인 목회에 종사하게 할 수 없다고 다시 구속했으나 대부분의 교인들은 주기철 목사의 뒤를 이어 신사참배를 거부했다.

일제 경찰은 주기철 목사가 소속된 평양노회에 압력을 가해 12월 19일 임시노회를 소집, 주기철 목사의 파면을 결의했고, 이 노회에서는 이미 신사참배를 하고 있던 이인식 목사를 산정현교회 당회장으로 임명했다. 평양노회는 이듬해 3월 정기노회에서 장운경 목사를 위원장으로 하는 전권위원 8명을 선임해 3월 24일 주일예배를 인도하게 했고, 이들은 얼마 후 주기철 목사의 가족들도 교회의 사택에서 쫓아냈다.

주기철 목사를 중심으로 신사참배에 강력하게 저항하던 평양 산정현교회 문제가 일단락되자, 4월 20일 주기철 목사는 평양경찰서에서 풀려났다. 이때부터 그는 감시와 가택 연금을 당해 외부와 연락을 하기 어려웠다. 일본 경찰은 검찰의 지휘를 받아 전국적으로 신사참배 거부항쟁자들을 조사해 그해 9월 20일 새벽에 함경도를 제외한 전국에서 일제 검거를 실시했는데, 그날 하루 검거한 수가 193명에 이르렀으며, 주기철 목사의 마지막 검속도 이 무렵에 이뤄졌다.

이 때 검속된 주기철 목사를 비롯한 평안남도 지역 신사참배 거부자 68명은 1941년 5월 15일 평양지방법원 검사국에 넘겨졌다. 일본 경찰은 그 이듬해인 1942년 5월 12일에야 끝까지 저항하던 35명에 대해서 예심을 청구하고, 8명은 기소유예, 25명은 불기소 처분 했다.

이 마지막 검속 이전의 검속은 신사참배 반대자들을 위협하여 회유하기 위한 것이었지만, 이번 검속은 회유의 가능성이 없는 사람들을 격리시켜 신사참배 거부운동의 확산을 막는 데 그 목적이 있었다.

이 때 검거된 거부운동의 지도자들에게 거의 5년에 걸친 지리한 신문과 옥고가 이어지면서도 정작 1945년 5월 18일에야 평양지방법원의 예심종결 결정이 났던 것은 일제의 그런 목적을 잘 설명해 준다. 그는 1944년 4월 13일 건강이 악화되어 병감으로 이감되었다가, 21일 밤 숨을 거두었다. 그의 나이 47세 때였다. 정부에서는 그의 공훈을 기려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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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사등록 2007-10-31 00: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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