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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형오 전 국회의장을 만나다. - 이스탄불에서 귀국... 역사문화가로의 변신
  • 기사등록 2012-06-12 00: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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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008년 국회의장으로 취임 했을 당시 맨 처음 월간중앙 객원기자 신분으로 의장실에서 약 2시간여 동안 뵐 수 있었던 기회가 주어졌다. 그 인연으로 바쁜 국회일정 속에서도 늘 잊지 않고 메일로 감동을 주셨던 따뜻한 품성을 그 누구와 비견하랴. 65세의 나이라는데 국회에서 뵐때의 그 단정함과 단호함, 냉철함으로부터 옷매무새에서 벌써 자유로운 영혼의 대자유인 김형오가 느껴지는 아직도 악동같은 청년의 풋풋함이 얼굴가득 묻어남은 그 삶의 반증이 아닐까?

지난해 8월 불출마 선언과 지난 4.11총선 이후 20여년간의 의정생활을 뒤로한 채 지난 4월 16일 터키의 이스탄불로 출국한다는 ‘이스탄불로 떠나면서’라는 메일을 받았다. 동서양의 역사가 오롯이 공존하는 아름다움의 극치를 이루는 비잔틴 최후 도시, 콘스탄티 노플! 영문을 알 수없어 막연하게 이런저런 생각에 잠겼다. 하지만 ‘특별한 그 어떤 사명이 있지 않을까’ 추측 할 뿐 정확한 정보가 없어 차일피일 시간이 흘렀다. 드디어 47일간의 일정을 끝내고 귀국했다는 낭보였다. 여기저기 바쁜 일정으로 뵙지 못한 채 시간이 또 지나 갔다. 하지만 지난 8일(금) 오후 고비서로부터 전화를 받고 김포발 마지막 9시 비행기 티켓팅이라고 해 김해공항 의전실에서 만나 단독 인터뷰를 할 수 있었다.

첫마디에 “지난 4월 6일부터 5월 29일까지 술탄 메흐메트 2세와 콘스탄티누스 11세가 대치하는 기간이었다. 지난 5월 29일이 바로 비잔틴 최후의 날이라 모든 생각을 접고 불현듯 터키로 날아갔다”고 하는 순간 고도의 순발력은 그의 열망이 무엇인지를 이내 감지 할 수 있었다. 스티븐 런치먼의 ‘콘스탄티노플 최후의 날’ 서문에는 ‘역사가들이 좀 더 단순했던 시절, 그들은 1453년의 콘스탄티노플 함락을 중세가 끝나는 특징적인 사건으로 여겼다. 하지만 오늘날 끝없이 흘러가는 역사의 흐름을 가로 막을 장벽은 없다는 것을 우리는 너무도 잘 알고 있다. 중세가 근세로 바뀌는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 탐험가들이 해상로를 개척하여 세계 경제를 바꾸어 놓게 한 것은 비잔티움의 쇠망과 오스만튀르크족의 승리였다. 비잔티움 학문이 르네상스에서 그 나름대로의 역할을 한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라고 씌어져 있다.

“지난 2009년 1월 국회의장 신분으로 터키를 방문했을 당시 우연히 군사 박물관에 잠깐 들린적이 있다. 그때 선진 기독교 문명이 이슬람 문명에 정복되는 사실에 근거한 전쟁이란 무엇인가(?)를 두고 559년 전 콘스탄티노플 최후의 날을 온 몸으로 느끼며 매료됐다”고 회상했다. “1100년을 이어 온 비잔틴제국(동로마제국)이 오스만튀르크에 의해 멸망하는 ‘문명은 멸망 했는가(?)하면 다시 일어서는.....전쟁에서 승리와 패배는 무엇인가(?)....’오스만튀르크의 콘스탄틴노플 함락은 3중성을 사이에 두고 당시 60여일 동안 벌어졌던 치열한 전투로 세계 전쟁사에서 그 유례를 찾아 볼 수 없을 만큼 첨단 무기들이 총동원 된 실존 전쟁의 모든 양식이 적용됐다. 특히 오스만튀르크의 술탄 메흐메트 2세가 콘스탄티노플이 해상에 쳐 놓은 쇠사슬을 돌파하지 못하자 배를 끌고 갈라타 언덕을 넘어 천혜의 요새인 삼중 성곽으로 진입하면서 비잔틴의 몰락은 예견 될 수 밖에 없었다. 역사적 진실 앞에 오스만 튀르크의 급부상에 대한 그간의 의문은 불식되었지만, 지식의 부족함을 부끄러워하며 이후 터키를 다섯 차례나 다녀왔다. 헝가리인이 구상한 최대의 대포 등 흥미진진한 대목들이 수 없이 많아 그 깊이에 탄성이 절로 나왔다. 하지만 아직 술탄 메흐메트 2세와 콘스탄티누스 11세의 인간적인 캐릭터에 대한 연구는 드물다. 이러한 부분에 초점을 두고 그들의 인간성과 리더십을 비교, 연구, 분석하며 역사서 집필을 주도해 나가고 있다. 승자와 패자의 리더십, 아울러 전쟁으로 인한 흥망성쇠의 역사를 뒤돌아 보면서 우리가 교훈으로 삼을 것은 무엇이며, 전쟁이 어떤 것인지를 역사적 사실에 근거해 전쟁의 처절함을 분명하게 알리고 싶다.”

이후 지난 2010년 이스탄불에 10일 동안 체류하면서 자료 수집에 들어갔고, 그 동안 지속적으로 국내에 있는 자료들은 물론 미국에 있는 자료까지 모두 섭렵 했다. 이번 터키 47일간의 일정은 “터키 최고의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명문 보아지치국립대학 방문 교수로 초빙, 도서관과 연구실, 오스만튀르크와 비잔틴제국이 전투를 벌였던 3중 성 현장과 숙소를 체바퀴 돌 듯 오가며 방대한 자료 수집과 연구에 몰두하다 귀국했다.”라고 말해 휴식차원에서 갔으리라는 세인들의 예상이 빗나갔음을 확인케했다. 오래전부터 구상해 온 ‘콘스탄티노플의 역사’에 대한 의문의 과제를 안고 화해와 공존을 상징하는 ‘이스탄불’과 ‘콘스탄티노플’을 합성해 ‘이스탄티노플’이라는 신조어를 만들어 낼 정도로 열정을 가지고 매달렸다.

“1453년 비잔틴제국의 수도였던콘스탄틴노플 정복 전쟁은 지상전, 지하전, 해전, 공중전, 심리전, 첩보전, 외교전 등 그 모든 전략과 전술이 총동원된 전쟁이었다. 이 전쟁으로 세계역사의 물결이 바뀌었다. 오스만튀르크의 비잔틴 장악으로 유럽의 대항해 시대가 열렸으며, 콜럼버스의 아프리카 희망봉 항로를 개척하게 되었다. 오스만튀르크가 고구려와 흉노, 우랄 알타이어 계통이라는 뿌리를 함께 깔면서 세계사에 큰 획을 그은 업적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동서양 역사에서 왜 주목받지 못하는지도 아울러 밝힐 예정이다.

터키에서 술탄 메흐메트2세는 우리의 세종대왕과 이순신 장군을 융합한 정도의 위대한 인물로 추앙 받는다. 특히 14살에 왕위에 올랐으나 왕좌에서 내려오고 19살에 다시 왕위에 올라 21살에 철옹성 콘스탄티노플을 함락한 사실은 흥미를 끌 수 밖에 없다. 한 젊은 왕이 아버지의 아버지도 이루지 못한 업적을 이뤄냈다는 역사적 진실은 숙연함을 느끼게 한다. 오스만튀르크로 인해 전 유럽이 200여년 동안 길을 잃어 전전긍긍 했다. 콘스탄티노플은 실크로드의 출발점이자 종점이었다. 유럽은 어쩔 수 없이 항해시대로 눈을 돌려 나아갈 수 밖에 없었다. 안주하고 있던 오스만튀르크는 그 사실을 까맣게 모르고 있다가 다시 서양에 정복 당한다. 우리는 이러한 사실을 거울 삼아 보다 폭 넓은 글로벌 사고와 시각으로 현실 안주의 안이함을 탈피해야 한다. 현재 남북한이 대치하며 눈앞의 이익을 위해 싸울 필요가 있느냐.”라며 역사서 집필의 동기와 배경을 함축했다.

“터키에 머무는 동안 보아지치국립대학에서 한국정치 60년 역사를 강의했다. 처음 30분 강의를 약속했지만 나중에는 질의응답까지 1시간 40분 동안 이어졌다. 북한 방문과 미국 스탠퍼드대학에서 강의했던 일 등, 아시아 및 한국의 정치사에 그렇게 반응이 뜨거울 줄 몰랐다”며 맑고 흐뭇한 미소가 입꼬리를 한껏 올렸다. “자료의 바다에서 충분히 헤엄치고 돌아 왔다.”라고 여유롭고 행복하게 말하는 그가 툭! 던지는 한마디 “ 이제 현실 정치에 초연 하다. 나무의 잔가지를 보는 것이 아니라 전체 숲을 보며 정치 일선에 나선 정치인들에게 조언을 하며, 조용히 역사서 발간에 심혈을 기울이겠다. 이미 세계 각국에서 출간된 저작물에 나란히 이름을 올리는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 그간 시중에 나와 있는 관련 책으로는 팩트에 비중을 둔 스티븐 런치먼의 ‘1453 콘스탄티노플 최후의 날’과 소설 형식을 빌어 쓴 시오노 나나미의 ‘콘스탄티노플 함락’ 등이 있다. 한편 올 가을쯤에는 ‘콘스탄티노플함락’에 관한 팩트 위주의 방대한 역사서 탄생이 예고되고 있어 벌써부터 설레임으로 가슴을 뛰게 했다.

“평소 젊은이들을 좋아하기 때문에 그들이 원하면 언제나 특강 정도는 해 줄 용의가 있다.”라고 말해 걸어온 길에 대한 현장 경험을 강연을 통해 전달 받을 수 있는 기회제공이 따를 것으로 전망되었다.

대선 주자들에 대한 한마디는 “겸손과 당당함을 덕목으로 절묘한 타이밍이 있어야 국민들이 따르지 않겠냐”며 ‘말에서부터 폭력없는 국회’를 당부했다. 한편 부산에 대한 애정은 그 누구보다도 앞서지만 ‘김해공항 가덕도 신항만으로의 이전’을 최초로 주장한 사람으로서 못내 아쉬움의 그림자를 드리웠다.

저널리스트로 출발하여 최고의 정치인으로, 또 ‘역사문화가로’의 아름다운 변신을 꽤하며 거듭나고 있는 자기 삶의 주인공! 확고한 가치관을 지닌 보기드문 어른!의 모습은 동시대를 살아가는 모든이들에게 귀감의 향기로 상큼하고 푸르른 신선함을 주는 청량제로 유월의 무더위를 날렸다.

경남 고성 출신(1947년생)으로 영도 영선동 ‘맏머리새미’ 돌담집 둘째 아들하면 모르는 사람이 없는 김형오 전 국회의장. 경남 중. 고등학교와 서울대 외교학과. 동 대학원졸업(정치학 석사), 경남대 정치학 박사(전자민주주의 국내 1호)이다. 또한 초등학교 3학년 때 부터 틈만나면 책을 읽는 독서광으로 학창시절 사회과목은 타의 추종을 불허했다. 좌우명은 ‘겸손하라, 최선을 다하라’이며 가족으로는 부인 지인경 여사와 슬하에 하연. 소연 두 딸이 있다. 그리고 또 한가지 특별한 이력은, 1996년 수필 문학가로 등단한 이후 시낭송 등 왕성한 문단활동으로 인문학 부재의 시대에 세인들을 놀라게하고 있다.

누구에게나 부모님에 대한 특별한 사랑과 소회가 있겠지만 언젠가 메일로 보내 준 마산여고 출신의 문학을 좋아하는 결고운 어머님에 대한 이야기는 큰 감동으로 콧날이 시큰거렸다.
정원 가꾸기를 유난히 좋아하여 집에는 예쁜 꽃과 나무들이 즐비했으며 낙동강변에서 복숭아 과수원을 경영, 제일 크고 맛있게 잘 생긴 것을 골라 철마다 보내 주셨던 그 가이 없는 내리 사랑..... 어머님을 추억하며 애틋한 마음을 담아 수필로 잔잔하게 그려낸 그 글은 아직도 새록새록 투명 복숭아빛 수채화 처럼 잊혀지지 않는다.

주요경력은 동아일보 기자를 거쳐 국무총리. 대통령 정무비서관, 1992년 14대 국회의원으로 정계에 입문, 15, 16, 17, 18대 국회의원을 지냈다. 한나라당 부산시지부위원장, 한나라당 17대 총선 선거대책본부장, 한나라당 사무총장, 한나라당 원내대표, 대한민국 국회의장 등을 역임했다. 또한 국회 실업특별위원회위원장, 국회 과학기술정보통신위원회위원장, 한나라당 개혁특별위원회 제2분과 위원장으로 요직을 두루 거친 보기드문 행운의 지혜로운 정치인으로 역사의 한 페이지를 남기게 됐다.

저서로는 ‘김형오가 본 세상, 세상이 본 김형오’(1996), ‘엿듣는 사람들’(도서출판 그린, 1999), ‘돌담집 파도소리_ 디지털정치인 김형오의 생각과 살아온 이야기’(문예당, 2003), ‘길 위에서 띄운 희망편지’가 있으며, 존경하는 인물로는 이순신 장군과 처칠 수상을 꼽았 다. 감명깊게 읽은 책은 ’자본주의 이후의 사회(피터 드러커), 삼국지(최영해)이며 애송시는 ‘별헤는 밤(윤동주)’이라고 해 고고한 감성의 소유자임을 짐작케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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