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철훈 칼럼니스트
홍철훈 칼럼니스트1697년 ‘독도’에 꽂았던 안용복의 ‘주권 깃발’은 200년이 지난 1905년, 일제(日帝)의 침탈과정에서 돌연 뽑혔다. 시대를 뛰어넘었을 뿐 안용복 때와 대차가 없었다. 조선의 ‘공도 정책’으로 울릉도ㆍ독도가 텅 비자 왜인들이 가져가려 했었듯, 이번에도 독도가 무인도였던 게 빌미가 되었다. ‘울릉도’의 일본식 옛 이름 ‘죽도(竹島)’를 훔쳐 독도를 갈음해 일제 깃발을 꽂았다. 그러니까 ‘울릉도의 옛 일본명’을 갑자기 ‘독도의 현(現) 일본명, 다케시마(竹島)’로 바꾼 것이다. 안용복 때는 조선국력이 일본과 대등했으나 불행히도 이번엔 망국 직전이었다. 세계열강에 ‘무주지(無主地)’라 우겨 “눈 가리고 아웅” 했는데도 그들 눈엔 ‘동트는 일본’만 보일 뿐 ‘저무는 조선’은 안 보였다.
여기선 일본의 ‘독도강탈’ 과정과 ‘독도 주권’을 회복할 ‘논리적 방어벽’을 세워볼 것이다. 우선 ‘국제법적인 허점’을 살펴보자. 이를 위해 ‘역사적 권원(歷史的 權原, Historical Title)’이란 용어부터 먼저 알아보자. 이는 한 국가의 주장을 ‘국제적’으로 인정받을 수 있는 ‘법적 근거(물증)’로 흔히 알려져 있다. 예컨대, ‘독도 주권’에 대해 안용복이 일본관리에 ‘항변한 사실’, 그 ‘정황 기록’, 또 에도막부(江戶幕府)가 안용복의 주장을 인정해 예하부서에 내린 ‘도해 금지령’ 등과 이와 관련된 일본 사료가 다 유력한 ‘권원(Title)’에 해당한다.
안용복 유배(1697) 이후, 18세기 유력한 권원(權原)은 1717년에 제작된 청나라의 ‘황여전람도(皇輿全覽圖)’다. 이 지도는 사실상 청(淸)이 조선의 ‘독도 주권’을 인정한 사료다. 이 지도는 청나라 최고의 성군 강희제(姜熙齊, 1654~1722)가 서양 선교사를 동원해 제작한 당대 아시아 최고의 정밀지도였다. 주목할 건, 1737년, 프랑스 지리학자 당빌(JB. B. D’Anville)이 ‘황여전람도’를 보고 울릉도ㆍ독도가 포함된 ‘조선왕국전도’를 그려 전 세계에 배포해 더 유명해졌다는 점이다.
무엇보다 가장 기억해야 할 권원은, 19세기 들어 1877년 메이지(明治) 정부가 세계열강에 공표한 ‘태정관지령(太政官指令)’*1일 것이다. 여기에「“죽도(울릉도)와 일도(독도)는 일본과 관계없다.”」고 선포했다. 사실상, 신생(新生) 일본이 주변 나라와 ‘평화국’이라는 대외홍보용이었다. 이 ‘공문서의 자백’에 23년 뒤 고종황제가 쐐기를 박았다. 1900년 ‘칙령 제41호’*2를 발령해 독도를 ‘울도군’의 품에 안았다. ‘황제의 인장’으로 공인한 독도 주권의 마침표였다.
그런데 이런 자타의 권원을 다 무시하고, 1905년 2월 22일, 돌연 일본이 ‘무주지(無主地) 선점론’을 내세워 ‘시마네현 고시 제40호’*3를 공표한다. 이른바, 오늘날 자국 영토의 근거라 우기는 ‘공문서’다. ‘태정관지령(1877)’ 때는 신생 메이지 정부 9년째라 나라가 아직 약해 ‘평화의 탈’을 쓰고 ‘자백’을 토했다가, 28년 뒤 일제 발톱이 커져 러일전쟁(1904.2.8.~1905.9.5.)에서 러시아를 할퀴어 승기를 잡을 듯 하자 독도를 집어삼킨 것이다. 이 뻔한 일본제국의 ‘역사적 치부(恥部)’를 대다수 일본인은 모른다는 게 한심하다. 실로 독도에 대한 ‘사실적(史實的)ㆍ외교적ㆍ국제적 홍보’가 왜 중요한지를 시사하는 대목이다.
놀라운 건, 일제가 대한제국 조정에는 이 ‘시마네현 고시’를 알리지 않았다는 점이다. 국제법을 정면으로 위배했다. 저 을사늑약(1905.11.17., 외교권 박탈)이 체결되기 9개월 전이었고, 아직 대한제국은 존재했다. 이 ‘독도강탈’을 대한제국 조정이 알게 된 건, 외교권이 이미 박탈된 이듬해 1906년 3월 28일, 시마네현 시찰단이 울릉도를 방문해 군수 심흥택(沈興澤)에게 ‘독도 소유권’을 주장하면서다. 심흥택은 놀라 급히 강원도 관찰사에게 “본군 소속 독도(獨島)가 (중략) 일본 영토라 주장해 경악할 일입니다.”고 보고했다*4. 이때 ‘독도’라는 명칭이 공식문서에 처음 등장했다. 당시 ‘석도(石島)’의 방언이 ‘독섬’이었는데, 이를 한자로 표기하려다 ‘독도(獨島)’가 되었다.
바다의 타임라인_일제, 독도를 ‘훔친 이름’으로 바꾸다(4)대한제국 조정은 즉각 ‘의정부 명령(1906.5)’*5등으로 대응했지만 허사였다. 일본에 대한 ‘항의서한’을 외교권을 움켜쥔 통감부(일본)가 거머쥐었으니, 마치 ‘도둑에게 도둑질 항의하는 꼴’이 된 셈이었다. 오늘날 돌아보면 실로 눈물겹다. 더 눈물겨운 건, 저 바다의 강국 ‘왜(倭)’에게 ‘임진년(1592)의 뼈아픈 국난’을 겪고도, 다시 바다 강국이 된 일본에게 또 1905년엔 독도를, 5년 뒤엔 경술국치(1910)로 ‘역사의 종묘사직’마저 집어삼키게 했냐는 점이다. 그저 ‘왜놈’, ‘왜놈’ 하다, ‘냉정한’ 국민적 역사교육이 부족했던 게 아니겠는가! 한 나라의 ‘주권(主權, Sovereignty)’은 배움 없는 민족에겐 잠시 머물다 가고 역사를 깨우치는 민족에겐 만 영원하다.
이제 ‘시마네현 고시’의 「국제법적인 허점」을 찾아 독도에 대한 ‘논리적 방어벽’을 세워보자. ① 고지(告知)의 부재다. 즉 “몰래 한 편입은 무효다.” 국제법상 영토편입이 효력을 가지려면 주변국에 ‘공표’과정이 필수다. 일제는 1905년 당시 대한제국에 단 한 마디도 통보하지 않았다. 자국 지방 현(시마네현) 게시판에 살짝 붙여놓은 ‘비밀 고시’였다. 게다가 ‘외교권’을 탈취(1905.11)하고 나서 이듬해(1903.3) 통보했다. 심흥택이 날밤을 새워 써 강원도 관찰사에게 보낸 ‘보고서 1호’(1906.3.29.)는 그래서 강력한 ‘권원’이 될 것이다. ② ‘무주지(無主地)’가 아니었다. 이미 5년 전인 1900년, 대한제국은 고종황제 ‘칙령 제41호’를 통해 독도를 ‘석도(石島)’라 명명하고 울도군 관할로 명시했다. 주인이 엄연히 행정권을 행사했던 땅을 ‘주인 없다(無主)’고 규정한 건 국제법상 ‘근거 없는 허위 사실’에 기반을 뒀다. 이 또한 유력한 권원이 될 것이다. ③ 침략 전쟁과 결부됐다. 국제법은 전쟁ㆍ강압에 의한 영토 획득은 인정하지 않는다. 1905년은 러일전쟁 중이었고 일본은 독도에 망루를 세우고 러시아 함대를 감시하는 ‘군사적 목적’으로 강탈했다. 이는 평화적인 영토확장이 아닌 ‘침략 전쟁의 연장 선상’에서 이루어진 ‘불법 탈취’였다.
어째거나 독도는, 5천 년 역사가 단절되는 ‘망국(亡國) 도미노의 첫 조각’일 뿐이었다. 그런데 과연 이런 비극의 책임이 ‘침략자의 야욕’에만 있는 것일까? 아닐 것이다. 그저 바다를 ‘비워두어야 할 변방’으로만 봤던 우리 방심이 주원인일 것이다.
이제 독도는 ‘미움의 기록’이 아닌, 치열한 ‘성찰의 거울’이어야 한다. 안용복이 몸으로 지키고 주권의 마침표를 선포했던 그 바다 위에, 이제 ‘감성의 파도’를 넘어 단단한 ‘논리의 요새’를 쌓고 독도에 휘날리는 태극기를 지켜야 한다. 이제 그 바다를 우리가 어떻게 ‘태극기’ 아래 온전히 품어야 할까 생각해 보자. (5편에 계속)
*1태정관지령(太政官指令): 1868년 태동한 일본 메이지(明治) 정부가 9년 뒤 1877년 3월 9일, “죽도(울릉도)와 일도(독도)는 일본과 관계없다.”고 밝힌 일본국 공문서. 대한민국의 ‘독도 주권’ 주장에 대한 일본의 자백서로 국제적으로 중요한 ‘권원’이 됨. 메이지 유신 10걸 중 1인, 우대신(右大臣) 이와쿠라 토모미(岩倉具視, 1871~1883)가 작성. 세계열강에 대한 일본의 생존전략 일환이었음. 당시 ‘서구 열강과의 불평등 조약 개정’이 일본의 지상 과제였던 만큼, ‘국제법 준수국’ 및 ‘영토분쟁 없는 평화국’으로의 이미지 각색(脚色)이었음. 또 당시 북해도개척, 유구(琉球) 열도 처분 등 영토확장에 집중해 ‘전략적 후퇴’였을 뿐 본의(本意)가 아니었음. 1905년 2월, 러일전쟁에 승리 조짐이 보이자 독도를 강탈함.
*2칙령 제41호(1900): 고종황제가 명령한 대한제국의 공문서. 울릉도를 울도군으로 승격 후 그 관할 구역에 독도(당시 석도, 石島)를 명시해 대한제국 영토임을 세계만방에 천명했음. 독도에 대해 ‘태정관지령(1877)’으로 ‘자백’했음에도 ‘왜(倭) 어부가 불법 침탈’을 계속해 이를 차단한 ‘법적 방어선’이었으며, 대한제국 황제 인장으로 공인한 독도 주권의 마침표.
*3시마네현 고시 제40호: 독도에 대한 자타 권원(權原)을 무시하고, 1905년 2월 22일 발령된, 이른바 오늘날 자국 영토의 근거라 우기는 일본공문서. 소위 “주인 없는 땅이니 먼저 갖는 놈이 임자(무주지 선점론)”란 논리에 근거해 일본이 독도를 자국 영토에 편입했다. ‘나카이 요사부로(中井養三郞)’란 어민이 독도에서 ‘강구(강치)잡이 독점권’을 얻겠다고 일본 정부에 청원한 게 그 계기가 됨. 러일전쟁 중, 전시용 망루로 쓰려는 의도가 숨어있었음.
*4심흥택 보고: 울릉도 군수 심흥택(沈興澤)이 1906년 3월 28일, 시마네현 진자이 요시타로(神西由太郞) 일행을 포함한 약 45명의 시찰단이 울릉도를 방문해 ‘독도영유권’을 주장한 것에 반발해, 1906년 3월 29일 즉각 강원도 관찰사(이명래, 李明來)에게 보고(보고서 제1호)한 대한제국 공문서. 여기에 그 유명한 “본군 소속 독도(本郡所屬獨島)”란 표현이 등장함. 국제법상 “독도를 우리 영토로 명확히 인식하고 지배했었다”는 ‘권원’이 됨.
*5의정부 명령: 대한제국이 1906년 5월, 울릉도 군수 심흥택이 올린 보고(1906.3.29)에 대응해, 독도의 영유권을 주장한 공문서. 비록 ‘을사늑약(1905.11)’으로 외교권이 상실돼 무위로 끝났으나 국제법상 “독도를 우리 영토로 명확히 인식하고 지배했었다”는 ‘권원’이 된다.
부경대학교 해양생산시스템관리학부 명예교수
홍철훈(해양물리학 전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