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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태근의 역사 다시 읽기3] 침묵이 역사가 되는 순간
  • 기사등록 2026-06-05 07:24:05
  • 기사수정 2026-06-05 07:29: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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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사회는 그동안 대한제국의 멸망과 근대사를 ‘피해자와 외세’라는 하나의 익숙한 프레임 안에서만 바라봐 왔는지도 모릅니다. 본지는 역사 교과서의 이면을 들여다보고, 박제된 기억 뒤에 숨겨진 날것의 진실을 추적하고자 합니다. 부경대학교 사학과에서 후학을 양성하고 국채보상운동 학술자문교수로 활동해 온 역사학자 허태근 교수의 날카로운 시선을 통해, 우리가 미처 묻지 못했던 대한제국 망국의 진짜 원인과 ‘기억의 정치학’을 총 4부(13장)에 걸쳐 연재(주 3회)합니다. <편집자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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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1부 : 역사는 어떻게 만들어지는가 >

    1장. 교과서는 왜 진실을 말하지 않는가

         ③ 침묵이 역사가 되는 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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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흔히 역사 왜곡이라고 하면 거짓말부터 떠올린다. 

 

사실이 아닌 내용을 꾸며 내거나, 존재하지 않았던 사건을 만들어 내는 일을 먼저 생각한다. 그러나 역사를 가장 깊게 바꾸는 것은 때로 거짓이 아니라 침묵이다. 거짓은 드러나면 반박될 수 있다. 하지만 침묵은 질문 자체를 사라지게 만든다. 무엇이 기록되지 않았는지조차 알지 못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역사는 기록으로 남는다. 

 

모든 사건이 같은 크기로 기록되는 것은 아니다. 어떤 사건은 크게 남고, 어떤 사건은 작게 남는다. 어떤 사람의 이름은 반복되지만, 어떤 사람의 삶은 처음부터 기록의 바깥으로 밀려난다. 그렇게 기록되지 않은 것들은 시간이 흐르면서 점점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여겨진다. 침묵은 단순한 공백이 아니다. 그것은 기억의 방향을 바꾸는 힘이다. 

 

기록은 언제나 선택의 결과다. 

 

무엇을 남길 것인가.  

누구의 목소리를 중심에 둘 것인가.  

어떤 사건을 중요한 역사로 설명할 것인가.  

이러한 선택은 단순한 기술의 문제가 아니라 권력과 해석의 문제이기도 하다. 그래서 역사를 읽는다는 것은 기록된 문장만 따라가는 일이 아니다. 그 문장 사이에서 무엇이 사라졌는지를 함께 읽는 일이어야 한다. 

 

권력은 단지 사건을 기록하는 데서 끝나지 않는다. 

 

권력은 무엇이 기록될 수 있는가의 기준까지 만든다. 어떤 질문은 허용되고, 어떤 질문은 처음부터 제기되지 못한다. 이 기준은 때로 법과 제도로 작동하고, 때로는 상식과 관습의 이름으로 조용히 작동한다. 그렇게 만들어진 침묵은 시간이 지나면 자연스러운 질서처럼 받아들여진다. 사람들은 “왜 기록되지 않았는가”를 묻기보다 “중요하지 않았으니 기록되지 않았을 것”이라고 생각하게 된다. 바로 그 순간, 침묵은 역사가 된다. 

       

1989년 6월 5일 중국에서 일어난 천안문 사건 직후 천안문 광장 인근에서 탱크의 앞길을 가로막고 있는 남성.

보이는 이 사진은 1989년 6월 중국 베이징 천안문 광장 인근에서 촬영된 한 장의 사진에서 침묵의 구조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탱크 행렬 앞에 홀로 선 이름 없는 시민의 모습은 전 세계로 퍼져나갔다. 사람들은 그 장면을 기억한다. 그러나 정작 그 사람의 이름과 이후의 삶은 여전히 불확실한 영역 속에 남아 있다. 사진은 남았지만 이름은 남지 않았고, 장면은 기억되지만 목소리는 충분히 기록되지 않았다. 역사는 때로 강렬한 이미지를 남기면서도, 그 장면 속 인간의 삶과 두려움, 그리고 선택의 이유는 침묵 속에 묻어 둔다. 

 

이러한 구조는 특정 시대만의 문제가 아니다. 

 

역사는 오래전부터 권력 중심으로 기록되어 왔다. 기록의 주체가 될 수 없었던 사람들의 목소리는 반복해서 사라졌다. 특히 식민지 시대 조선총독부가 추진한 조선사 편찬 사업은 침묵이 제도적으로 조직된 대표적 사례였다. 그것은 단순한 역사 정리가 아니었다. 조선을 어떤 역사로 기억하게 만들 것인가를 결정하는 작업이었다. 

 

그 과정에서 조선 사회의 자생적 발전 가능성은 의도적으로 축소되었다. 조선은 스스로 변화할 능력이 부족했고, 외부의 힘이 개입해야만 근대화될 수 있었다는 인식이 반복적으로 주입되었다. 이러한 인식은 단지 학술 논문 속에 머물지 않았다. 교육과 교과서, 학술 제도와 연구 체계를 통해 지속적으로 재생산되었다. 식민 권력은 영토만 지배한 것이 아니라, 기억의 구조까지 지배하려 했다. 

 

문제는 이러한 틀이 해방 이후에도 완전히 사라지지 않았다. 

 

식민사관을 비판하는 역사 서술은 등장했지만, 그 비판조차 때로는 식민사관이 만들어 놓은 틀 안에서 이루어졌다. 결론은 달라졌지만, 질문의 방식은 그대로 남았다. 사건을 배열하는 방식, 사용하는 용어, 중심과 주변을 나누는 기준 역시 크게 달라지지 않은 경우가 적지 않았다. 그래서 역사는 바뀐 것처럼 보였지만, 그 바탕의 인식 구조는 계속 이어졌다. 

 

역사 왜곡은 반드시 노골적인 조작으로만 이루어지지 않는다. 

오히려 익숙한 표현과 반복된 설명 속에서 더 오래 지속된다. “여러 요인이 작용하였다”라는 표현은 겉보기에는 균형 잡힌 설명처럼 보인다. 그러나 때로는 책임의 주체를 흐리게 만드는 방식으로 기능한다. 물론 역사는 단순한 하나의 원인으로 설명될 수 없다. 하지만 복합성을 말한다는 이유로 책임까지 사라져서는 안 된다. 누가 선택했는가. 누가 이익을 얻었는가. 누가 희생되었는가. 이러한 질문이 사라질 때 역사는 흐름만 남고 책임은 사라진다. 

 

교과서는 이러한 침묵의 구조를 가장 강하게 재생산하는 공간 가운데 하나다. 

 

교과서는 복잡한 역사 논쟁을 정리하여 교육 가능한 형태로 바꾼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수많은 질문이 생략된다. 어떤 사건은 짧게 지나가고, 어떤 고통은 배경으로 밀려난다. 반복되는 서술은 곧 상식이 되고, 상식이 된 침묵은 더 이상 침묵처럼 느껴지지 않는다. 

 

그러나 역사는 단순히 과거의 사실 목록이 아니다. 

 

그것은 선택된 기억과 침묵 속에서 만들어지는 서사다. 따라서 역사를 다시 읽는다는 것은 새로운 사실만 찾아내는 일이 아니다. 이미 기록된 사실을 바라보는 질문을 바꾸는 일이다. 무엇이 기록되었는가뿐 아니라, 무엇이 기록되지 않았는가를 함께 묻는 일이다. 

 

우리는 때때로 지나치게 매끄러운 역사 서술 앞에서 질문해야 한다. 

 

왜 이 사건은 이렇게 불리고 있는가.  

왜 어떤 사람들은 이름조차 남지 않았는가.  

왜 책임은 흐려졌는가.  

왜 어떤 고통은 반복해서 주변으로 밀려났는가.  

이러한 질문이 쌓일 때, 침묵은 더 이상 단순한 공백으로 남지 않는다. 

 

침묵을 읽는 일은 쉽지 않다. 

 

기록된 문장은 눈앞에 보이지만, 침묵은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바로 그 보이지 않는 부분 속에 역사의 본질이 숨어 있을 때가 있다. 기록이 지나치게 자연스럽고, 사건이 너무 매끄럽게 정리되어 있으며, 책임의 주체가 보이지 않을 때 우리는 반드시 물어야 한다. 이 매끄러운 서술은 무엇을 덮고 있는가. 이 자연스러운 흐름 속에서 사라진 목소리는 누구의 것인가. 역사를 다시 쓴다는 것은 거창한 선언에서 시작되지 않는다. 

 

그것은 아주 작은 질문에서 시작된다.  

 

왜 기록되지 않았는가.  

왜 침묵했는가.  

왜 어떤 기억은 반복되고 어떤 기억은 사라졌는가.  

이러한 질문들이 모일 때, 지워졌던 목소리들은 다시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한다. 그리고 바로 그 순간, 역사는 단순히 과거를 정리한 기록이 아니라 현재가 과거와 다시 대화하기 시작하는 살아 있는 기억이 된다. 


지은이: 허 태 근 

ㆍ부경대학교 대학원 사학과 졸업(문학박사)

ㆍ전) 부경대 사학과 교수

ㆍ사) 국채보상운동 부울경 학술자문교수

 "본 연재물의 저작권은 저자에게 있으며 향후 단행본 출간을 전제로 일부를 선공개하는 형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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