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철훈 칼럼니스트
홍철훈 칼럼니스트필자는 2편에서 안용복(安龍福)을 천출에 대한 사회적 홀대를 애국적 기개와 자존심으로 승화시킨 ‘입지전적 인물’로, 에도막부 최고 실권자 관백(關白)에 맞섰던 사실상 ‘조선 외교관’으로, 무엇보다도 울릉도 어장을 지킨 ‘선각자(先覺者)’로 복원하려 했다. 실로 안용복은 동시대 실학자 성호 이익*1이 ‘영웅호걸’이라 칭송한 것처럼, ‘가짜 관복 입은 진짜 영웅’이었다.
안용복을 매장한 신라ㆍ고려ㆍ조선을 이어온 ‘바다 천시의 국시(國是)’가 당대 세계 사조(思潮)에 얼마나 몽매(蒙昧)했던 일인지 만시지탄이나 살펴보자. 또 안용복이 목숨 걸고 지켰던 ‘울릉도ㆍ독도의 바다’를 오늘날 ‘해양어장학’적인 시각에서 바라보자.
앞서 타임라인 1편 ‘장보고’에서 썼듯, 중국은 장보고가 깔아 논 ‘글로벌 해상(海商)의 비단 멍석’ 위에서 송ㆍ원ㆍ명대에 이르는 약 440년 동안 동남아 바다와 인도양을 지배한 해상패권 국가로 그 위용을 전 세계에 떨치고 있었다.
그때 한반도에선 무엇을 했나? 실로 ‘바다 문 닫기’였다. 그 상징적 ‘애드벌룬’이 조선 태종의 ‘공도(空島) 정책(1416)’*2이다. ‘섬에 사는 백성을 육지로 이주시키고 섬을 비우자는 것’이다. 영토는 유지하되 ‘관리의 효율성과 백성 보호’라는 명분에서였다. 실은 ‘왜구 침탈’에 대한 대비책 성격이 강했다. ‘범월(犯越)’은 바다에 나가 이를 위반하는 행위이며, 사실상 백성들의 발목에 채운 ‘투명한 족쇄’였다.
어민에 한해, 연안(가시거리 내)에서 ‘어업’이라는 생존의 끈은 허용하되 수평선(약 4.64km) 넘어 섬으로 가는 모든 항해는 ‘교형(絞刑)’ 또는 ‘참형(斬刑)’이라는 서슬 퍼런 칼날로 가로막았다. 군선을 제작해 ‘섬’과 ‘섬 백성’을 지키고 그 주변 바다를 ‘어업(漁業) 경제 공간’으로 생각할 ‘상상력’은 조정의 성리학적 사대부에겐 없었다. 그들에게 ‘바다’는 그저 ‘거친 파도의 멀미’로 괴롭히는 통제 불가한 ‘위험지역’이요, 기껏해야 왜구침략에 대한 ‘방어지역’에 불과했다. 이제 한반도는 ‘공도 정책’으로 사실상 해안선이 철책으로 꽁꽁 묶여 바다 진출이 아예 ‘법(法)’으로 차단된 실로 ‘육지의 철옹성’이 된 셈이다.
아이러니한 건, 이 ‘공도 정책’이 시행된 태종 16년(1416)은 저 명나라 정화(鄭和)의 ‘해상대원정(1405~1433)’*3이 성황리에 수행되고 있을 때였단 점이다. 지하에서 장보고의 원혼이 비감한 낙루에 애통해하지 않았을까? 그런데, 280년이 지난 1696년 5월, 돌연 안용복이 ‘2차도일’로 그 ‘철옹성’을 ‘훌쩍’ 뛰어넘은 것이다. ‘해도인(海島人)’인 장보고가 신라의 골품제에 막혀 ‘땅’에서 출세를 포기하고 ‘바다’로 나갔듯, 장보고와 비견될 기개와 숨은 재능을 지녔던 안용복이 천출(賤出)이라는 ‘운명적 사슬’에 도전해 ‘바다’를 택한 게 실로 닮았다.
AI생성 이미지이제 국법이 “멈추라!”하고 내린 지엄한 명령을 어긴 그 시점에서 드디어 안용복의 목숨 건 ‘위대한 도박’이 시작됐다. 그리고 마침내 1697년 2월, 에도막부와 진검승부에서 최후의 우승기를 거머쥐고 울릉도ㆍ독도에 그 ‘주권 깃발’을 꽂았다. 그게 오늘날 독도에 꽂혀 휘날리는 ‘태극기’다. ‘세계만방’을 향하여 “내 나라 땅이요, 내 나라 바다”라 외치며 펄럭이는 대한민국 주권의 다른 얼굴이다.
그렇다면 왜 안용복은 조선이 버려둔 울릉도ㆍ독도에 그토록 연연했을까? 그 주변 해역을 어민의 생존구역인 ‘어업(경제) 공간’으로 봐서였을 것이다. 옳다! 여기는 그때나 지금이나 ‘황금어장’이다. 조금 과장해서, 물고기가 ‘벌떼처럼’ 몰리는 곳이다. 옷이 없는 물고기는 수온에 민감해 어종별로 운명적인 ‘생활 적수온’이 따로 정해져 있어 이 수온대를 크게 벗어나면 급사한다. 예컨대 동해의 냉수(冷水)에 서식하는 명태나 대구는 대개 2~3℃이고, 남방 난수(暖水)에 서식하는 오징어나 방어는 15~16℃다. 공교롭게도 난수와 냉수가 서로 만나 경계를 이루는 곳이 울릉도ㆍ독도 근해다. 그 통에 이들 난수어ㆍ냉수어 어종이 몰려 호어장(好漁場)이 된다.
해류(海流)로 볼 때, 그 난수의 뿌리는 동해안을 따라 남방에서 거슬러 올라온 ‘동한난류(東韓暖流)’이고, 냉수의 뿌리는 북한 동해안을 따라 내려온 ‘북한한류(北韓寒流)’다*4. 이 성질 다른 해류가 만나는 곳을 흔히 ‘조경(潮境)해역’이라 하는데, 여기에 물고기가 집적(集積)한다. 울릉도ㆍ독도 근해는 조경해역이고 그래 ‘동해 어장의 심장부’가 된다. 수군 능로군이요, 어부(漁夫)인 안용복이 이걸 모를 리 없었을 것이다. 일본이 오늘날까지 목매듯 독도 주변 바다를 구걸(?)하는 것도 이 때문일 것이다.
어째거나 안용복은 현대적 시각으로 보면, 장보고 이후 최초로 바다를 ‘경제 공간’으로 본 ‘선각자’였고, ‘동해 어장의 심장부’를 지킨 ‘혜안’의 전략가였던 셈이다. 더구나 안용복이 일본 호키주(伯耆州) 태수와 맞서 “조선영토인 울릉도에서 채취한 ‘산삼’과 독도 근해의 ‘강구(물개 종류)’가 어찌 일본 것이냐?”고 따진 논리는 사실상 ‘수산해양학적 외교관’의 면모를 보였다고 해석된다. 그는 정치ㆍ외교적 전략이랄 수 있는 관복ㆍ선단ㆍ지리적 고증으로 일인(日人) 관료를 굴복시킨 것만이 아니라 실물 경제적ㆍ수산해양학적 지식을 토대로 국가이익을 대변했던 셈이다.
그런 안용복의 혜안과 기개로 200년간 독도에 깊이 꽂혔던 ‘주권 깃발’이 ‘바다’를 국력 신장의 앞마당으로 삼았던 일제(日帝)의 침탈과정에서 돌연 뽑히고 있었다. 그 과정을 계속해서 살펴보자. (4편에 계속)
*1성호 이익(李瀷, 1682~1763): 조선 시대 실학자. 성호사설(星湖僿說)의 저자. 이 저서는 총 30권 30책으로 구성됐고, 3권에 안용복의 업적을 기리고 ‘영웅호걸’이라 칭송했다.
*2공도(空島) 정책: 태종 16년(1416) 공포된 소위 ‘섬 비우기 정책’으로 ‘허가 없는 모든 원해(遠海) 항해’는 통제 대상이었다. 연안 조업은 묵인되거나 관리했지만 섬(울릉도 등)으로 향한 항해는 엄격히 금지됐다. 시야가 사라지는 소위 ‘수평선 너머’ 항해는 ‘도주’나 ‘월경(越境)’으로 간주해 극형(교형, 참형 등)에 처했다. 일반 백성이 감히 바다를 넘볼 수 없었다. 어민도 수평선까지 거리(약 4.7km) 안쪽에서나 조업할 수 있었다고 볼 수 있다. 사실상 바다폐쇄 국가가 되었다. 따라서 당시 안용복의 도해(渡海)는 ‘모반(대역죄)’에 준하는 극형 죄였다.
*3해상 대원정: 명나라(영락제) 초, 정화(鄭和)의 주도로 약 30년간(1405~1433) 수행된 대항해. 세계 역사상 가장 거대한 바다 원정의 정점(頂點)으로서, 7차 항해 동안 연인원 약 14만 명에, 참가 함선 매회 240~300여 척으로 명나라-동남아제국-인도-아라비아-아프리카에까지 총 항정(航程) 약 180,000km에 이른 것으로 알려졌다.
*4부산경제신문(인터넷판) 2025.8.7. “바다는 살아있는 생명체다_한반도 주변엔 어떤 해류가 있나?”
부경대학교 해양생산시스템관리학부 명예교수
홍철훈(해양물리학 전공)
hongch0692@g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