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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문가 기고]바다의 타임라인_1,200년 전 ‘장보고의 사료’ 다시 보기(1)
  • 기사등록 2026-03-17 15:56: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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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철훈 칼럼니스트 이번 호부터는 ‘바다의 타임라인(time line)’이라는 제하의 글을 쓰려 한다. 어제, 오늘, 그리고 내일을 잇는 바다 위 시계추 속에서 ‘바다를 지배했던 인물과 그 시대상’을 살피고 ‘미래 바다개척의 지혜’를 얻고자 해서다.

 

대개 아시듯, 필자는 지난해 본 칼럼 첫 기고문을 “바다를 경제 공간으로 활용하자”란 제하로 시작해, 첫 순번으로 엘니뇨를, 다음에 태풍, 쓰나미, 적조 순으로 소개했다. 「바다를 알아야 경제 공간이 된다」라는 관점에서였다. 그땐 ‘해양학적’ 시각이었다. 이번엔 ‘인문학적’이다.

 

먼저, 장보고(張保皐)’(미상~846)를 살펴보자. 그를 먼저 들어 올린 건, 그가 역사 속에서 ‘두 얼굴’로 기록됐단 점이 흥미로워서다. 그러니까 자국(自國) 신라는 그를 ‘천한 역신(逆臣)’이라 기록했는데, 당시 세계(당나라ㆍ일본)는 ‘바다의 성자(聖者)’라 경배해서다. 어떻게 이처럼 안팎으로 전혀 ‘딴판’일까? 실로 놀라웠다. 여기서는 그 연유를 살피고 1,200년 전 ‘장보고의 조감도(鳥瞰圖)’를 새로 그려볼 것이다.


‘유교적 정사(正史)’라 볼 수 있는 김부식의『삼국사기』‘열전(제44권)’은 장보고에 대해 “비천한 출신이나 용맹하다.”라 평하고 청해진(현 완도) 설치와 해적 소탕을 기록했으나 ‘신라본기’에서는 ‘왕위 다툼에 끼어든 반역자’로 마무리했다. 불교적 야사(野史)인 일연(一然)의 『삼국유사(권제2, 卷第2)』는 더하다. 아예 그를 ‘장보고’라는 이름 대신 ‘궁파(弓巴)’라 칭하여 미천한 출신임을 강조했고 감히 왕실혼인에 개입하려다 피살된 ‘반역자’ 혹은 ‘야심가’ 프레임에 가뒀다. 요컨대, 장보고를 바다로부터 부(富)를 축적해 중앙집권질서를 뒤흔든 ‘지방 역신(逆臣)’ 정도로 평가했다. 모두 정치적ㆍ서사적 기술에만 주목한 셈이다.

 

이렇게 ‘역신으로 박제(剝製)’된 장보고의 실체(實體)는 동시대의 당(唐)과 일본 문헌에서 화려하게 복원된다. 예컨대, 일본 승려 ‘엔닌(円仁)’이 당나라에 체류(838~847) 당시 기록한 현장 일기, “당(唐)나라 여행기(일당구법순례행기)”*1에는 장보고를 ‘해상 주권자’로 경외와 감사를 표하고, 장보고가 당에 건립한 ‘법화원(法華院)’의 규모, ‘신라방(新羅坊)’의 역동적 활동상, 그의 보호 아래 ‘안전 항해’를 했음을 상세히 기록했다. 이는 장보고의 당ㆍ일에서 ‘실질적 영향력’을 입증하는 귀중한 사료로 평가된다. 또 엔닌은 귀국 후, 장보고의 ‘법화원’을 모방해 교토(京都)에 현존하는 최고(最古)의 ‘적산선원(赤山禪院)’을 건립했고 그가 머물렀던 ‘연역사(延曆寺)’에는 장보고의 기념비 등 다수의 유물을 남겼다 한다. 게다가 일본 정사(正史), “일본삼대실록(日本三代實錄)”*2에는 일본조정이 장보고와 그 휘하를 ‘국빈급’으로 대우했다는 기록이 있어 당시 일본에서 그의 높았던 위상을 짐작게 한다. 더구나 장보고 사후, “이제 바다 건너기가 무섭게 되었다”라고 한탄하는 기록도 있어 당시 동아시아의 ‘안전 항해’를 담보했던 장보고의 ‘해상장악력’을 엿볼 수 있다.

 


한편, 장보고와 동시대인이었던 당나라 시인, 두목(杜牧, 803~853)이 저술한 ‘번천문집(樊川文集)’*3은 5대 제국(당ㆍ송ㆍ원ㆍ명ㆍ청)을 거치면서 끊임없이 필사본으로 전수될 만큼 중요한 사서(史書)로 알려졌는데, 여기서는 장보고를 ‘시대를 앞선 영웅’으로 극찬했고, 신라에 귀국해 해적을 토벌하겠다고 결연한 의지를 보인 장보고를 평가해, “성인(聖人)의 마음을 가졌다.”라고 기록했다. 실로 그 시대 최고의 당 지식인이 평한 인간 장보고의 ‘품격’이었다. 게다가 ‘신당서(新唐書)’(동이전 신라전)에는 장보고가 신라왕에게 “당 전역에 ‘신라인 노예’가 없는 곳이 없으니 청해(淸海)에 진을 쳐 해적이 못 잡아가게 하소서”라고 건의하는 내용을 기록해 ‘신라조정이 방치한 민초의 구원자’로 묘사했다.

 

흥미로운 건, 김부식은 ‘열전’ 말기에 돌연 중국에 “장보고 같은 이가 없음을 한탄한다.”라는 두목(杜牧)의 평을 덧붙였다. 공식 신라 사서인『삼국사기』‘본기’와 ‘열전’에 일관성 없는 대목이다. 실은 김부식도 내심 ‘장보고의 위대함’을 인정해서였을 것이다. 이처럼『삼국사기』 행간에 숨겨진 장보고에 대한 ‘역신과 성인’을 오가는 이 ‘사학적(史學的) 망설임’이야말로 장보고를 새로 ‘조감(鳥瞰)’할 실증적 증거가 아닐까?

 

그렇다면 신라는 장보고를 ‘역신(逆臣)’이라 버렸는데, 왜 당나라와 일본은 ‘성자’와 ‘바다 수호신’으로 추앙했을까? 그 답은 장보고가 일군 ‘거대한 무역 바다’ 속에 숨어 있다. 역사의 눈은 때로 육지에 갇혀 바다의 진실을 못 본다. 그러니까 바다를 ‘개방경계’로 본 당나라ㆍ일본은 ‘장보고의 바다 위업(偉業)’에 탄복했으나 그 바다를 ‘폐쇄 경계’로 본 신라는 이를 ‘경시(輕視)해서다. 결국, 그런 ‘바다 천시 시각’의 고착화(固着化)로 장보고 사후, ‘바다를 닫은’ 신라ㆍ고려ㆍ조선의 한반도는 1,200년간 ‘사대(事大)’란 이름으로 ‘북방대륙의 굴레’에 철저히 갇히고 말았다. 오늘날 ‘바다 종사(從事)’를 천시하는 풍조도 이에 연(連)할 것이다. 같은 반도국(半島國)이라도 ‘로마’는 바다를 제패해 마침내 전 유럽을 석권한 후 서양문명의 뿌리가 되었는데. 참으로 애석한 일이다!


필자는, 오늘날 부산이 사실상 ‘청해진’이라 본다. 그런 뜻에서, 이제 장보고의 사료에 1,200년 동안 쌓였던 ‘낡은 먼지’를 털어내고, 9세기 바다로 뛰어들어 동아시아의 바다 운명을 바꿨던 ‘진짜 장보고’를 ‘육지의 눈’이 아닌 ‘바다의 눈’으로 복원해 보자(2편에 계속).


*1입당구법순례행기(入唐求法巡禮行記): 9세기 헤이안(平安) 시대(794년~1185년)에 활동한 연력사(延曆寺, 엔랴쿠지)의 일본 승려 엔닌(円仁, 794~864)이 저술한 일기로, 당나라에 9년간(838~847) 머무르며 귀국하기까지 행적을 기록한 책이다. 

*2일본삼대실록(日本三代實錄)은 헤이안(平安) 시대의 日서 편찬된 역사서로, 천황 세이, (清和天皇), 요제이(陽成天皇), 고코(光孝天皇)에 이르는 3대의 재위기(858.8~887.8) 약 30년간을 기록하였다. 

*3번천문집(樊川文集): 唐 시인, 두목(杜牧, 803~853)이 쓴 서사(書史). 원본은 필자가 건강상 이유로 대부분 불태워 사후 조카 배연한(裵延翰)이 재수집한 것을 송대(宋代)에 정비하고, 이후 원, 명, 청을 거쳐 끊임없이 필사되고 간행된 ‘생명력이 긴 저서’다.


부경대학교 해양생산시스템관리학부 명예교수

홍철훈(해양물리학 전공)

hongch0692@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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