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열 화명고등학교 교장
이상열 화명고등학교 교장
여기는 아주 오래전 선사 시대부터 사람들이 큰 물가에 모여 살며 사람과 사람이 함께 지켜나갈 오륜(五倫)을 다 갖춘 모습으로 마을 이루고 드디어 작은 나라를 이루고 살았던 유서 깊은 오륜마을이다. 이 마을을 중심으로 수원지가 생기고 대도시 부산에 식수와 공업용수를 공급해 주는 고마움뿐만 아니라, 볼거리와 먹을거리는 물론 건강과 힐링 효과를 더해 주는 명소가 되었다.
지난 세월 사대부들이 찾아와 계곡 물가에 앉아 탁족회(濯足會)를 즐기며 시화(詩畫)를 나누었던 풍류는 물론 사라진 지 오래지만, 옛 산천의 풍광은 그대로 남아 있다.
부산의 비상 급수원 회동수원지는 금정구 회동동, 오륜동과 선동으로 이어지는 꿈길 같은 걷기길 이다. 따가운 햇볕을 피할 수 있는 우거진 숲과 한순간도 시선을 돌릴 수 없게 만드는 뛰어난 풍광은 조선시대에도 유명했다고 동래 부지(1740년) 등의 역사는 전한다.
전체 구간을 다 걸어서 돌아보면 11.9km 거리로 약 3시간 정도 소요되지만, 보통 그 절반 정도 코스를 많이 선호한다. 호숫가 취수장 옆에 우뚝 솟은 절경 오륜대, 오륜 본동의 땅뫼산 황톳길, 맑은 물을 공급해 주는 사천(絲川), 오륜대 고분군, 한국순교자 박물관, 수원지 둘레길 등 눈과 다리가 함께 즐거워할 만한 풍광을 품고 있다.
오륜 본동의 ‘땅뫼산’ 황톳길 걷기 코스는 초여름 쉬땅나무꽃이 흐드러지게 피는 계절에 코끝을 호강시키며 약간 젖은 황토를 맨발로 밟아보는 감촉은 가히 군자가 느끼는 최고의 호강이리라! 조선 선비들이 그렇게 숭상하던 기상만큼이나 치솟은 오륜대 암석 봉우리는 푸른 호숫물에 그림자로 흔들리고 여기저기 날아다니는 중대백로와 쇠백로 그리고 왜가리 어쩌다 틈새에 끼어드는 해오라기까지 번잡한 일상에 생채기 난 사람의 영혼을 위무해 준다.
오륜 본동 수변공원 데크길에 안개라도 낮게 깔리는 날이면 신선이 나 인양 내가 신선 인양 몽환적인 분위기에 시 한 수를 절로 흥얼거린다. 말이 된들 어떠하며 말이 안 된들 어떠하리! 안개처럼 쉬이 사라지는 인생을 잠시라도 잡아두려 읊조리는 한 자락 노래인 것을 누군들 탓할 수 있을까 보냐!
본동을 지나 취수장 방면으로 이어지는 좁은 마을버스 길을 따라 걷다 보면, 작은 하천 건너편에 보랏빛 열매를 깨알같이 품고 있는 작살나무를 만나게 된다. 보라색 작살나무 열매는 으스스 추운 겨울과 이른 봄철에 제멋이다. 온 산은 헐벗어 암울한 회색인데 작살나무 저 홀로 찬란하게 짙은 보라색 열매를 영롱하게 뽐내며 하천의 졸졸 흐르는 물소리에 귀 기울이려 비탈진 아래쪽으로 온몸을 구부리고 늘어져 있다. 아차, 저러다 떨어지면 어쩌려고 저러는지 길손의 마음도 작살나무 열매를 떠나지 못한다.
여름부터 늦가을까지 자작자작 물기라도 있는 곳이라면 어디서나 물봉선화가 특유의 점박이 빨강 꽃을 피우고 지고, 꽃이 부족하다는 한여름을 골라 화려하게 참나리가 풍성한 진홍색 꽃을 피우는 길이다. 늦가을이 아쉬운 오륜동에 샛노란 은행잎이 취수장 가는 길을 캔버스 삼아 반추상화를 그린다. 시샘이라도 하듯 등나무가 굵직한 줄기를 휘영청 드리운다. 좌로 기어올라 칡넝쿨 우로 기어올라 등(藤)이라, ‘갈등(葛藤)’을 엮어주는 취수장 울타리를 지나 이제 회동수원지 둘레길로 접어든다.
오륜대 취수장에서 출발하여 상현마을로 구불구불 이어지는 산길을 따라 이른 봄에는 ‘흰달’ 소월(素月) 시(詩)를 닮은 진달래가 피고, 4월쯤이면 봄부터 차나무과 사스레피나무가 좁쌀 같은 우윳빛으로 노랑 꽃을 조잘거리며 피운다.
늦봄에 찾은 회동수원지 걷기 길에는 때죽나무꽃이 찾는 이들을 위한 꽃길을 항시 준비하고 기다린다. 새하얀 때죽나무꽃은 하늘에서 떨어진 별처럼 신비하여, 황순원님의 ‘소나기’에서 막 튀어나온 듯한 순애보의 애틋함을 불러일으킨다. 그래서 함부로 즈려밟기 망설여진다. 혹시 작은 계곡에라도 떨어지면 물고기가 ‘떼죽음(사실은 기절)’한다고 붙여진 이름이다.
둘레길 초입부터 쉬이 만나는 땅비싸리의 짙은 분홍색 꽃은 허리를 굽혀 자세를 낮추어 보아야 제격이다. 둘레길 끝까지 쉬엄쉬엄 자주 만나는 이 꽃은 더위를 아랑곳하지 않는 여름꽃이다. 싸리꽃 같은데 싸리가 아니고 낭아초(狼牙草)꽃을 빼닮았지만, 늘 낮은 곳에 몸을 낮추어 임하니 시기를 받아 쓰러질 일 또한 없다.
둘레길이 끝나고 수원지 둑이 제법 길게 뻗어 있는 지점과 일명 ‘미라보 다리’라 필자가 이름 지은 다리 건너편에는 한여름에 군데군데 뚱딴지꽃이 노랑 해바라기 동생으로 태어난다. 노랑 해바라기를 닮았으나 크지 않고 키는 해바라기를 넘어서는 이미 토종화 되어버린 외래종 식물이다. 4월의 이 둑길은 벚꽃이 만발하여 멀리 웅장한 듯 단정한 오륜대 경치를 배경으로 사진 찍기 바쁜 아베크족들로 붐빈다.
상현마을에 들어서면 누구든지 ‘향나무 길’을 반드시 걸어가게 된다. 모 재벌 그룹 회장의 별장인지 아닌지 그것은 크게 중요하지 않다. 잘 다듬어진 향나무 생울타리는 동화 속 장면이나 영화 속 장면을 연상시켜 주기에 충분하다. 정성으로 가꾸어진 유연한 곡선을 품은 향나무 울타리 너머에는 딴 세상이 펼쳐질까?
맛집들로 북적이는 바로 이 선동 상현마을에서 만나는 모그룹 회장의 별장에는 용이 되어 하늘을 기어오르는 형상을 한 향나무 울타리가 K 드라마 속의 한 장면을 떠오르게 하며 많은 이들의 스냅사진 찍는 코스가 되었다. 그냥 도보로 걸어가면서 나 스스로 낭만을 느끼면 그것으로 충분할 것이다. 울타리 너머의 세상을 굳이 알고 싶지 않을 뿐이다.
가을 늦은 날에는 붉나무의 빨강 단풍이 산길 구석구석을 발갛게 물들이고 소금기 가득한 열매가 익어간다. 찬바람 강한 겨울철에는 물가에 제법 두꺼운 얼음이 얼어 쩡쩡하고 시베리아 칼바람 소리도 낸다. 부산에서 잘 만나기 힘든 큰 얼음덩어리를 보여준다. 넓은 물덩이가 얼어서 내는 희한한 야릇한 소리를 기억하는 사람들이 많지는 않지만 여기서 경험해 볼 수 있으니, 독자분들도 한번 도전해 보기 바란다.
상현마을을 지나 ‘안간천’ 상류를 향해 자전거 길로 접어들면, 미물(微物)이라도 초여름을 어찌나 잘 기억하는지 낙화암 같은 절벽 옆으로 참나무 도토리거위벌레가 쑹덩쑹덩 잘라낸 참나무 잔가지가 걷기 길을 덮을 때쯤이면 멀리서 울던 뻐꾸기 소리도 잦아드는 완연한 여름이 온 것이다.
이제 우거진 편백과 벚나무 터널 길을 따라가면, 옛날 70년대 읍내 막걸리 점방 40대 후반의 어리숙한 작부에게서나 풍길법한 향 짙은 동동구리무 분 냄새같이 코끝을 자극하는 광나무꽃이 무더기로 피어나는 숲을 지나고 곧이어서 이제 필자가 ‘뽕뇌프 다리’로 부르는 상현마을 오래된 외나무다리를 닮은 시멘트 인도교를 지나 선동마을로 걸어가 보자.
야생 호두를 닮은 가래나무 추자 열매가 후두둑 떨어지는 초가을에 회동수원지 안간천 쪽 상류를 찾아가면 모래밭 여기저기 야생 방울토마토를 닮은 까마중이 짙은 보라색 열매를 바글바글 달고 모래밭에 흩어져 아쉬운 햇볕을 즐기고 있다. 한 움큼 따서 입에 넣어보면 어린 시절의 향수가 새록새록 솟아나 홍법사까지 내리 걸음을 재촉한다. 안토시아닌이 풍부하여 항산화에 도움이 된다고 하는데 시험 삼아 몇 개 따서 입맛이라도 볼까나!
아주 이른 봄철 산수유나무의 꽃은 갓 깨어난 병아리처럼 누구에게든지 삶의 생기를 돋구어 준다. 물론 늦은 가을철 산수유 열매는 이곳을 즐겨 찾는 사람들의 눈을 즐겁게 해주기도 하지만, 온갖 날짐승들의 요깃거리로 ‘몸 보시’하기도 하는 해탈의 열매이다. 그러니 산수유는 절집에서 스님들이 즐겨 심어 길렀나 보다!
여름철 홍법사 뒤편 ‘안간천’은 화려한 합환수(合歡樹) 자귀나무 꽃길이 야릇한 분내보다 더한 향기로 옛 추억과 잃어버린 고향에 대한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계절이다. ‘안간천’변 널따란 풀밭으로 온통 수크령이 굵다란 보랏빛 감도는 꽃을 피우고 남성을 자랑하니, 참으로 ‘숫 그령’답다. 그령처럼 생긴 풀이지만 남성(男性) 성(性)이 강한 굵은 꽃대를 올리니 붙여진 이름이 ‘숫그령’이고 변해서 수크령이 되었다.
안간천의 물길의 고향은 법기다. 법기수원지를 출발하여 임기천과 만나고 다시 송정천과 만나 안간천이 되어 회동수원지로 들어가서 드디어 철마천과 합쳐지고 수원지를 지나 수영강이 된다. 제법 긴 여정의 끝에서 수영과 해운대 바다에서 만나니 부산의 동해안 쪽으로 흘러 들어가는 좌광천과 함께 뿌리가 이웃한 동지로 해후하는 것이다.
반대로 상현마을에서 강릉김씨 재실 방면으로 버드나무 양옆으로 축축 늘어진 오래된 ‘미라보 다리’를 건너면 철마로 이어지는 철마 천(川) 방면 회동수원지 상류를 따라 한적한 신작로가 나 있고, 경치 빼어난 지점쯤에 하천을 가로지르는 출렁다리가 새로이 단장하고 길손을 부른다. 제법 굵은 적송 숲이 건너편에서 울창하고 이편에서는 메마른 땅에도 번성하는 노간주나무가 향 짙은 열매 두송실(杜松實)을 무더기로 매달고 있다.
물가에 늙은 채로 왕버들은 군데군데 생채기를 보듬으며 자기 몸 한쪽이 푸석푸석 썩어가도록 내어주고 나서야 나머지를 지탱해 나간다. 어쩌다 비 내리고 어둑어둑한 날 밤엔 마치 도깨비불이라도 된 듯 형광 불빛을 내뿜으며 전설을 주절주절 쏟아내기도 한다. 지나가던 술에 취한 옛 촌로가 그 도깨비불과 씨름하다가 물에 빠져 저세상으로 갔다는 둥 온갖 전설 같은 소문을 낳곤 했다.
돼지감자로 잘 알려진 뚱딴지와 망초, 개망초는 차라리 우리 고유종처럼 행세하고 온 천지에 퍼졌고, 가시박, 단풍잎돼지풀, 가시상추 같은 별로 반갑지 않은 신입 외래종 풀들도 언제부터인가 여기까지 침투하여 번창하고 있으니, 처음부터 고유종이란 원래 없는 것일까? 호박이 그렇고 감자가 그렇고 고구마가 이미 그러하다. 시간이 지나면 다 고유종으로 변하는 것일까? 그런데 우리 민족은 역시나 뛰어난 적응력으로 이들을 모두 나물로 만들어 버렸다. 그리하여 재배되지 않은 천연 산채를 건강식품으로 만들어 건강도 챙기며 그들의 지나친 번창을 억제하고 있다. 마늘과 쑥을 먹은 곰의 후손다운 발상의 전환이다. 생태 보고인 회동수원지에도 벌써 다양한 외래종 생태교란종들이 점령해 들어오고 있지만, 우리의 저력으로 잘 극복해 나가리라 믿어본다.
대도시에 속하지만 그래도 아직 자연이 살아 있고 그 속에 다양한 들꽃이 여전히 우리를 맞이할 준비를 다 하고 기다리고 있는 회동수원지로 들꽃 기행을 떠나보았다. 회동수원지에서 사시사철 풍성한 들꽃은 목마른 사막의 오아시스처럼 우리에게 맑은 물을 흘려보내 결국은 신의 음료 박카스 같은 힐링으로 존재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