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 메일전송
기사수정

김문길 교수는 교토대학 시절 귀 무덤 가까이 살았고 자연스레 귀·코무덤에 대해 조사 연구하게 되었으며 논문을 발표한 후 각 언론으로부터 집중 조명을 받았다.


임진 정유 왜란(전쟁) 귀 베기 코베기 전쟁이다. 한일문화연구소 소장 (부산외대 퇴직 교수)은 전쟁 때 조선인의 귀 코를 전리품으로 베어가 묻어놓은 곳을 독보적으로 찾아 연구하는 교수다. 일본에서 5곳이나 찾아 연구한 기막힌 사연과 희귀한 사료로 강연했다. 


 임진 정유 전쟁 때 베어간 경남 부산사람 8,500명과 문화인(도공 한의사들) 200여 명에 대한 역사적 사실을 알렸다.


대마도에 조선인 귀 무덤은 아직 표지판도 없고 다만 돌 몇개 쌓아 둔 것이 전부 문헌만 있고 대마도 연구자와 몇몇 노인들이 참배 하고 있다.


이런 숨은 기막힌 현장 이야기로 사료를 공개하고. 전쟁 때 포로로 간 조선인 3000여 명이 귀환했지만, 선조임금 공주 이연은 끝내 돌아오지 못하고 그 무덤의 가까운 대마도에 경남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왜 못 돌아왔나? 가까운 대마도에서 일생을 보냈다는 억울한 슬픈 사연이 있다. 많은 관광객이 가지만 공주의 무덤은 모르고 있다. 이번에 특강에서 김 교수는 공개했다.


임진 정유 전쟁 때 경남 전라 해안에 일본군 주돈지 왜성(倭城)이 32곳이나 있고. 왜성을 집중적으로 연구한 김문길 교수는 마산에도 왜성이 있어 연구했다.

왜성은 왜 지은 것일까? 


왜성은 장기적인 전쟁을 계획하고 2차. 진주성 실패로 정유 전쟁을 계획하면서, 명나라진입과 방어를 막기 위한 계획으로 아군의 이탈과 강 왜(사 야가 왜장 집단 항복 조선군의 입군)를 막고 조선인 문화재 약탈 보관, 조선인 귀 코를 보관하기 위해 단시일 내 성을 축성했다. 석축 돌 인원 조달은 포로로 잡은 조선인의 힘으로 3개월 만에 완성되었다. 


지금의 마산 6, 25 충혼 탐이 세워져 있는 장소가 왜성(天守閣) 자리다.

지금도 충혼탑 입구 석축(이시각키)은 420년 왜장 나베시마가 축성한 것입니다. 충혼탑만 설명하고 있지 임진 정유 전쟁 때 왜성을 허물고 탑을 세웠다는 표지판이 없다. 이것이 문제다. 6, 25 충혼탑도 반듯이 있어야 하지만 임진왜란 전쟁 때 왜군이 지은 성의 충혼탑이라고 알려야 한다며 후세에 교육과 우리 세대로부터 후세대는 검은 역사를 모르고 살아 간다면 장래는 밝지 않다고 말했다.

 

당시 왜성의 크기와 규모는 대단했다. 설계도를 보시면 아시다시피 어마어마한 면적이다.

이런 교육장을 표시판을 세우고 석축 돌을 분실되지 않도록 관리하고 6.25 충혼탑 방문견학 때 임진왜란 전쟁의 아픔도 체험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장문석 마산문화원 원장은 이번 특강을 통해 대마도와 대한민국과의 역사에 관련하여 새로운 사실을 알리고. 우리 지역인 마산과도 관련이 있는 역사적 자료로 지역민들에게 알리는 소중한 계기가 되었고 말했다.

0
기사수정
  • 기사등록 2023-04-07 08:19:38
기자프로필
나도 한마디
※ 로그인 후 의견을 등록하시면, 자신의 의견을 관리하실 수 있습니다. 0/1000
오늘의 주요뉴스더보기
부산은행
부산광역시 상수도사업본부
동양야금공업
원음방송
모바일 버전 바로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