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우상 명리학자. 역사소설가
누구보다도 부지런하고 성실한 신혼 부부가 있었다. 그들은 자신들의 계획을 달성하기로 결심했다. 50세가 되면 퇴직을 하고, 평소에 간절히 염원했던 해외 이민으로 온 가족이 남은 여생을 행복하게 살아간다는 계획이었다. 두 사람은 이 꿈을 위해 돈을 모을려고 악착같이 부업도 하면서 하루 종일 일에만 매달렸다. 너무나 바빠서 어떤 날은 부부간에 대화도 나누지 못한 날도 있었다.
그렇게 해서 돈을 모아 꿈에 그리던 이민을 가게 되었다. 한가롭게 지내는 생활에 익숙하지 않는 두 사람은 하루종일 서로 얼굴을 쳐다보고 무료하게 시간을 보냈다. 그러다 보니 부부간에 자주 거친 말다툼이 오갔다. 더 이상 견딜 수 없다고 생각한 두 사람은 결국 고국으로 돌아오고 말았다.
그제야 두 사람은 한 가지 사실을 깨달았다. 평소에 여유를 누려보지 않는 사람이 한가한 생활을 견디어 내겠는가? 이런 깨달음을 알고 고국으로 돌아온 두 사람은 다시 일을 시작했다. 일을 하면서도 가끔 시간이 날 때면 같이 영화관에 가고 공원이나 야외로 산책을 가기도 하면서 두 사람은 여가 생활을 즐겼다. 지금까지 이렇게 살아야 한다는 것을 아무도 이들에게 가르쳐 주지 않았다. 그것은 목표를 달성하려면 오락이니 취미 따위는 잠시 희생해야 한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오로지 돈만 번다는 목표를 달성하면 행복을 저절로 굴러온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요즘엔 여행을 가기 위해 높은 연봉을 주는 회사를 사양하는 젊은이들이 적지 않다. 사실 이들은 단순히 여행을 가는 것이 아니라 일정기간을 집시족으로 살기로 결심한 사람들이다. 그들은 산이나 바다로 또 아프리카 등 세계의 생소한 지역으로 여행을 떠난다. 사람의 발자욱이 묻어 있지 않는 외딴 섬으로 들어가서 상상도 못할 곳에서 새로운 것을 체험하기도 한다. 또 여행의 경험과 느낌을 기록하여 기행문 책을 출판할려고 준비하는 사람도 있다. 많은 사람들은 이렇게 묻는다 “여행을 가는데 좋은 직장에 사표까지 내고 높은 연봉을 포기할 필요가 있나요?“ 그들은 이렇게 대답할 것이다. ”열심히 일하는 것은 아름다운 인생을 누리기 위해서가 아닌가요? 그러니 후회하지 않아요.“ 그들의 말이 맞다. 누구나 하루종일 정신없이 바쁘다가 한가해지면 오히려 멍청해지는 경험을 해 보았을 것이다.
젊은시절을 헛되게 보내지 말라. 돈은 다 쓰면 다시 벌면 된다. 그러나 청춘이 가 버렸을 때 지혜가 전해 성숙해지지 않았다면 그것이야말로 헛되게 산 것이 아닐까 싶다.
매일 아침 사찰 법당 앞 마당에 떨어진 낙엽을 쓰는 일은 어린 행자의 몫이었다. 매일 추운 새벽에 일어나서 낙엽을 쓰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더욱이 가을에서 겨울로 들어가는 때는 바람이 한번 불 때마다 나뭇잎이 우수수 떨어졌다. 아침마다 낙엽을 다 쓸려면 오랜 시간이 걸렸다. 쓸고 뒤돌아 보면 또 떨어지고 해서 그는 어떻게 하면 조금 수월하게 낙엽을 쓸어낼 수 없을까 곰곰히 생각하고 있는데, 젊은 스님이 방법을 하나 알려주었다. ”매일 아침 빗질을 하기전에 먼저 나뭇가지를 힘껏 흔들어 보세요. 낙엽이 모두 떨어지면 그 다음부터는 그렇게 힘들게 낙엽을 쓸지 않아도 될 겁니다.” 어린 행자는 정말 좋은 방법이라고 생각하고, 이튿날 이른 새벽에 일어나 나뭇가지를 힘껏 흔들었다. 어린 행자는 하루 종일 기분이 좋았다. 그런데 다음날 새벽, 법당 마당에 나가 본 어린 행자는 뜻밖의 광경에 어안이 벙벙했다. 법당 마당에는 평소와 똑 같이 낙엽이 곳곳에 떨어져 있었던 것이다. 주지 스님은 다가와서 울상이 되어 있는 어린 행자를 보고 그 연유를 물었다. 사연을 알게 된 주지 스님은 의미 깊은 말을 한마디 던졌다. “네가 오늘 아무리 힘써 낙엽을 쓸어도 내일은 내일의 낙엽이 여전히 떨어질 것이다.”
그제야 어린 행자는 한 가지 이치를 깨달았다. 세상의 많은 일들은 순서가 있는 것이다.
그 순서를 어기고 억지로 일을 끝낼 수는 없다. 모든 세상 일에는 일정한 순환법칙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이다. 「우리의 과거는 다시는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의 미래는 전혀 보이지 않는다. 그러므로 과거와 미래 때문에 걱정하고 괴로워 할 필요는 없다. 지금 현재를 열심히 살면 되는 것이다」 ‘소피노자’의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