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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호에 이어 계속

 

구산 장동균, 실증 고조선본토기 저자
세월이 지나면서 그 후유증으로 진(秦)나라도 망하고 뒤를 따르던 한(漢)나라도 망했다. 그리고 초기 조선과 진나라와의 국경선을 가르던 갈석산도 요동만에 있던  진번조선의 옥토와 함께 바닷속으로 사라진것이다.

 

이때 사방 500여리의 조선 옥토가 요동만으로 사라진 사실은 장기간에 걸쳐 진행된 사건이기때문에 아는사람은 많지 않다. 한나라는 조선과 싸워 승전했음에도 공로로 상을 받은자는 없었고, 고위 장수와 책사들이 거의 사형을 받았다.

 

수나라는 고구려를 건드렸다가 골육상쟁을 이르켜 황제는 살해되고 형제간의 암투로 모두가 망했다. 당나라 역시 태종의 죽엄으로 천벌을 받은 것이다. 아비와 아들을 한몸으로 섬겼던 측천무후는 나라의 이름까지도 갈아치우는 맹위를 떨쳤다.

 

그러나 그 침략자들은 아직도 개과천선은 고사하고 사서들을 조작하여 동북공정을 추진하고 있는것이다. 이곳의 위치는 발해해협의 묘도군도다.

 

지도에서 1,2,3,4번까지의 네 별은 선기옥형(旋璣玉衡)이라 부르며 그 위치에는 환웅님의 신시 이후 단군의 조선, 기자와 기준의 낙랑조선과 위만조선, 한사군 초기에 낙랑군, 평양성등이 있었고, 5,6,7번 자리에는 진번, 임둔, 현도군이 있었다.

 

그리고 현재 까지도 북황성도와 남황성도라는 지명이 전한다.그러나 동황성이라는 성은 고국원왕이 선비족들의 침략을 피하기 위해서 장도지역으로 이동하여 만들면서 생긴 성으로 보인다.

 

평양성은 기원 427년 장수왕이 평양성으로 천도한 이후 기원668년 당나라에게 망할때까지 고구려의 수도였다. 패전후 안동도호부가 들어섰으나. 지진으로 669년 안동도호부가 요동성으로 쫓겨간 이후 한때 신라가 점유하였던 곳이다. 이곳은 장도다.

 

장도는 반복되는 재앙으로 패허로 변한 후 약 200여년간의 세월동안 당나라와 송나라등의 죄수들의 유배지와 여진족들의 양마장등으로 이용되기도 하였다.

 

오호16국시대에 들어서 기원 918년 왕건에 의해서 고려국의 건국지가 되었고, 왕건은 평양을 재건하기 위해서 외부에서 이민자들까지 모아 이주시켰다.

 

장도 평양성은 고려가 개성(봉황성)으로 천도하면서 서경이 되었고, 당시 동경을 경주로 부르던 요동의 봉황성으로 정하고, 황경(皇京)은 관전(寬奠)에 신설되었다.

 

많은 독자님들중에는 지금까지도 서경을 현재의 평양으로 알고 있는 분들이 많겠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았다는 사실을 차차 아시게 될것이다.

 

기원전 82년에 진번과 임둔군이 패기되어 진번군은 낙랑군으로, 임둔군은 현도군등으로 합병된다. 다시 기원전 75년에 지도의 5,6,7번의 주민들이 수복을 위한 저항을 계속하여 현도군을 800여리 북쪽 무순지방으로 몰아내고 졸본부여 세력들인 비류국이 점거하고 있었는데 주몽이 나타나서 개주의 서쪽 위치에 있던 졸본부여에 고구려를 세우게 된다. 이것이 고구려가 북두칠성의 탯줄을 끊고 태어난 천손족임을 강력하게 주장하던 이유였다.

 

중국의 사서들까지도고구려인들은 귀신을 섬기고 또 신령스러운 별들과 사직에 제사지낸다고 적고 있다. <祭鬼神, 又祀靈星·社稷>그럴만 한 이유가 있었든 것이다.

 
우리역사상 북두칠성을 가장 숭상했던 나라는 고구려였다. 고구려는 북두칠성을 나라의 징표로 삼고 깃발을 만들어 고분에 장식하는가 하면 임금 스스로 자신을 북두칠성의 화신으로 생각하여 국강이라 하였다.

 



주술성이 실린 북두칠성을 괴강이라고 하는데 괴강의 괴자는 신의 능력을 나타내는 鬼(귀)자와 북두칠성을 의미하는 칠성두(斗)자가 결합된 문자다. 그러니까 칠성의 신명에 잡혔다는것입니다. (북두칠성 연구가이신 노중평 님의 해설을 일부인용)

 

따라서 '괴강'을 '국강'으로 고쳐 부른 분은 광개토대왕이다. 그의 비문에 그를 지칭하는 '국강상'이라는 시호가 새겨져 있으나 이 시호는 생전에도 사용하던 휘호인지는 상세히 알수 없다. 국강이란 사정(四+正)을 바르게 한다는 공평을 뜻하는듯 하다.

 

북두칠성의 천추,천선,천기,천권등 네 별로 둘러쌓인 사각형의 공간을 선기옥형(旋璣玉衡)이라 부르는데 이곳에 삼신산이 위치하고 신시는 아사달의 터전을 일구었다.

 

또한 일본인들이 본래의 칠성'강'자를 언덕'강'자로 왜곡시켰다는 노중평님의 주장은 나름대로의 타당성이 있는것이다.그것은 칠성'강'자를 사용할때 묘도군도의 위치가 발견되기 쉽기 때문이라고 본다.

 

노중평 님은 국강상광개토경평안호태왕(國岡上廣開土境平安好太王)의 시호 문구중 원래 강(?)자가 있었야 하는데, 강(岡)자를 일본인들이 변조한 것이라 하였다.

 

왜냐하면 강(?)은 칠성강자라는 의미로 광개토대왕이 북두칠성에서 태어났다는 뜻이며, 강(岡)은 북두칠성의 성기(星氣)가 꽂히는 언덕, 다시 말해서 북두칠성이 떠오르는 동북간방에 위치한 산을 말하는 것이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따라서 광개토왕(廣開土王)의 성기(星氣)를 누르기 위하여 일본인들이 광개토왕비문(廣開土王碑文) 내용을 변조 하였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일본인들이 우리나라의 맥을 끊고자 쇠말뚝을 박은 사실이 있는 것으로 볼때 노중평 님의 주장은 일리가 있다고 본다. 또한 어떤 사람은 노중평 선생의 주장보다 더 나아가 일본 사학자(史學者)들이 국강상의 ‘북두칠성 강(?)’을 ‘언덕 강(岡)’으로 고쳐서 쓰는 이유를 일본 천황(天皇)의 상징인 ‘북두칠성’을 고구려(高句麗) 태왕이 쓰는 것은 기휘(忌諱: 거리낌)에 해당하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그래서 엄연히 광개토왕비문(廣開土王碑文)에 국강상이라고 기록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북두칠성 강(?)’을 ‘언덕 강(岡)’으로 고쳐서 교과서를 비롯한 모든 사서(史書)에 기록하여 노골적인 왜곡(歪曲)를 단행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고려때 이승휴가 지은 제왕운기(帝王韻紀)에는 마치 다빈치코드같은 두여<斗與>라는 대목이 있다. 오늘날까지도 제대로 풀리지 않고 있는 두여(斗與)라는 대목은 번역자들에게는 대단히 곤혹스러운 시어(詩語)였다.

 

틀림 없이 '斗'字는 북두성을 의미하는 상징 글자인것 같기는 한데 한반도를 모델로 대입시켜보면 해석이 불가능한 용어이었으니까.

 

그런데도 삼면이 바다라는 공통점 때문에 한반도가 묘도군도의 대역으로 해석된것이다. 한반도가 어떻게 일곱개의 별인 북두칠성이 될 수 가 있겠는가? 하마터면 영영 잊혀질뻔한 묘도군도였다.

 
遼東別有一乾坤 (요동별유일건곤) 요동에 따로이 별천지가 있으니

斗與中朝區二分 (두여중조구이분) 북두성과 더불어 조,중을 두개로가른다.

洪濤萬頃圍三面 홍도만경위삼면) 큰파도 수 만 이랑은 삼면을 둘럿고

於北有陸連如線 어북유륙연여선) 북쪽의 육지로 끈처럼 이어진다.

中方千里是朝鮮 (중방천리시조선) 이사이 중방 천리를 조선이라하니

江山形勝名敷天 (강산형승명부천) 강산은 절경이라 그 이름 천하로 퍼지네.

                                           이승휴저 <<제왕운기>>1에서


이 외에도 북두칠성을 위주로 발생하는 과학적인 분석과 신화가 끼친 결과는  삼신사상의 영향을 받은 도교와 불교, 유교, 칠성교.그리고 소도를 운영하던 영향으로 무교가 성행하였음을 본다.

 

끝으로 많은 독자님들께서 궁금이 여기실 지금의 묘도군도의 형성은 본래는 요동반도와 산동반도가 산맥으로 연결이 되어 있었으나 지진으로 무너져 내려 남은 여봉으로 이루어 진 것이라고 《중국고금지명대사전》은 전하고 있다. 생성 당시에는 현재보다 넓은 면적을 가지고 있었으나 수차에 걸친 지진으로 계속하여 줄고있는 실정이다.

 

본래 발해 내해에는 바다가 아닌 큰 강들만 흐르고 있었다는 지도가 따로 전하고 있다. 묘도군도는 2009년까지도 한국인들의 출입이 통제를 받는 금단의 지역이었다.

 

사서들의 기록중에는 별유(別有)와 별종(別種)이라는 알쏭달쏭한 기록들이 보이는데 이 '별유'라는 용어는 동해에서 별도로 떨어진 발해를 이르는 말이라는 근거가 《初學記》에서 발견되었다.

 

(1) 고구려인을 소수맥 또는 부여의별종, 말갈인을 고구려의 별종, 백제인을 부여의 별종,이라 하는것은 이들이 모두 발해 내에서 출발하였다는 힌트가 되겠다.

 

따라서 《제왕운기》에서 <요동별유 일건곤(遼東別有一乾坤)>이라고 하는것은 발해를 은어처럼 표현한 암호같은 표현이었다. 원나라는 고려의 출판물들을 까다롭게 간섭하였다는 단재선생의 글을 참고하였다.

 

 

초기 한사군 배열도와 하늘호수를 이루고 있던 뚝 즉, 장백산맥이 무너저 북두칠성도가 생성된 모습

또《부도지》14장에는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북극성(北辰)과 칠요(七耀)2)의 위치를 정하여  반석의 위에서 속죄의 희생물을 구워 제사(奠)를 올리고, 모여서 노래하며 천웅(天雄)의 악(樂)을 연주하였다. 

 

제족이 방장산(方丈山) 방호의 굴(方壺之堀)에서 칠보의 옥을 채굴하여 천부를 새기고 그것을 방장해인(方丈海印)3)이라 하여  칠난(七難)을 없애고 돌아갔다.

 

이로부터 매 10년마다 반드시 신시를 여니,이에 말과 글(語文)이 같아지고,천하가 하나로 되어 사람들이 크게 화합(太和)하였다.

 

인하여 바닷가에 성황(城隍)4)을 지어 천부에 제사를 올리고,제족으로 하여금 머물러 집을 지어 살게 하니,그 뒤에 천년 사이에 성황이 전역에 널리 퍼졌다.

 

 

북두칠성의 위치를 정하여 반석의 위에서 속죄의 희생물을 구워 제사를 올리던 반석(盤石)은 지금도 방장 (方丈)또는 이패파도.보탑초(寶塔礁)라는 이름으로 묘도(廟島)에 남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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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사등록 2017-01-31 16:13: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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