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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해가 생성된 당시 하늘호수였던 모습. 이후 호수는 뚝을 이루고 있던 장백산맥이 지지진으로 무너져 북두칠성형태의 묘도군도가 생성되었다. 《중국고금지명대사전》

九山 張東均 / 실증 고조선본토기 저자

이 글은 고구려의 16대고국원왕과 19대 광개토대왕의 시호로 알려진 국강상이란 뜻이 북두칠성을 의미한다는것을 발견하고 북두칠성을 시호로 삼은 내력을 탐색하던중 마침내 발해해협에서 북두칠성 형태로 배열된 섬을 발견하게 되었다.

 

따라서 그 주변의 역사적인 상황을 추적한 결과 고조선과 고구려의 평양성과 관계가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이곳은 고대로부터 공자와 진시황. 한 무제등이 건너기를 선망하던 낙원이었으니 일명 삼신산이다.이렇게 유명한 특급 관광지를 꼭꼭 숨겨두고 한국인에겐 2009년까지 여행을 통제하던 장소였던곳이다.

 

왜 한국의 사학계에선 아직까지도 낙랑군의 위치를 내륙에서만 찾으려 하는것인가.이제 그만 소모적인 논쟁을 멈추고 바다로 눈을 돌리길 바란다.

 

황당하고 믿기가 힘들겠지만 옛 평양성은 바다에 있었다는 그 하늘호수 얘기는 중국 최초의 지리서인《산해경》에 이렇게 전한다.
 
《산해경해내경》東海之內 北海之隅 有國名曰朝鮮 天毒 其人水居 畏人愛人畏人愛郭璞云:「朝鮮今樂浪郡也。」珂案:朝鮮已見海內北經。樂浪郡也。」珂案:朝鮮已見海內北經。之>


동해(황해)의 안쪽, 북해(발해)의 모퉁이에 하늘이 다스리는 조선이라는 나라가 있으니.그사람들은 물에서 살며 사람을 아끼고 사랑한다.그곳을 위나라의 곽박이 주석하기를 그 조선은 지금의 낙랑군이라고 하였다.

 

그렇다면 이곳이 초기 낙랑군인것이다. 이렇게 분명한 사료를 무시하고 엉뚱한곳에서 낙랑군을 찾는 이유는 무엇인가.이곳은 다른곳과 비교될 수 없는 북두칠성형태의 섬이 있다.


하늘에서 바다로 내려앉은 북두칠성도(묘도군도)
             

발해해협의 묘도군도는 마치 그 모양이 북두칠성을 닮았다. 따라서 묘도군도는 북두성을 표방한 국강상이란 시호를 가졌던 광개토대왕과 고구려의 탄생지로 강력히 추정되는 곳이다.

 

이곳의 이름을 묘도(廟島)라고 부르는 유래 또한 하늘(북두칠성)에 천제를 올리는 사당이 있기 때문이다.


▶경주 호우총에서 발굴된 또 하나의 수수께끼 (#)

호우총은 경상북도 경주시 노서동에 있는 신라 시대의 무덤으로 경주 노서리 고분군(사적 제39호)에 속해 있다.이 호우총은 1946년에 발굴되었다. 이는 광복 후 초대 국립박물관장이었던 김재원박사의 주도하에 발굴된 최초의 사례였다.

 

호우총은 종래에는 '140호 고분'이라 불렸는데, 고구려 광개토 대왕을 기념하여 을묘년(415년)에 만들었다는 글씨가 새겨진 청동 호우(청동 그릇)가 발견되어 이름을 '호우총'이라 하게 된것이다


무덤의 발견은 인근에 사는 한 주민이 집 뜰에 호박을 심으려고 땅을 파다가 우연히 순금으로 된 신라의 귀고리를 발견한 것이 단서가 되어 광복 이듬해인 1946년 5월 처음으로 발굴되었다.

 

그리고 여기서는 도깨비 모양의 화살통 장식도 나왔다. 이 밖에도 파손된 금동관, 토기, 목칠기, 금동으로 만든 둥근 손잡이 큰 칼 등 50여 점의 유물이 발굴되었다.

 

왜 광개토대왕의 명문을 기록한 호우가 경주땅에서 발굴되었을까 당시의 고구려와 신라의 상황은 아래와 같다.

 

동방의 강국 고구려의 광개토대왕이 서거하고 뒤를 이은 장수왕은 즉위 2년(414)만에 부왕인 광개토대왕비를 세웠고 이어 각종 기념물을 만들었다.

 

이 청동 그릇도 이때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되는데 을묘년(乙卯年)은 신라 18대 실성왕(實聖王) 14년에 해당된다. 이 때의 신라는 작고 약한 나라로 고구려의 도움을 많이 받았다.

 

백제나 왜구로부터의 침공에 고구려의 지원을 받았다는 증거는 광개토대왕비에 기록되어 있는 바와 같다. 실성왕 11년(412)에는 전왕(前王)인 내물왕(奈勿王)의 왕자 복호(일명 보해)가 고구려 인질로 갔고, 그후 눌지왕 2년에 박제상과 함께 돌아온 일도 있다.

 

그런데 또하나의 수수께끼는  (#)의 기호였다.이 기호를 학계에서는 시원하게 풀지는 못하고 있지만 《후한서》의 注에는 별 이름이라고 하였다. 井: 南方火宿也 <後漢書·注>

 

그렇다면 북두칠성인 국강상을 상징한 로고인 셈이다.이 로고가 호우의 상부에 있고,하부에는 +자로 표시한 이유는 관뚜껑에 만장을 덮을때 上.下를 표시한것과 같다.

 

따라서 이 호우는 칠성판을 대신한것이다.칠성은 생명을 점지하고 또 걷우어가기 때문에 사자의 환생을 기원한 주문이었던 것이다.

 

▼장군총 능침시신방향도

장군총의 능침방향은 머리를 백두산 천지로 하고 발의 방향을 묘도열도로 하고 있다.현장을 답사한 학자들은 머리의 방향을 백두산 천지로 보아 '井'자를 우물로 해석하고 말았다.

 

그러나 '井'은 북두칠성을 상징한 로고이므로 발이 지시하는 방향을 검토했어야 했다.시신이 지시는 방향은 머리가 아니라 발이기 때문이다. 그 해답은 고조선은 천손족의 동기를 부여한 북두칠성자리에 있었다.


하늘의 호수를 한자(漢字)로 쓰면 '天湖'라고 한다. 그런데 이 天湖라는 간판을 달고 다니는 배가 대련과 연태 사이를 왕래하는 대형 여객선이었다.

 

'천호'는 이 배를 탓던 세계적인 기행작가 폴 써로우가 지은 <중국기행>이라는 책에 소제목(小題目)으로 나오는 단어인데 이 제목이 지닌 뜻을 과연 몇사람이나 이해 할 수 있을까를 생각하면서 쓴웃음을 지었다.

 

그러니까 천호라는 여객선의 이름은 하늘호수로 해석되는 북두칠성도가 발해해협에 있다는 그들의 은어인 셈이었다. 실제로 발해해협에는 오호해(烏湖海)라는 바다가 있었고 또 그곳에는 오호도(烏湖島)라는 섬도 있었다.  
 

당나라에서 고구려를 1차 침공할때 군수물자의 비축기지로 사용하던 섬인데 무슨일이 있었던지 650년에 진(鎭)이 패기된 후 흐지부지 사라졌다.후대에 북황성도를 오호도로 인식하도록 지도는 전한다.

 

사실 오호(烏湖)라는 이름은 무서운 감 마져든다. 검푸른 바다 또는 죽엄의 바다라는 뜻과 함께 천상의 호수라는 북두칠성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검정옷을 걸치고 조의선인을 지휘하던 연개소문은 이곳 하늘의 호수와는 아무런 관계가 없었든 것일가? 그의 부친 연태조는 대막리지요 천문을 읽는 현인이었다. 또한 그의 성은 연(淵)이 아니던가.못은 역시 작은 호수다.

 

오호도는 당나라의 군수물자 비축기지로 이용된 후 지진으로 가라앉은것이다. 지금은 그 형체를 찾을수가 없으니까. 따라서 자기들은 하늘호수를 왕래한다는 자부심이 있었을것이다. 현재 그들은 험악하기로 소문난 노철산수도(등주-여순)를 피해서 연태로 직항하는 경로를 이용하고 있다.

 

필자는 많은 시간을 죽여가며 이 황당한 수수께끼를 풀기 위해서 동분서주한 결과 이해하기 어려웠던 난제들을 나름대로 정리하고 이제 '국강상'이란 거창한 시호를 가졌던 광개토대왕의 출자에 대한 비밀을 풀기에 이른것이다.

 

금단의 구역을 마치 도둑처럼 마음을 조이며 답사하던 기억이 아직도 가시지 않고 있다. 짧은 글로서 설명하기는 어려움이 많아 두서가 난삽함을 이해하여주실것을 부탁드린다.

 

중국을 대국이라고 자랑하기를 좋아하는 중국인들은 고조선의 영토와 문화를 비롯한 고구려의 모든것까지도 자기들이 관장하던 변방이라고 헛소리를 치고 있다. 그러나 일찌기 고구려는 만주의 대륙과도 별도로 떨어져 있던 발해해협의 북두성 별자리에서 태어난 것이다.

 

고려의 사학자들은 이곳이 북두성 자리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고, 그 비밀을 《제왕운기》를 통하여 밝혀두었지만 명나라는 이 장소를 수백년동안 금족령을 내려 은폐시킨 관계로 우리 후손들에게는 망각의 장소가 되고 말았다. 그러니까 먼 옛날 조상님들의 기억력까지 상실시키고 마치 신화처럼 부평초가 되게 한 것이다.

우리들이 조상의 흔적을 눈으로 보면서도 기억할수 없는 지경에 이르자 그들은 옛날의 버릇을 다시 되풀이 하기 시작하였다. 홍산문화유적을 자기들 조상들이 만들었다고 주장하는가 하면 무엇이든 막무가내로 억지를 부린다.

 

뼈아픈 하늘의 응징이 있었음에도 아직도 정신을 못차리고 있는그들이다. 오늘날은 그들의 선조들이 약탈한 장물들을 감추어둔체 합리화시키기에 여념이 없다. 그렇다고 하늘까지 속일수는 없는일 아닌가. 알고 보면 중국도 세계 열강들의 보복으로부터 자유로워진게 불과 수십년 전이다.

 

이제는 큰 덩치만 믿고 약소국들을 위협하는 불의의 힘만을 자랑할것이 아니라 자연의 질서에 순응하는 큰 마음을 발휘하여 약소국들과 공존하며 동행하기를 기대한다.

 

옛날 진시황과 한무제등이 고조선을 침략한건 삼신산 때문이었다. 그들은 불사국을 손안에 넣기 위해서 필생의 전력을 다 하였으나 결국 더러운 방법으로 약탈한 낙원은 이미 낙원이 아니었다. 무력으로 침략하여 모조리 파괴하고 주민들까지 와해시켰기 때문이다...

 

공자(孔子)같은 성인까지도 예를 숭상하는 동방의 나라를 부러워 하며 땟목을 타고라도 건너기를 원하였다는 《논어》<자한편>의 기록들은 우리가 민망할 정도로 많이 보고 있는데 그러한 군자국이요 불사국인 하늘이 만드신 낙원을 그들이 짓밟고 부셔버린것이다.

 

그후 많은 세월을 보내고 천신만고끝에 회복이 되는가 하였더니 이번에는 다시 당나라가 같은 방법으로 고구려를 치고 만행을 저질렀다.

 

본래 이곳 묘도(廟島)에는 제천행사(祭天行事)를 관장하던 마고궁(일명 천후궁)이 있었다.고조선시대 소도(蘇塗)를 말함이다.천강이란 북두칠성을 상징한 표현인가 하면 마고(麻姑)할머니를 표현한 말이라고도 한다.

 

동방문화가 열린 이래 하늘과 땅의 다리역활을 담당하던 천후궁은 전화(戰禍)에 짓밟혀 패허로 변하였지만 다시 복원되어 오늘날은 또다른 이름으로 유지되고 있다. 

 

이같은 인간들의 잔악성에 실망하였든지 하늘은 지진과 태풍과 해일을 보내어 드넓던 평양 벌판을 반쯤이나 바다로 내려 앉혀버렸다. 그리고는 무도한 침략자들에게도 응징을 내렸다.

 

결과 천하를 떨게 하던 진시황도 불로초에 미쳐 돌아다니다 객사 하였고 무고한 3000여명의 동남동녀들까지 잃어버렸다. 그리고는 이와같은 장수설을 세상에 퍼트린 학자들을 보복하기 위하여 수십만권의 책을 불사르고 수백여명의 선비들까지 땅속에 산체로 묻어버렸다.  분서갱유라는 희대적인 사건이 이러한 연유로 일어났던것이다.(다음 2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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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사등록 2016-12-14 17:32: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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