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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암 수진(부산광역시불교연합회장>)스님 모시고 ‘김해바라밀선원(주지 수담인해)’ <천일관음기도입재> 및 <천도재> 봉행
  • 기사등록 2016-04-05 19:47: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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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해바라밀선원(주지 수담인해스님)에서는 2560년 병신년 <제2차 천일관음기도입재> 특별법회를 관암 수진스님(대한불교조계종 부산광역시 불교연합회회장. 범어사율학대학원장. 동명대학교 석좌교수)을 모시고 <염불>이라는 주제로 여법하게 3월 20일(일) 오전 10시 봉행했다.

 

‘마하반야바라밀다심경’을 다함께 음성공양 올린 후, 수진스님의 축원에 이어 불법승(佛法僧) 삼보님께 귀의하는 ‘삼귀의례’ 음성공양을 성공여성중창단의 아름다운 선율로 올렸다. 이어 찬불가 ‘보현행원’ 및 스님께 법문을 청하는 ‘청법가’ 음성공양 및 수진스님께 삼배(三拜)의 예(禮)와 더불어 법을 청하는 게송을 올렸다.

 

입정이 있은 후 수진큰스님께서 법문을 하기전에 <김해바라밀선원 수담인해>스님께서는 스님에 대한 간략한 소개를 했다. 수진스님께서도 또한 “저와 20년전에 해인사 강원에서 함께 생활했던 스승과 제자 사이”라면서 “세월은 참으로 빠르게 흐른다는 생각을 해 봅니다. 감개무량함과 세월의 무상함을 낳게 하는 그런 오늘”이라며 “함께하게 돼 기쁘다”고 말했다.

 

이어 수진스님께서는 <김해바라밀선원>이 벌써 천일기도를 한번 마치고 또다시 정진하는 ‘두 번째 천일기도’를 공양하게된 것에 대해 “마음은 늙지 않아서 여전히 20년전인데, 우리는 우리가 모르는 사이에 하나둘씩 변해가는 것이 아닌가(?) 세월의 무상함도 낳게 하는 그런 오늘이다”라며 소회를 밝혔다.

 

“그것은 여러분들이 잘 아는 것처럼 여러분들이 정말로 숭고하게 진영. 마산까지 부처님의 법을 전해야한다고 하는 <김해바라밀선원>선원장이자 주지이신 <수담 인해>스님의 원력입니다. 이곳에 터전을 잡았다고 했을 때 저는 굉장히 반겼습니다. 저는 언젠가 이곳에 포교당을 내 볼까(?)하고 이미 와 본적이 있었기 때문에 그랬습니다. 

수 많은 절이 있다 하더라도 부처님의 거룩한 법음을 정상적으로 전하는 그런 공간이 아니라고 한다면 의미가 없을 것입니다. 부처님의 제자라도 <정법(正法>을 바로 받아서 배우는 그런 제자라야 한다라고 하는 의미죠. 그렇다고 한다면 <부처님의 정법>을 바르게 전하는 그런 <공간>과 <스님>이 필요한 것입니다. 바로 이곳은 그런 곳입니다. 얼마전에 부담스럽지만 큰 소식을 하나 전해 들었습니다.

바로 인근에 300평 정도의 <김해바라밀선원 신축부지>를 확보했다라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짧은 시간에 이렇게 성장할 수 있는 것은 인해주지스님의 원력이고 여러분들의 확신한 결과라 생각합니다. 명실상부하게 어디 세를 얻어서 부처님의 법음을 전하는 것이 아니라 거룩한 우리 부처님의 공간을 하나 만들어내는 것, 그것은 이 시대에 어쩌면 <기원정사(祇園精舍)>를 하나 <새롭게 창건(創建)>하는 것이라 여겨집니다. 그 불사의 새로운 새시대가 천일관음기도 입재, 이것은 두가지의 의미를 갖는다 할 것입니다.

하나는 여러분들이 김해바라밀선원이 신축되는데 필요한 여러분들의 <소원(所願)을 발원(發願)>하는 것이고 또하나는 여러분들이 정말로 숭고하게 <기도(祈禱)>할 수 있는 <김해바라밀선원>의 신축(新築)을 발원(發願)하고 염원(念願)하는 그런 입재(入齋)가 되어야한다는 것이겠죠.

 

 그러면 <김해바라밀선원>이 여법하게 새로운 공간을 만들어서 정법(正法)을 전할 수 있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할까(?) 또 여러분들이 여법한 공간에서 부처님의 법음(法音)을 듣고 소원(所願)을 이뤄내려고 하면 어떻게 해야할까(?) <염불>하는 것입니다. 부처님을 간절하게 생각하고 <염불>하는 것이죠. 그것이야말로 여러분들의 소원을 이뤄내고, <김해바라밀선원의 신축>을 원만하게 이뤄내는 <길>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오늘은 <염불>이라고 하는 주제를 가지고 40분 동안 법문을 열어가도록 하겠습니다“ 라며 합장한 채 긴 호흡의 <염불>을 시작했다. ....나무아미타불.....나무아미타불.....

 

이 <염불>은 부처님의 말씀으로 <화엄경(華嚴經)> 각찬수품에 나오는 것입니다. 이 품에서는 <염불>에 대한 정의를 아주 잘 결단을 내려주셨습니다. 우리는 <염불>한다라고 하면 절에 가서 경전을 읽고, 나무석가모니불!, 관세음보살! 한번하고 오는 거라고 생각을 하지만, 이 <현수품>에서는 <염불의 정의>를 바로 <부처님을 친견>하는 것이라고 결단을 내려서 말씀을 했습니다. 과거에는 곳곳에 절이 많았던 시절도 있었습니다. 그래서 오죽하면 우리 속담에 ‘저 절로 가면됩니다. 절로 가면됩니다. 절로! 절로!.....그냥 절로 갔습니다.’ 신라시대 때도 그랬습니다.

 

그런데 이조 500년을 거치면서 절로! 절로!는 많이 사라졌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근세에는 어렵지만 시내에서 절로가면 절이 있습니다. 절로! 절로!... 절이 많이 생기는 현상이 되었죠. 절에 가서 하는 것이 무엇일까요(?) 염불이었습니다. 그리고 생겨난 속담이 ‘노는 입에 염불한다’ 그랬죠. 

심심하면 <염불>하는 거예요. 치매를 방지하는 방법도 화투놀이가 아니고 <염불>입니다. 안의비설신의를 동원해서 계속 동작을 하게되면 치매는 오지않죠. 통계적으로 조사를 하면 <마음이 맑은 사람이 장수>할 수 밖에 없는 것이죠. 마음을 맑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될까요(?) <염불>을 하는 것이죠. 육체를 건겅하게 하려고 해도 어쩌면 <마음을 맑게>하는 전제조건이 필요할 것입니다.

 

눈 앞에 아픈곳이 있으면 병원가서 진찰을 해서 약을 먹어야하겠죠. 그러나 좀더 깊게 들어가면 이 육체를 움직이는 주인공은 우리 <마음>이기 때문에 마음을 잘 콘트롤해야 건강하게 살 수 있다라고 하는 논리가 되는 것입니다. 그런 측면으로 바라보면 우리가 소원을 성취하는 것도 <염불>하는 것이지만 육체를 건강하게 하는 것도 또한 <염불>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若能如法供養(약능여법공양)하면, ‘만약 능히 어떤 사람이라도 여법하게 부처님께 공양을 한다’라고 한다면 <즉능염불시민도동아리권능(卽能念佛時悶到動阿理權能)>이, ‘염불하는 마음이 동요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권능즉시공양(權能卽時供養)을 올리는데 어떻게 해야 하느냐(?) ‘부처님을 생각하는 마음이 조금도 조금도 움직이지 않고 간절한 마음으로 올려야 한다’라고 하는 것이죠.

 

<공양구(供養具)>는 양(量)의 많음에도 그 뜻이 있겠습니다만은 얼마만큼 그 <공양구>에 정성을 올리느냐(?) 과일 하나라도 떡 하나라도 부처님 성전에 올릴때는 아주 <염불>하는 마음이 간절히 깃들어 있어야한다는 것이죠. 그렇지 않으면 뭘까요(?) 썩은 나무토막과 똑같은 것입니다. 정성을 담아서 미동하는 마음이 없이 부처님께 공양을 올리는 것입니다.

 

<약능염불심부덕(若能念佛心附德)>하면 ‘만약 능히 부처님을 생각하는 마음이 허리도 움직이지 않는다’라고 한다면 정성껏 공양구를 차려 올려놓고 부처님을 간절히 생각하면서 관세음보살! 관세음보살! 혹은 석가모니불! 석가모니불! 해가면 <즉상조견무염불(卽像朝見無念佛)하리라> ‘곧 축시에 한량없는 부처님을 친견하게 된다’ 그랬어요.

 

가장 기쁠때는 한참 동안 보지 못하던 아들을 보는 것이죠. 어쩌면 그것보다 더 기쁠때는 얘기치 않은 돈봉투가 내 호주머니에 싹(!) 들어왔을 때, 돈 봉투를 줄 사람은 딱 정해져 있습니다. 가장 가까운 사람이 주죠. 거사님이 돈봉투를 들고 열심히 두툼하게 갖다주는지 모르겠어요. 안갖다주시면 한번쯤 다시봐야 할 시기가 왔지않나.....아무래도 왼쪽 주머니를 서서히 채우고 있지 않나(?) 그렇게 돈이 좋다해도 내 아들이 좋죠.

 

그건 어쩌면 아들 딸 다 보내고나면 그냥 보살님이 좋고, 거사님이 좋은 거예요. 한참 올 시간에 오지않고 열받게 하는 순간이 있어도 때가 되면 돌아온다. 때가되면 봄은 오듯이 돌아옵니다. 그것을 못기다려서 천불을 내는 거잖아요. 그리고 부처님은 이 사바세계를 ‘감인대’라고 했습니다. 참고 견디면서 살아야하는 그런 세상이라고 하는 것이죠. 참고 견디고 살아가면 아름다운 일만 있게되는 것이고 충만한 날만 오게되는 것입니다.

 

흉하다고 영작 흉한 것이 아니죠. 길하다고 영작 길한 것이 아닙니다. 나에게 좋은 일이 있다해도 영원히 좋을 수는 없고, 나쁜 일이 있다해도 영원히 나쁜 일만 있을 수는 없습니다.

<락극비래(樂極悲來)>라 즐거움이 다하면 슬픔은 오는 거예요. 반대로 세상이 살맛이 안난다, 안난다 하더라도 이제 더 이상 살맛 안나는 날은 없습니다. 좋아질날만 남아 있는 것이죠. 그때를 잠시 기다리기만 하면 됩니다.

 

그 기다림의 시간이 너무 길기때문에 필요한 영약이 바로 <염불>인 것이죠. 성전(聖典)에 와서 관세음보살! 관세음보살! 간절하게 부르면서 그렇게 시간을 보내면 1년도 2년도 순식간에 지나가버릴 것입니다. 아들을 만나는 것보다 돈뭉치를 만나는 것보다 또 어쩌면 크게 기쁜것이 부처님을 친견하는것이듯이 부처님을 한번만 배알하기만 하면 여러분들 신상에 일어났던 여러 가지 나쁜 모습들은 순식간에 탈바꿈해버리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우리는 부처님! 부처님! 그리고 또 다른 모습으로서의 관세음! 관세음! 하지만 어느날에 본인 스스로가 <부처님>이 되고 <관세음보살>이 되어 있음을 알 수 있는 날이 오게 되는것입니다. 역으로 말하면 부처님께서 가피를 주는 것도 아니고, 또한 역으로 말하면 관세음보살이 나에게 가피를 주는 것도 아니고, 내가 간절하게 <염불>을 했기 때문에 그 결과로서 가피를 창출해 내는 것입니다.

 

부처님은 그냥 그대로 계시는 것입니다. 관세음보살은 그냥 그대로 계시는 것입니다. 내가 간절하게 <염불(念佛)>하고 <서원(誓願)>하고 다가갔을 때 관음(觀音)부처는 <점두(點頭)>를 하게 되겠지만, 기실은 내가 나에게 <점두(點頭)>를 한 것입니다. <화엄경(華嚴經)>에서 말하는 ‘부처를 생각하는 마음이 조금도 움직이지 않고 여실하게 이뤄진다면 우리는 언젠가 한량없는 부처님을 친견한다’라고 했습니다.

 

수진스님이 하는 말이 아니고 바로 <화엄경>에서 부처님께서 하신 말씀입니다. 이 말이 진실이라고 믿고 간절하게 <염불>을 해야 하는 것이죠. 친구의 말도 잘 듣고, 모르는 사이에 사기꾼의 말도 잘 듣고, 모르는 사이에 무당의 말도 아주 잘 듣는데, 부처님의 이 거룩한 말씀을 일러주면 그대로 믿고 해야하는데 <의심>한다 말입니다. 폭탄선언을 하면 깜짝 놀라서 그대로 하는 거예요.  

내일 그거 안하면 죽어! 이러면 그냥 하는 거예요. 내일 분명히 살건데.... 죽어(!)하는 거잖아요. 그런데 스님께서 너 그렇게 안하면 내일 죽어(!) 이러는 스님들은 아무도 없어. 그런데 불법을 빙자한 이들은 의외로 그런 사람들이 많아! <사도(邪道)>라 그러죠. 그 말을 아주 잘도 믿어. 꼼짝 못해. 하라니까 안하면 죽어....천만원에서 천도재하라니까 하면 해. 안해도 내일 살고 있을텐데......

 

어쩌면 이런 말과 모습을 전해 주는 것은 <혹세무민(惑世誣民)>의 부류들만 할 수 있습니다. 부처님의 법은 그런 법이 없습니다. 오로지 부처님은 ‘당신의 법대로 의지해서 수행하고 법대로 살아가라’고 했습니다. <사마외도(邪魔外刀)>를 철저하게 척파시킨 분이 부처님입니다. 부처님의 탄생 이전에는 인도전역에 모든 사람들도 저~ 범신(범神)을 믿었습니다. 여타의 종교에서 신을 믿는 것처럼 바라문의 수행자들도 <범신(梵神)>을 믿고 그 범신(梵神)이 <길흉화복(吉凶禍福)>을 좌지우지(左之右之)한다라고 했습니다.

 

부처님은 그 말을 순식간에 잘라서 척파시켜 버렸습니다. 그대의 <길흉화복(吉凶禍福)>은 그대가 만드는 것입니다. 누가 주는 것이 아니라 누가 나에게 감히 길(吉)함을 주고 흉(凶)함을 주느냐(?) 길함을 주고 받는 것은 내스스로 하는 것입니다. 내가 영원히 길한 모습으로 살 수 있게 하는 것은 길한 모습의 행동을 했기 때문입니다. 흉한 모습으로 살 수 밖에 없는 것은 흉한 행동을 했기 때문입니다.

 

그러한 행동의 가치는 어디서 나오는 것이냐(?) <신구의(身口意) 삼업(三業)>으로 나온다 그랬죠. 아름다운 그리고 숭고한 말과 행동을 하는데 그리고 여법한 마음의 가짐을 갖는데 어찌 그 사람이 나쁜사람이 되겠느냐(?) 말이지.....그래서 부처님은 모든 존재는 당신과 똑같은 <존재성>을 갖고 있다고 했습니다. <부처의 존재성>을 갖고 있다라고 했습니다. 부처의 존재성이란 뭘까요(?) <선(善)> 밖에 없습니다.

 

따라서 우리가 ‘수행(修行)을 하면 아주 선(善)하고 숭고(崇高)한 존재로 마치 석가모니와 똑 같은 존재로 바뀐다’라고 했습니다. 길하고 흉함이 나의 것이 아니고 또다른 존재의 뜻이라고 한다면 우리는 공부할 필요가 없는 것이겠죠. ‘나쁜 버릇을 척결해야 된다’라고 <수행>하고 <염불>해야 될 이유가 없는 것이겠죠. 내가 <수행(修行)>함으로 통해서, <기도(祈禱)>함으로 통해서, 그런 것이 정리되고 청산되기 때문에 <기도(祈禱)>하고 <염불(念佛)>하고 <수행(修行)>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쩌면 ‘내가 간절히 기도(祈禱)해서 소원(所願)을 이루면 우리는 흔히 부처님이 준다’ 그러고 말하지만 여러분들 스스로가 여러분들의 <가피(加被)>를 만들어낸 것입니다. 산천초목도 우리에게 교훈을 주고, 새소리 물소리도 우리에게 감동을 주는데, <화엄경>의 이와같은 ‘거룩한 말씀이 우리의 가슴속에 꽂히지 않는다’라고 한다면, 우리는 어리석은 존재일 것입니다. <화엄경>은 조금전에 말씀을 드렸던것처럼 분명히 말씀을 하셨습니다. ‘<염불>하는 마음이 움직이지 아니하면 항상 스스로 부처님을 친견(親見)할 수 있다’ 했습니다.  

어느날 어떤 스님이 열심히 열심히 <능엄경>을 읽어서 그리고 어느날 산천을 바라보는데 나무가지 가지마다 꽃송이 송이마다 아난존자가 탁(!) 앉아 있더라는 거예요. 간절하게 관세음보살! 관세음보살! 관세음보살!하면 산천초목 그 어디에도 관세음보살이 화현해 있을것이고, 그것이 착시현상이든지 말았든지 그런 구경을 한번은 해봐야 하는 것이죠. 관세음보살! 관세음보살! 한번을 하더라도 간~절하게....오죽하였으면 <정토삼부경(淨土三部經)>에서는 <人命終失(인명종실) 아미타불(阿彌陀佛)!> 열번만 부르면 극락세계(極樂世界)에 간다라고 했을까요(?) 간절함을 설명한 것입니다.

 

살아 생전에 30년, 40년을 해도 근성이거든....지금 여러분들 현재 건강하면 ‘부처님 저에게 더 건강하게 해 주십시오’하는 말씀을 거의 잘 안할거예요. 당당하니까. 간절함이 베어있지 않는 것이죠. 자연스럽게 모든 것이 잘 흘러 간다라고 한다면 뭐 그냥 초하루니까(?) 보름이니까(?) 오늘 첫기도 입재일이니까(?) 그냥 오는 거예요. 죽음에 임박해서 더 살아야겠는데, 살아야할 이유가 있는데, 내일 죽어야 한다는 말이죠.

얼마나 간~절하겠어요. ‘열 번만 부르면 살려준다’ 그 말씀이 <정토삼부경(淨土三部經)>에 여실하게 기록하고 있는데, 그 말을 믿고 안해보겠느냐(?) ‘열 번을 불러서 극락세계에 갈 수 있거나 아니면 다시 살아날 수 있다’라고 한다면 그 길을 선택하는 것이겠습니다만은 그 결과는 반드시 <간절함!>입니다.

 

10년 20년 동안 공부를 해도 그저 그렇게하면 소득이 없는 것입니다. 하루를 하더라도 1년을 하더라도 <몸과 마음을 총동원>해서 간절하게 어쩌면 생명도 불사하고 공부를 지어나가면 그 결과는 반드시 딸려오게 돼 있는 것입니다.

 

간절함! 간절함! <기도(祈禱)>는 <염불(念佛)>은 단순하게.....요사이 절에 다니는 신도님들이 기도를 좀 복잡하게 하더라고, 그게 어쩌면 유행처럼 번져버렸어.....아니 노는 입에 염불한다고 그랬는데....10분은 <참선(參禪)>을 하고, 또 조금 시간을 내서 <다라니(多羅尼)>를 21독하고, 또 좀 지나서 <금강경(金剛經)>을 3독하고, 또 좀 지나서 <108배>를 하고, <대학교 교과 과목>처럼 복잡해요.

 

이것도 괜찮지만 언제 어디서나 할 수 있는 이런것들은 다 <장소(場所)>와 <공간(空間)>이 필요한데 길을 걷다가도, 차를 타고 가다가도, 밥을 먹다가도 할 수 있는 것은 단순해야 하지 않겠습니까(?).....우리가 흔히 학술적으로 <불교>를 말할 때.....인도불교를 <부파불교(部派佛敎)>라고 하고, 중국불교를 <종파불교(宗派佛敎)>라고 말합니다. 중국 불교의 역사 속에서, 수많은 종파속에서, 끝까지 살아남은 종파가 무엇일까요(?) 단 2개였습니다. <선종(禪宗)>과 <염불정토종(念佛淨土宗)>이었습니다.

 

우리가 화엄경! 화엄경! 화엄경!해도 현재 <화엄신앙>이 남아 있는 것은 신중단에 화엄성중! 화엄성중! 화엄성중!하는 정도죠. <의상스님>이 신라시대 때 <화엄의 십종찰>을 만들어서 <화엄의 세계>를 펼쳐도, 현재 그 절만 있지 그곳에서 <화엄(華嚴)>을 별도로 해서 <수행(修行)>을 시키지는 않는다. 다만 남아 있는 것은 화엄성중!, 화엄성중! 어느 절에서라도....화엄의 수행자들이 복잡하게 수행을 해요. <사공해법계관법(司空該法界觀法)>이라고 하는 그런 관법(灌法)의 수행(修行)을 하는데, 복잡해서 보통사람들이 하기에는 힘들어요.  

<천태종>도 마찬가지 삼지 삼관법(三觀法)’을 닦아라고 하는데, 지금 <천태종>에서 하는 것은 <관음경 독경>과 <관세음보살> 밖에 안합니다. 신앙체험만 남아 있는거죠. 그런데 실질적으로 수행을 들어가면 이와같이 삼지 삼관법(三觀法)>을 닦아라고 한다면 복잡해져요. 지금 대한민국은 지식의 수준이 세계에서 최고입니다. 학벌이 최고 좋은 나라가 대한민국이죠. 대학교 졸업했다고 말을 할 수 있는 그런 시대가 아니예요. 대학원 졸업했다라고 해야 말을 좀 해볼까(?) 라는 정도이다. 잘하고 못하고는 다음이고....

 

그런데 과거에는 그렇지 않았어요. 이조때만 하더라도 어땠습니까(?) 사대부집안의 아이들만 공부를 했어요. 평민은 공부를 하면 안되는거라. 사대부를 능멸하는 것이라 생각했어요. 거기서 남존여비는 뚜렷했어. 남자는 하늘 같고, 여자는 그냥 형편없는 존재로 봤어. 여자는한때 이름도 써주지 않았어. 특히 여자는 시집오면 이름을 불러주지 않고 택호를 불렀어. 와룡불댁, 인천댁,.... 아이구 우리 어머니가 동네 사람들이 와룡댁! 와룡댁!이라고 해서 이름이 ‘서두순’씨인데 이름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안 불러 줘.

 

그 관습이 무서운 거예요. 지금은 그런 시대는 아니잖아요. 양반 상놈이 붕괴된지가 오래됐어. 남자, 여자가 붕괴된지가 오래됐어. 남자는 공부를 해야되고 여자는 살림만 살아야한다. 이런 논리가 완전히 사라졌어. 어쩌면 실로 행동하고 움직여지는 것은 여자가 더 왕성한지도 몰라요. 그런데 그와는 상관없이 누구라도 유식하거나 무식하거나 알거나 모르거나 관계없이 딱(!) 할 수 있는 것은 <염불>입니다.

 

그런데 이 <종파 불교>에서 복잡한 원리를 내세우지 않는 두 종파가 있었는데 하나는 <염불정토종(염불정토종)> .....그래서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 관세음보살! 하라는 거예요. 그거 못 외우는 사람 아무도 없어. <선종(禪宗)>은 뭘 가르치느냐(?) ‘니가 누구냐(?)’ 이 화두 하나만 탁(!) 던져주는 거예요. ‘니가 태어나기 전에 정녕 누구였더냐(?)’ 아니면 ‘모든 것은 <마음>이 만드는데, 그 <마음>이란 놈이 대체 어떤 놈이냐(?)’ 무식하게 그것만 하라는 거예요. 무식하게 관세음보살! 관세음보살! 이것만 하라는 거예요. 그런데 이 종파는 살아 남았어. 같이 살아 남았어. 왜(?) 단순하니까(?) 부처님은 이 모두를 <방편(方便)>이라고 했습니다.

 

중생의 세계를 청산하고, 중생의 마음가짐을 청산하고, <성자(聖者)의 마음으로 회귀(回歸)>시키는 <방편(方便)>이라고 했습니다. 성자(聖者)만되면 된다는 거예요. 부처로 다 깨어나면 된다는 거예요. 관세음보살! 관세음보살!.....도대체 이 물건이 무엇인고(?) 이걸 하는데 역시 간절함이 베어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자~합장하시죠. 수진스님의 <염불(念佛)>~‘화엄이로다. 다함께 나무아미타불!......하리다. 나무아미타불!’ 

<약어시방재불(若於十方在佛)> ‘만약 시방(十方)에 재불토(在佛土)에 부처님 처소에 <음수관정지수(陰數灌頂旨手)>하면 ‘응당 부처님께서 머리를 만져주거나 감로수(甘露水)로서 여러분들 머리 위에 한 방울 던져만 주어서, 도리어 부처의 그 공간에 뛰어들 수만 있다면’, <정봉시방재불입(頂峰十方在佛入)> ‘일체 모든 부처님이 손으로서 그야말로 이 지구촌에는 없는 감로수로 여러분들의 이마에 정지’할거라 그랬습니다.

 

간절히 <염불(念佛)>하고 <기도(祈禱)>하면 ‘어느날 부처님이 꿈이든지 생시든지 감로수(甘露水)로서 여러분들의 이마에 <관정(灌頂)>을 해 주실것’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결국 열심히 <염불(念佛)>하고 <정진(精進)>해서 부처님의 처소에 가면, ‘시방의 부처님이 이마를 만져 주거나 이마에 물을 뿌려주는 그런 가피를 입게된다’라고 하는 것입니다. <화두(話頭)>를 든 사람도 간~절한, 어쩌면은 분노하는 마음이 일어나야 그 분노하는 마음은 간절함이겠죠. 내 기필코 금생에 이 <화두(話頭)>를 깨지 못하면 나는 죽을 수 밖에.....어쩌면 단 이틀밖에 없다고. 절대절명(絶對絶命)의 상황으로 본인 스스로가 몰아가야.....간절함! 간절함! 그야말로 지극정성(至極精誠)으로 다가가는,....

 

<위선(僞善) 영운선사(靈雲禪師)의 회상(會上)>에 <영운선사(靈雲禪師)>라고 하는 스님이 계셨는데, 정말로 열심히! 열심히! 참선(參禪)을 정진했습니다. 그럼에도 비전이 보이질 않는거예요. 하루 이틀 사흘 나흘.... 매일같이 단 오늘이야. 단 오늘이야. 단 오늘 뿐이야. 오늘 해결해야 해. 그렇게 그렇게 처절하게 수행(修行)을 해 온지가 30년이 되었어요. 그런데 그날은 달랐었요. 툇마루에 앉아서 대체! 이놈이 어떤 놈인고(?) ....그런데 실바람이 불어와 코 끝을 때리는 그 향기는 복사꽃 은은한 향기였습니다. 그래서 고개를 살짝 들어서 보니까(?) 복사꽃이 활짝 피어있는 것입니다. 그때 탁(!) 알아차렸습니다. 

30년의 결과가 그렇게 온거예요. 30년이라도 길지 않다는 거예요. 스님들은.... 그런데 우리는 삼일 딱(!) 기도해서 한 100억 정도 벌어야 해. 무슨 증권회사가.....지나친 요구이고 무리한 요구이다. 10년을 기도하고도 평생을 보장받을 수 있다면 그 길을 선택해야 하는데.... 사법고시하는 사람은 10년을 공부해서도 일생을 보장받게 되잖아요.

 

30년 투자해서 비로소 알았어요. 30년 투자해서 비로소 알게되었어요. 얼마나 기뻤을까요(?) 모르는 것을 알게되면 뛰고 또 뛰어도 그렇게 기분이 좋다. 일생일대에 생사(生死)문제를 해결했다. 얼마나 좋겠어요. 그리고는 ‘영운선사(靈雲禪師)’가 이와 같이 그 기쁨의 오도송(悟道頌) <삼십년래심검객(三十年來尋劍客)/ 기회낙엽우추지(幾回落葉又抽枝)/ 자종일견도화후(自從一見桃花後)/ 직지여검갱불의(直至如劍更不疑)>삼십 년 동안 칼을 찾던 나그네여/ 꽃 피고 잎 지는 것 몇 번이나 보았던가(?)/이제 복사꽃 핀 것을 한번 본 후로는/ 더 이상 의심할 것 없어졌네/을 읊었습니다. 자 합장하시죠. 나무아미타불! “일견도화....직지심검.....염불중지...이로다” 나무아미타불! 여러분들이 기도(祈禱)를 간절히 했습니다.

부처님께서 관정수(灌頂水)를 머리에 흔들리는 그 기쁨은 상상을 초월할 것입니다. 참선(參禪)하는 수좌가 필생의 자유감(自由感)을 얻어 낼 수 있다면 그 기쁨 또한 상상을 초월할 것입니다.

 

<영운선사(靈雲禪師)>는 <위선(爲善) 영운선사(靈雲禪師)의 회상(會上)>에 있으면서 이와 같이 특별한 날을 맞이하게 되었던거죠. 30년동안 <지혜(智慧)의 검(劍)>을 찾아 헤매었습니다. 이 지혜의 칼은 <살리는 칼이지 죽이는 칼>이 아닙니다. 세상은 죽이는 칼 밖에 없어. 권력으로 죽이고, 말로서 죽이고, 돈으로 죽이고, 행동으로서 죽이고, 죽이는 칼 밖에 없어......깨달음의 지혜, 이 칼은 <사람을 살려내는 급기야 중생에서 부처로 살려내는 칼>이야. 죽이는 칼은 없어. 어쩌면 이 칼은 칼날이 없을 수가 있다. 30년된 지혜의 칼을 찾아 헤매던 계기야.....<기회여화우추지영가(幾回如花又抽枝)> ‘낙엽지고 꽃 피고 싹이 틈을 대체 몇 번’이나 바라보았던가(?) 

<일견도화 즉시후(一見桃花 卽時後)> ‘한번 복숭아꽃이 탁(!) 피어 있는 것을 보는 그 순간’ <직지여검견불(直至如劍見佛)>이로다 ‘오늘 처럼 다시는 의심하지 않겠다.’ 탁! 알아 차렸다. 더 이상 그 어디에도 ‘의심의 덩어리’는 남아 있을 수가 없어. 대체 이 무엇인고. 끝났어. 노리개가 필요없어. 던져버리는거야.

 

<참선(參禪) 화두(話頭)>하는 스님에게는 <화두(話頭)>가 노리개거든. 그것만 갖고 노는거야. <방편(方便)>이란 말이야. <화두(話頭)> 자체가 부처는 아니란 말이야. <부처로가는 사다리 길>일뿐. <기도(祈禱)>하는 사람에게 <관세음보살(觀世音菩薩)>은 <사다리>고 <길>일뿐이야. 그 길을 통해서 <소원(所願)>을 얻어내는 거잖아요. 그 길을 향해서 그 방법을 통해서 나의 행복(幸福)을 얻어내는 거잖아요. <화두(話頭)>하는 사람은 <화두(話頭)>는 방편(方便)이야. 더 이상 대체 이 뭔고, 우주의 실상이 뭔고, 나고 죽음의 문제가 뭔고, 대자유가 뭔고 의심하지 않습니다.

 

이제 비로소 <지혜의 칼>을 찾았다. 간절함! 그날 만큼은 <영운선사(靈雲禪師)>가 달랐어. 평소의 <화두(話頭)>보다도 그날만큼은 달랐다는거죠. 물론 30년 동안 <수행(修行)>해 왔던 결과가 그날 몰입이 된거죠. 간절함! <화두(話頭)>를 하든지 <기도(祈禱)>를 하든지 간절함! 간절하게 다가가면 여러분들의 현실적 <소원(所願)>은 반드시 이뤄지고, 특히 <김해바라밀선원>에서 <신축 바라밀선원>을 꿈꾸고 진행하는 그 <신축불사(新築佛事)>는 원만히 이뤄지고 <회향>될거라고 생각합니다“라면서 감동적인 법(法)을 전했다.

 

이어 성공여성중창단의 찬불가 <지옥과 극락> 및 <마음> <우리도 부처님 같이> 3곡의 음성공양이 아름다운 하모니로 바라밀선원에 향기를 더했다. “지옥과 극락은 이 세상에 있고/ 내 마음속에도 지옥과 극락이 있네/ 자비롭게 살아가는 그 마음이 극락이라네......”.

 

<마음> “마음은 마음은 모든것을 만든다/ 마음은 마음으로 말하고 행동하며/......내마음이 내마음이.....수레바퀴가 발자국을 남기듯이/ 마음은 모든것을 만든다.”

<우리도 부처님 같이> “바른생각 바른말.....무명을.... 밝히리/ ...이제는 가슴 깊이 깨달을 수 있다네.....정진하세 정진하세.....우리도 부처님같이/.....원망은 한 순간 모든 것이 은혜라네......./ 감사하는 마음이.....이제는 여실히 깨달을 수 있다네...../ 정진하세 정진하세 우리도 부처님같이 물러남이 없는 정진 우리도 부처님같이”  

공지사항으로는 불단(佛壇) 앞에 놓여있는 예부터 복(福)을 상징하는 황금색 돼지를 <김해바라밀선원 신축불사>에 ‘십시일반’의 마음으로 모두가 다함께 <김해바라밀선원 창건주>로 동참하자는 의미에서 제작했다. 황금돼지 한 마리씩 몰고가서 복을 많이 받아오시기를.....이날 향을 피워 주위를 맑게하는 ‘향꽂이’도 참석한 불자들께 함께 선물했다.

 

<김해바라밀선원 갤러리>에서는 오는 8월 17일까지 <오수희>보살의 아름다운 연꽃을 주제로한 ‘화조도’ 유화작품 <향기를 품다> 개인전을 개최한다. 주위에 많은 분들께 소개해 오수희작가의 ‘온화하고 부처를 닮은 아름다운 마음이 널리 향기로 전해져 예술을 알아보는 고매한 분들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게 되기를 바라며’ 많은 관람바란다. 이어서 <선망부모님의 왕생극락>을 발원하는 <천도재>가 이어졌다. 그리고 3월27일 김해바라밀선원에서 출발하는 지리산 ‘벽송사’와 ‘서암정사’로 떠나는 <성지순례>에 많은 동참바란다.

 

또 한가지 더 소개한다. 오는 <4월10일(일) 10시> 통도사 반야암 <요산 지안스님>을 모시고 <바라밀선원 3주년 기념대법회 및 수자령 천도재>를 봉행한다. 신심있는 불자들께서는 다함께 참석해 무량한 공덕을 짓기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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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사등록 2016-04-05 19:47: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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