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한말(舊韓末) 한국불교(韓國佛敎)의 중흥조(中興祖) <경허선사(鏡虛禪師)>는 8살 때 출가(出家)해 5년 동안 <청계사(淸溪寺)>에서 행자생활(行者生活)을 했다. 현재 충남 덕숭산(德崇山) 수덕사(修德寺) 청련당(靑蓮堂)에 <무이당(無二堂)> 친필(親筆)과 <법문(法門)>이 보존(保存)되고 있다. 또한 경허선사(鏡虛禪師)의 보임처(補任處)이며, ‘중부의 둥근보름달’ 제자(弟子) <만공 월면(滿空 月面)>스님이 축발(祝髮)한, 충남 서산 <연암산(燕巖山) 천장사>에 친필(親筆) 생각의 화살 <염궁문(念弓門)> 현판이 전하고 있다.
대자유인(大自由人) 경허선사(鏡虛禪師. 법명(法名) ‘성우(惺牛.깨우친 소)’ 1849~1912년)는 말년(末年) 51세부터 5년 간 해인사(海印寺) 방장(方丈)으로 주석(主席)했다. <경허선사(鏡虛禪師)>는 <해인사(海印寺) 퇴설당(堆雪堂)>시절 <무애행(無碍行)의 절정기(絶頂期)>로 <해인사(海印寺)> 선실(禪室) <‘퇴설당(堆雪堂)’> 현판은 <경허선사(鏡虛禪師)>의 글씨다.
<경허선사(鏡虛禪師)>는 <해인사(海印寺.1889년)>에서 무너진 선풍(禪風)을 회복(回復)하기 위해 <정혜결사(定慧結社)>를 조직(組織)했다. 통도사. 범어사. 화엄사. 송광사 등을 순력하며 선원(禪院)을 복원(復原)하고 선실(禪室)을 개설(開設)하는 등 <영남(嶺南)>과 <호남지방(湖南地方)>으로 결사운동(結社運動)을 확장, 우리나라 불교계(佛敎界)에 선풍(禪風)을 일으켜 <중흥조(中興祖)>로 불린다.
<경허선사(鏡虛禪師)>의 제자(弟子) <만공 월면(滿空 月面)>스님은 일제식민 불교정책(日帝植民 佛敎政策)에 항거(抗拒)해 <전통불교(傳統佛敎) 고수(固守) 투쟁(鬪爭)을 선언(宣言. 1941년) 선학원(禪學院) 고승대회(高僧大會)>를 가졌다. 또한 여성을 평등하게 여겨 <덕숭산(德崇山)>에 우리나라 최초의 비구니 선원 <견성암(見性庵)>을 세웠으며, <칠근루(七根漏)>를 비롯해 수덕사(修德寺) <백련당(白蓮堂)> 현액을 썼다.
그리고 경허선사(鏡虛禪師)의 제자(弟子)로 한국근대(韓國近現代) 불교(佛敎)의 명맥(命脈)을 이어 전(傳)한 <만공 월면선사(滿空 月面禪師)>는 충남 서산 안면도(安眠島) 사이에 있는 <간월암(看月庵)>을 중창(重創)해 <조국독립(祖國獨立)을 발원(發願)>하며 <천일기도(天日祈禱)>를 올렸다. 훗날 대한불교조계종(大韓佛敎曹溪宗) 제7교구 덕숭총림(德崇叢林) 수덕사(修德寺. 現 방장(方丈) 설정스님) 방장(方丈)이 된 <만공 월면선사(滿空 月面禪師)>의 마지막 <제자(弟子) 원담선사>가 <천일기도(天日祈禱)>를 <회향(廻向)>한지 사흘만에 조국(祖國)이 해방(解放)을 맞이했다.
<만공 월면선사(滿空 月面禪師)>는 8.15 해방(解放) 소식(消息)을 듣고 무궁화 꽃을 먹물에 적셔 <‘세계일화(世界一花)’>를 휘호(揮毫)하며 멋진 법문(法門)을 남겼다. <“세상 모든 것이 한 송이 꽃이니, 너와 내가 둘이 아니요. 이 나라 저 나라가 둘이 아니다. 지렁이, 참새 한 마리도 부처로 보고 미웠던 원수(怨讐)들 마저도 부처로 보아야 할 것이요. 다른 종교(宗敎)를 믿는 사람들도 부처로 봐야 한다”>는 것이 <‘세계일화(世界一花)’>의 참뜻이다. 그리고는 의미심장하게 <“이제 한국(韓國)이 독립(獨立)했으니 세계(世界)의 중심(中心)에 서게 될 것”>이라고 예언(豫言)했다고 전(傳)한다.
<세계일화(世界一花)>라는 말은 <당(唐)나라 시인(詩人) 왕유(王維)>가 쓴 <육조혜능선사비문(六祖慧能禪師碑文)>의 <‘세계일화(世界一花) 조종육엽(祖宗六葉)’>이라는 구절(句節)에서 유래(由來)했다. <세계(世界)는 ‘하나의 꽃’이며, 조사(祖師)의 종풍(宗風)은 ‘여섯 잎’>이라는 의미로 <초조 달마(初祖 達磨)>에서 <육조 혜능(六祖 慧能)>까지 내려 온 <중국 선종(禪宗)의 전등(傳燈)>을 절묘(絶妙)하게 표현(表現)한 말이다.
이와 더불어 조선(朝鮮)을 개국(開國)한 태조(太祖) 이성계의 왕사(王師) <무학대사(無學大師)>는 이성계의 꿈풀이로 이성계가 <왕(王)>이 되리라는 것을 미리 예견(豫見)했다. 그리고 이성계에게 세 곳의 명산(名山)에 들어가 백일기도(百日祈禱)를 올려야 한다고 조언(助言)했다. 그래서 이성계는 왕위(王位)에 오르기전 자신이 창건(創建)한 석왕사(釋王寺)와 명산(名山) 지리산(智異山), 관음기도도량(觀音祈禱度量)인 남해(南海) 보광산(普光山) 보광사(普光寺)에서 각각 백일기도(百日祈禱)를 올렸다.
<남해(南海) 보광사(普光寺)>에서 기도(祈禱)할 때 꿈속에서 산신령(山神靈)에게 금척(金尺)을 받았다. 그때 산신령(山神靈)이 “그럼 너는 나에게 무엇을 해 줄 것인가(?)”라는 물음에 이 산(山)을 <비단>으로 덮어 주겠다고 약속했다. 기도(祈禱)를 마치고 상경(上京)한 이성계는 조선(朝鮮)을 개국(開國)했다. 태조(太祖) 이성계는 왕(王)이 된 후 남해(南海) 보광사(普光寺)에서 기도(祈禱)할 때 왕이 되면 <온 산을 비단으로 덮어주겠다>고 산신령(山神靈)께 약속했던 일로 고민에 빠졌다. 이때 <무학대사(無學大師)>는 기지(機智)를 발휘(發揮)해 산(山) 이름을 <금산(錦山)>으로 고쳐 부르라 했다.
오늘날에 깨달음을 얻을 수 있는 <백의해수관음기도(白衣海水觀音祈禱)> 도량(道場)으로 널리 알려진 경남(慶南) 남해(南海) <금산(錦山) 보리암(菩提庵)>에 대한 유래(由來)다. 또한 <남해(南海) 금산(錦山)> 만인사에는 <태조(太祖) 이성계>의 태실(胎室)이 있어 명당지(明堂地)로 이름 높다. 이밖에도 <무학대사(無學大師)>는 18세에 <경기도 양평 용문사>에 들어가 <소지선사(小止禪師)>를 스승으로 ‘심법(心法)’을 배우고, 후에 ‘도승(道僧)’ <나옹선사(懶翁禪師)>와 <지공화상(志空和尙)>의 법(法)을 받아, 고향(故鄕)인 충남 서산 태안 <간월암(看月庵)>에서 <달을 보고 견성(見性)>해 <태조(太祖)의 왕사(王師)>가 되었다는 기록(記錄)이다.
이밖에도 <남해(南海) 금산(錦山)>은 신라시대(新羅時代) 대승불교(大乘佛敎)의 꽃 <대방광불화엄경(大方廣佛華嚴經)>을 설(說)한 <원효대사(元曉大師)>가 기도(祈禱) 중 <관세음보살(觀世音菩薩)>을 친견(親見)하고 창건(創建.683년)한 절이다. 사찰(寺刹) 창건(創建) 당시 이름은 <보광산(普光山) 보광사(普光寺)>였다.
<화엄경(華嚴經)>은 보현보살(普賢菩薩)이 부처님 주위에 있는 보살(菩薩), 천신(天神) 등 모든 대중(大衆)에게 부처님을 찬탄(讚歎)케 하는 게송(偈頌)이다. 화엄경(華嚴經)에 대한 설(說)은 용수보살(龍樹菩薩)이 대룡보살(大龍菩薩)을 따라 용궁(龍宮)으로 들어갔다가 여러 <화엄경(華嚴經)>들 중 한 본(本)만을 지상(地上)으로 가져와 전(傳)했다고 한다.
<화엄경(華嚴經)>의 교주(敎主)는 <비로자나불(毘盧遮那佛)>이다. 독일의 실존주의 철학자 <칼 야스퍼스>는 백제인의 작품으로 일본 국보(國寶)로 지정돼 <경도(京都) 광륭사(廣隆寺)>에 있는 목제 <반가사유상(半跏思惟像)>을 보고 “그 얼굴이 인간 최고의 이상(理想)을 표현 했다”라며 “세계 최고의 미술품”이라고 격찬 했다. 화엄경(華嚴經)의 전체(全體)는 <보현보살(普賢菩薩)>과 <문수보살(文殊菩薩)>, <제불보살(諸佛菩薩)>등을 통해 법(法)이 교설(敎說)되고 있다. <원본(原本) 화엄경(華嚴經)>은 동진(東晋)의 불타발트라(佛大馬跡陀佛.359~429년)의 <60화엄경 구역(舊譯)화엄경>, 당의 실차난타(實叉難陀.625~710년)의 <80화엄경(唐本. 신역(新譯)화엄경)>, 반야(般若 .795~798)의 <40화엄경>으로 3번 번역(飜譯)됐다.
<화엄경(華嚴經)>은 대승불교(大乘佛敎) 초기(初期)에 성립(成立)된 중요한 경전(經典)으로 <이타사상(利他思想)>을 주창(主唱)하고 있다. <고려시대(高麗時代) 사찰본(寺刹本) 대방광불화엄경진본(大方廣佛華嚴經眞本) 38권(보물 1192호)>은 전북 전주 <한솔종이 박물관>이 소장(所長)하고 있다. 한국문단(韓國文壇)의 원로(元老) 시인(詩人) 고은선생의 <화엄경(華嚴經)>은 1993년 영화(映畵)로 제작(製作)돼 화제(話題)가 되기도 했다.
시인(詩人) <고은선생>은 <화엄경(華嚴經)>에 대해 “중국대륙(中國大陸)과 한반도(韓半島) 그리고 일본(日本)뿐만 아니라, 인도(印度) 등 여러지역의 <화엄경(華嚴經)> 연고지(緣故地)의 설명(說明)을 가중(加重) 시키므로써 살아있는 경전(經典)의 세계(世界)를 구현(具現)해 주고 있다.”고 <화엄경(華嚴經)>을 극찬(極讚)했다.
<화엄경(華嚴經)>은 사무애(事無碍), 이무애(理無碍), 이사무애(理事無碍) 사사무애(事事無碍)로 진행(進行)된다. 화엄경(華嚴經)의 사사무애(事事無碍)라고 하는 것은 눈에 보이는 현실(現實) 그대로가 아무 걸림 없이 완전(完全)한 세계(世界)를 말하고 있다. 사(事)와 사(事)가 걸림없이 자유자재(自由自在)한 대자유(大自由), 진리(眞理)의 세계(世界)를 뜻한다. 사물(事物) 하나 하나가 완전무결(完全無缺)한 진리(眞理)로서 존재(存在)하고 있다. <화엄경(華嚴經)>은 똑같이 완전무결(完全無缺)한 것으로, 모든 시간(時間), 모든 공간(空間), 모든 사물(事物)을 총망라(總網羅)해 똑같은 가치(價値)를 지니고 있다. <화엄경(華嚴經)>은 생각으로써 이해(理解) 되어지는 그 마음의 세계(世界)뿐만 아니라, 지금의 현실세계(現實世界)를 다 합(合)한 것이다.
<원효(元曉617~686)스님>의 특징적인 <한국불교(韓國佛敎)의 화쟁사상(和諍思想)>은 특정 종파(宗派)와 경전(經典)에 얽매이지 않고 <회통(會通)의 불교(佛敎)>로서의 특징(特徵)을 핵심적으로 나타내고 있다. <원효사상(元曉思想)>의 <일심(一心)>은 <화쟁(和諍)>과 함께 <원효사상(元曉思想)>의 큰 바탕이다. 인간의 불성(佛性)은 <마음의 근원(根源)에 귀일(歸一)>하면 누구나 부처가 될 수 있다. 하나된 마음이 <일심(一心)>이다. <화쟁(和諍)>은 원효(元曉)스님이 편찬(編纂)한 <십문화쟁론(十門和諍論)>의 핵심이다. 큰 도(道)는 세상(世上)의 이치(理致)를 두루 꿰뚫고 <소소한 지식(知識)>에 연연하지 않는 <회통(會通)>과 사물(事物)에 널리 통(通)하고 두루 사귀고 어울리는 <통섭(通涉)의 사유(思惟)>다.
1300여 년 전부터 신라(新羅)의 <원효(元曉)스님>은 실재(實在)로 <화엄경(華嚴經)>을 <재가불자(在家佛者)>들에게 가르치셨다. 그리고 <의상(義湘)스님>은 <화엄십찰(華嚴宗刹)>을 세웠다. 부처님의 <팔만사천(八萬四千)> 가르침에는 <무궁무진(無窮無盡)>한 일체 경전(經典) 전체(全體)를 이르는 <대방광불화엄경(大方廣佛華嚴經)>이 가장 우수(優秀)하고 그 진리(眞理)가 높다. 최고다. <화엄(華嚴)이 강조하는 가르침은 중생 (衆生)즉 사람이다.> 불법(佛法)은 요익중생(饒益衆生)하는 <선근회향(善根廻向)>을 최종 목적으로 삼아 <불법적대의(佛法的大意)를 종지(宗旨)>로 삼는다. 그러므로 <보살(菩薩)>은 세간(世間)에 머물면서 <청정(淸淨)하고 수승(殊勝)>함을 밝게 드러낸다. 선찰대본산(禪刹大本山) <범어사(梵魚사. 주지 수불스님)>는 <화엄종찰(華嚴宗刹)>이다.
덧붙여 <유불선(儒佛仙)>을 통달(通達)한 <탄허(呑虛)스님 1913~1983)>은 부처가 행(行)한 <49년 간>의 설법(說法) 중에서 가장 심오(深奧)하고 위대하며 <광대무변(廣大無邊)>한 불교(佛敎) 최고 경전(經典) <화엄경론(華嚴經論)>을 스승 <한암 중원선사(漢庵 重遠禪師1876~1951)>의 집필(執筆) 기구(祈求)에 따라 <1961년부터 1971년까지> 10년 만에 원문(原文) <10조 9만 5천 48자>에 달하는 <화엄경(華嚴經) 80권> 집필(執筆)을 완간(完刊)했다.
집필(執筆) 원고(原稿) <6만 2천 5백>여 장으로 <화엄학(華嚴學)>뿐만 아니라 <동양사상(東洋思想)의 집대성(集大成)>이다. <원효대사(元曉大師)> <의상대사(義湘大師)> 이래 자상한 주석(主席)을 곁들여 우리말로 역해(譯解) 완간(完刊)한 <최대(最大)의 불사(佛事)>로 일컫는다. 여지껏 전 세계에서 자국어(自國語)로 <화엄경론(華嚴經論)>을 <번역(飜譯) 주석(註釋)>한 학자(學者)는 없다. <탄허(呑虛)스님> 뿐이다. 부처님 이후 <3,000년 만에 탄허(呑虛)스님>이 <처음>이다.
<탄허(呑虛)스님>의 스승은 <<한암 중원선사(漢庵 重遠禪師)>>이다. <한암 중원선사(漢庵 重遠禪師)>는 고려시대(高麗時代) 한국불교(韓國佛敎) 최대의 결사운동(結社運動)인 <정혜결사(定慧結社)>를 추진해 <고려불교(高麗佛敎)>에 자정(自淨)의 새바람을 일으킨 <불성(佛性)의 소(牛)를 기르는 목우자(牧牛子)>, <불일(佛日)>, ‘텅 비어 고요한 상태에서 신령(神靈)스런 앎이 있다’는 <공적영지(空寂靈知)>를 말한 <불일보조국사 지눌(佛日普照國師 知訥1158~1210)>이 제창한 <한국적(韓國的) 간화선(看話禪)>으로서의 <보조국사 선수행자(普照國師 禪修行者)> 이다.
덧붙여 <<보조(普照1158~1210)스님>>은 1188년 <대구 팔공산 거조사(居祖寺)>에서 <정혜결사(定慧結社)>를 시작해, <전남 조계산(曹溪山) 송광사(松廣寺. 옛 이름 길상사(吉祥寺))>에서 정법불교(正法佛敎)로의 <불교쇄신운동(佛敎刷新運動)>에 나섰다. 1205년 <정혜사(定慧社)>에서 <수선사(修禪寺)>로 이름이 바뀌었다. <보조(普照)스님>은 <거조사(居祖寺)>를 떠나 <길상사(吉祥寺)=송광사(松廣寺)>로 향할 때, 경남 산청 지리산(智異山) <상무주암(上無住庵)>에 3년 간 머무르며 <선수행(禪修行)>을 했다. 이곳에서 <간화선(看話禪)>을 창시(創始)한 <대혜종고선사(大慧宗고禪師1089~1163)>에 의해 완성된 <간화선(看話禪>)을 만났다.
<보조(普照)스님>은 불교계(佛敎界)의 혼탁(混濁)을 정화(淨化)하고, 바르고 참된 불교(佛敎)의 뜻을 선양해 올바른 부처의 법(法), <정법안장(正法眼藏)>을 재현하기 위해 일생을 바쳤다. <보조 지눌(普照 知訥)>의 첫 저술 <권수정혜결사문>은 고려시대(高麗時代) 무신정권(武臣政權)의 어지러움속에서 <전통(傳統)>과 <근본(根本)>으로 돌아가서 마음의 <평화(平和)>와 <안녕(安寧)>을 구(求)하는 <실천적(實踐的) 수행(修行)>인 <선(禪)>이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보조(普照)스님>이 입적하자 <고려(高麗) 희종(熙宗)>은 <불일보조국사(佛日普照國師)> 시호(諡號)를 내렸으며, 탑에 <감로(甘露)>라는 이름을 내렸다. 이후 <송광사(松廣寺)>는 <16국사(十六國師)>를 배출했다.
그리고 승려, 3.1독립운동 민족대표 33인 중 한 명이며, <님의 침묵>으로 유명한 시인 <만해(卍海) 한용운(韓龍雲1879~1944)>은 <범어사(梵魚寺)>와 <송광사(松廣寺)>에서 승려궐기대회를 개최, 미신(迷信)과 은둔적 불교(佛敎)를 지양(止揚)함으로써 佛敎불교) 본래(本來)의 정체성을 회복, <현대적 불교>의 모습을 제시한 불교개혁안(佛敎改革案)을 담은 <조선불교유신론(朝鮮佛敎維新論)>을 1913년 35세 때 발표했다.
<만해(卍海)>는 한국불교의 정체성을 <임제종(臨濟宗)>으로 보고 “믿음의 대상은 밖을 향한 귀의(歸依)가 해체되고 내면(內面)으로 돌아오는 <회광반조(廻光返照)>”라며, “스스로 믿는 것이 요체인 만큼 밖을 향해 의지할 대상을 찾지말라. 자기의 성품이 귀의하지 않으면 돌아갈 바가 없다. <정(定)>과 <혜(慧)> 어느 곳에도 치우침이 없어야한다”고 했던 <임제종운동(臨濟宗運動)>을 펼쳤다.
<탄허(呑虛)스님>의 <화엄경(華嚴經)>은 우여곡절 끝에 <신화엄경합론(新華嚴經合論)>으로 출판(出版)되어 세상(世上)의 빛을 받았다. 한자로 압축하면 <100만자> 정도로 <화엄경(華嚴經)> 역해(譯解)는 <유불선(儒彿仙)>을 다 <통달(通達)>해야 가능(可能)한 작업(作業)이다. 오직 스승 <한암 중원선사(漢庵 重遠禪師)의 유촉(遺囑)>을 받들어 세상(世上)을 이끌어 갈 <후학(後學)>들이 나오길 바라는 <서원(誓願)>으로 이뤄낸 값진 <기록유산(記錄遺産)>이다. <탄허(呑虛)스님>은 <화엄경(華嚴經)>을 역해(譯解) 완간(完刊)한 공로(功勞)를 인정(認定)받아 <동아일보사 주최 제3회 인촌 김성수문화상>을 수상(受賞)했다.
<<탄허(呑虛)스님>>은 한국근현대(韓國近現代) 최고(最高) 학성(學僧)이다. 또한 <인간기본(人間基本)> 자세를 강조(强調)하며 <유불선(儒彿仙)>에 능통(能通)했던 <교학(敎學)의 대가(大家)>이다. 특히 <선교일치(禪敎一致)>를 강조(强調)했던 <선사(禪師)>로, <교학(敎學)>을 불교적대의(佛敎的大意)에 의해 종지적(宗旨的)으로 다루고 있다. <유불선(儒彿仙)>을 회통(會通)하는 안목(眼目)이 뛰어났던 <선지식(善知識)>이다.
<<탄허(呑虛)스님. 1913~1983년>>은 <전북 김제출신>이다. <법맥(法脈)>은 ‘깨우친 소’ <성우(惺牛. 경허선사(鏡虛禪師. <전북 김제출신> 성(姓)은 송(宋氏)>_ 통도사 극락암 경봉(鏡奉)스님_ 오대산 상원사 한암 중원(漢巖 重遠)스님 _ 고봉(고봉)스님>으로 이어진다. 이분들의 지도하(指導下)에 부처님 사리(舍利)가 모셔진 문수동자(文殊童子) 설화(說話)로 잘 알려진 <강원도(江原道) 오대산(五帶山) 상원사(上院寺)>에서 <3년 동안 묵언(?言) 수행(修行)>한 것은 널리 알려져 있다.
<탄허(呑虛)스님>은 거의 일생(一生)을 석가모니부처님의 진신사리(眞身舍利)를 봉안(奉安)한 전각(殿閣)으로 진신사리(眞身舍利)를 모시기 때문에 대웅전(大雄殿)에 불상(佛像)을 모시지 않는 우리나라 5대 적멸보궁(寂滅寶宮) 중, 한 곳인 <오대산(五帶山) 상원사(上院寺)>에서 보냈다. <우리나라 5대 적멸보궁(寂滅寶宮>은 경남 양산 <통도사>, 오대산 중대 강원도 평창 <상원사>, 강원도 인제 설악산 <봉정암>, 강원도 영월 사자산 <법흥사>, 강원도 정선 태백산 <정암사>이다.
<<탄허(呑虛)>>스님의 스승은 <한암 중원대종사(漢巖 重遠大宗師)>이다. <한암 중원선사(漢巖 重遠禪師)>의 스승은 우리나라 근현대불교(近現代佛敎)의 중흥조(中興祖)로 선풍(禪風)을 일으킨 대강맥(大講脈) <경허선사(鏡虛禪師)>이다. 경허선사(鏡虛禪師)는 ‘화엄종찰(華嚴宗刹) 선찰대본산(禪刹大本山)’ 부산 동래 <범어사(梵魚寺)>와 경남 합천 <해인사(海印寺)> 조실(祖室)로, 해인사(海印寺) <퇴설당(堆雪堂)>에 51세 때부터 56세 때까지 <5년> 간 머물렀다.
<<탄허(呑虛)스님>>은 방대한 양(量)의 <화엄경(華嚴經) 83권을 번역(飜譯)>한 <신화엄경합론(新華嚴經合論)>을 출판(出版)한 당대 <최고(最高)의 선지식(善知識)>이다. “교학(敎學)하는 사람은 참선(參禪)을 해 봐야한다. 참선(參禪)을 통해 교(敎)를 더욱 깊이 이해할 수 있다”며 <화엄사상(華嚴思想)>은 “극미세계(極微世界)로부터 우주(宇宙)까지 과거(過去)_현재(現在)_미래(未來)의 공간(空間)을 관통(貫通)하는 교리(敎理)로, 다양성 가운데 <소통(疏通)>, <평화(平和)>를 꾀할 수 있다”고 전한다.
현대사회(現代社會)의 <분열(分列)> <대립(對立)>의 해답(解答)은 <융합(融合)>과 <회통(會通)>, <협업(協業)>과 <소통(疏通)>의 <<탄허(呑虛)스님(1913~1983년)>의 <화엄사상(華嚴思想)>에 있다. <<탄허(呑虛)스님>>은 <유불선(儒彿仙)> 삼교(三敎)의 동양정통사상(東洋正統思想)을 하나로 일이관지(一以貫之)했다. 덧붙여 기독교(基督敎)와 서양사상(西洋思想)까지 겸(兼)하여 <융합회통(融合會通)>하면서 인간(人間)의 영원한 과제인 <심성수행(心性修行)>을 <선교겸수(禪敎兼修)>로 해 온전한 수행(修行)을 제시했다.
이밖에도 <인재양성(人材養成)>과 <역경(易經)>. <교육사업(敎育事業)>의 보살행(菩薩行)까지 총망라한 20세기 <한국학(韓國學)의 학종(學宗)>이다. <<탄허(呑虛)스님>>은 <한국(韓國)의 미래상(未來像)>에 대해 <주역(周易)>과 <정역(正易)>의 방대한 <역학(易學)>적 근거를 바탕으로, 밝은 <희망(希望)의 비젼>을 미리 밝혀 주목 받고 있다.
뿐만 아니라 유사(有史)이래 제반의 <민족사상(民族思想)>과 <불국토설(佛國土說)>에 점정(點睛)의 일획을 그어준 희유(稀有)의 <미래학자(未來學者)>로 인문(人文). 철학(哲學). 종교(宗敎)의 대도인(大導人)이다. <<탄허학(呑虛學)>>의 <골수(骨髓)>와 <종지(宗旨)>를 이루는 <체(體)>는 <임제선사(臨濟禪師)>의 임제삼구(臨濟三句) 제일구(第一句) <향상일로(向上一路)>및 <경허선사(鏡虛禪師)>와 <한암선사(漢巖禪師)>로부터 이어지는 <회교귀선(會敎歸禪)>의 선풍(禪風)을 꼽는다. <<탄허(呑虛)스님>>의 골수(骨髓)는 <선사(禪師)>다.
강원도 평창 오대산 <상원사(上院寺)>에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국보 제36호 상원사(上院寺) 동종(動鐘)>이 있다. 그리고 오대산(五帶山)에서 가장 오래된 건물 강원도(江原道) 유형문화재 제54호 <영산전(靈山殿)>이 자리하고 있다.
상원사(上院寺) 입구의 커다란 자연석 바위에는 <오대산(五帶山) 상원사(上院寺)> 및 <적멸보궁(寂滅寶宮)>, <문수성지(文殊聖地)> 라는 낙관부위도(落款部位圖) 글씨가 있다. 이 글씨는 경남밀양(慶南密陽) 출신(出身)의 성공회대 석좌교수, 쇠귀(牛耳) 신영복 선생의 글씨다. 신영복 선생은 <담론(談論)>, <강의(講義)>, <처음처럼>, <감옥으로부터의 사색> 등을 출판(出版)하면서 대중적(大衆的)인 인지도(認知度)를 높였다. 선생은 <담론(談論)의 마지막 강의(講義)>를 통해 희망(希望)의 언어(言語)인 <석과불식(碩果不食)>에 대해 깨우치고 있다.
즉 나뭇잎이 다 떨어져 내려 말그대로 나무의 본래(本來) 모습이 적나라하게 다 드러나는 <절망(切望)과 역경(逆境)의 상황(狀況)> 속에서도 삶의 근본(根本)을 지탱하는 뼈대, 체로(體露)를 직시(直視), <뿌리>가 곧 <사람>이라는 것을 밝히고 있다. 즉 뿌리를 거름해 사람을 키우고 역경(逆境)을 극복(克服)한다는 <석과불식(碩果不食)>의 교훈(校訓)이다.
<씨 과일은 후손(後孫)을 위해 다 먹지 않는다>는 것을 전하는, 나뭇가지 끝에 매달린 단하나 남은 과일, <주역(周易)의 산지박(山地剝) 괘(罫)> 그림을 통해 씨앗을 땅에 심고 봄에 새싹을 피워내, 나무로 키우고, 숲을 이뤄내는, 세월(歲月)의 긴 기다림 속에서 자신(自身)을 단련(鍛鍊)하고 거품을 걷어내 환상(幻想)을 청산(淸算)한다는 메시지를 전달(傳達)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