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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의 정체성을 찾아서 - <2_1시리즈 매천 황현의 우국(憂國)과 면암 최익현의 지리산 여행
  • 기사등록 2015-08-30 14:06: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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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에 덧붙여 <율곡(栗谷) 이이(李珥 1536~1584년)>를 소개한다. <율곡(栗谷) 이이(李珥)>는 <퇴계(退溪) 이황(李滉)>과 함께 조선을 대표하는 사상가이며 정치가이다. 3세에 잘 익은 석류를 보고 글을 짓고 9번이나 장원급제를 했다. 율곡이 16세 때 <어머니 신사임당>이 세상을 떠났다. <율곡(栗谷)>은 <어머니 신사임당의 묘>에서 <3년간 동안 시묘살이>를 했다. 


이후 <금강산(金剛山)>으로 들어가 <불교(佛敎)>에 전념했다. 1여 년간 수도(修道)한 후 <20세> 때 일생을 <학문>을 닦아 인격 완성을 지향하겠다는 각오를 다지며 스스로를 경계하기 위해 쓴 <자경문(自警文)>을 지어 성리학(性理學)에 전념했다. 

어린왕 <선조>를 위해 <동호문답(東湖文答)>을 써서 국정현안과 시무를 논했다. 조선 최대의 학자 <퇴계(退溪) 이황(李滉)>과 <성학십도(聖學十道)>에 관해 토론(討論)했다. 39세에는 상소문<만언봉사(萬言封事)>를 올려 시대적 과제에 대한 구체적인 방안을 제시했다. 

제왕학의 교재(敎材)로 <유교정치(儒敎政治) 이념(理念)>을 간추려서 정리한 <성학집요(聖學輯要)>를 선조에게 올렸다. <붕당(朋黨)>의 대립이 심화되자 중립을 견지하려했으나 실패하고 <해주>로 가서 유교사회(儒敎社會) 지식인(知識人)의 기본교양(基本敎養)을 정리한 (격몽요겅(擊蒙要訣)>을 완성했다. 


<해주향약>을 결성해 <사창(社滄)>을 세우고 <조선사회의 폐단을 혁신해 관료사회(官僚社會)의 기강정화 및 민폐 해결>을 위해 끊임없이 노력하는 모습에서 <진리(眞理)>를 대하는 올곧은 <참 스승>의 면모를 찾아볼 수 있다. 율곡(栗谷)은 <16세기 조선을 대표하는 선비>로 <사회의 모순을 개혁>하는데 일생(一生)을 바쳤다. 


<군주(君主)를 교육해 유교적(儒敎的) 이상사회(理想社會)>를 건설하려 노력했다. <붕당(朋黨)을 화합(和合)해 민생(民生)을 안정>시키고 <향촌사회(鄕村社會)를 만들어 인륜질서(人倫秩序)가 지배하는 사회>로 조직하기 위해 노력했다. <퇴계(退溪) 이황(李滉)>과 함께 <성리학(性理學)>을 대표하는 학자로 <조선 성리학(性理學)을 토착화(土着化)> 시키는데 공헌(貢獻)했다. 49세의 짧은 생(生)을 마감했다. 

조선선비의 절개를 굳게지켜 실천한 <면암(勉庵) 최익현(崔益鉉1833~1906)>은 <경기도 포천출신>으로 경기도관찰사를 지낸 구한말 대학자, 애국지사(愛國志士)이다. 성리학(性理學)의 거두(巨頭) <경기도 양평 노문리 화서마을 화서(華西) 이항로(李恒老1792~1868)>의 제자(弟子)다. 


<스승 화서(華西) 이항로(李恒老)>는 <갈대가 많아 노문리>라는 지명(地名)이 붙여진 벽계구곡 <노산정사(蘆山精舍) 생가(生家 시도유형문화재105호)>에서 19세기 서구 열강에 맞서 <위정척사(衛正斥邪)>의 자존을 일깨운 재야(在野) 선비이다. <존왕양이(尊王攘夷)> <창의호국론(倡義護國論)>으로 제자(弟子) 양현수, 김평묵, 최익현, 유중교, 유인석 등 50여 명이 <항일의병(抗日義兵)>을 주도했던 <화서학파(華西學派)>를 이뤄 후학양성(後學養成)에 힘썼다. 


<면암(勉庵) 최익현(崔益鉉)>은 <스승 화서(華西) 이항로(李恒老) 문하(門下)>에서 성리학(性理學)의 기본(基本)을 터득 <스승 화서(華西) 이항로(李恒老)>의 애국(愛國)과 호국정신(護國精神)을 이어받아 자주적(自主的)인 민족사상(民族思想)을 체계화했다. 


1876년 <병자수호조약(丙子修護條約)>이 체결되자 도끼를 들고 궐문밖에서 충의정신(忠義精神)으로 <도끼상소>를 올려 <흑산도>에 유배됐다. 1895년 국모(國母. 민비)가 시해(弑害)되는 <을미사변(乙未事變)>과 <단발령(斷髮令)> 시행으로 <내 머리는 잘라도 내 머리카락은 자를 수 없다>라며 항일운동(抗日運動)을 전개했다. 

면암(勉庵) 최익현(崔益鉉) 대원군이 <사원철폐>를 단행하자 맹렬히 비난 공격해 <대원군을 실각>시켰다. 고종은 부자(父子) 지간을 이간했다는 죄명(罪名)으로 3년간 <제주도>에 유배시켰다. 1906년 <을사늑약체결(1905년)> 되자 망국5적(亡國五敵) <이완용, 박제순, 이근택, 이지용, 권중현>의 처단을 주장하며 <청토역복의제소(請討逆復衣制疏)로 조약무효를 주장했으나 받아들여 지지않았다. </p>


면암(勉庵)의 <왜양일체론>은 배타적 척사론이 아니라 <일본보다 우월한 우리의 역사와 문화적 전통을 지키기 위해 자주성 확보를 주장>한 것이다. 72세의 고령에 전라북도 <태인현(현 전북 정읍시)>으로 가서 <창의소(倡義疏1906년) 포고 팔도사민(布告 八道士民)>이라는 포고문(布告文)을 돌려 민중봉기(民衆蜂起)를 촉구하며 항일의병운동(抗日義兵運動)을 전개했다. 


이 사건으로 일본 헌병에 체포돼 <대마도>로 압송된다. 그때 부산 초량 앞바다에서 모래를 채취해 버선에 담아 <대마도>로 가져가 그곳에 뿌려 일본(日本) 땅을 밟지 않겠다는 의지를 보였다. 대마도에서 유배(流配) 중 일본인들이 주는 물과 음식을 거절, 굳은 의지(意志)로 마지막까지 <민족자주권(民族自主權)>을 위해 항거(抗拒)하다 <대마도>에서 순국(殉國)했다. 


시신이 <부산>에 도착하자 온 부산 사람들이 시장의 가게문을 닫고 면암(勉庵) 최익현(崔益鉉)의 죽음을 애도(哀悼)하며 노제(路祭)를 지냈다. 충남 예산 <모덕사(慕德司)충남문화재자료152호)>는 불의(不義)와 부정(不正)을 척결하는 강직성을 보인 <면암(勉庵) 최익현(崔益鉉>이 살았던 고택(古宅)에 마련된 충의정신(忠義精神)을 기리는 사당(祠堂)이다. 저서로는 <면암집>이 전한다.

이밖에도 <면암(勉庵) 최익현(崔益鉉)>은 특별히 <문창후(文昌候) 고운(孤雲) 최치원(崔致遠)>을 존경했다. 우리나라 <삼신산(三神山)> 중 <금강산(金剛山)>, <한라산(漢拏山)>은 가 보았으나 <두류산(頭流山.지리산)>에 가보지 않아 70세 때 다섯 달에 걸쳐 천리 길을 여행(旅行)했다. <하동(河東)>을 거쳐 함양(咸陽) 안의(安義), <국제연극제>로 널리 알려진 거창(巨創) 수승대(搜勝臺) 광풍루에 오르고 함양(咸陽) 남계서원(南溪書院) 일두 정여창(鄭汝昌)에 제향(祭香) 배례(拜禮)했다. 

함양(咸陽)의 인사가 <신라시대 문창후 고운(孤雲) 최치원(崔致遠)>이 함양태수(咸陽太守)로 있으면서 남긴 인애(仁愛)를 잊지 못해 사모의 뜻으로 학사루(學士樓 경남도유형문화재제90호)를 창건했다.(조선시대 <사림파(士林派)의 사조(師祖) 점필재(?畢齋) 김종직(金宗直)>은 함양현감(咸陽縣監)을 지냈다. 

그때 학사루(學士樓)에 걸린 유자광의 시(詩)를 떼면서 세조 즉위를 비판한 <조의제문>으로 무오사화(戊午士禍)가 일어났다. 점필재(?畢齋) 김종직(金宗直)이 심었다고 전하는 <학사루(學士樓) 느티나무(수령 500년) 천연기념물407호)> 학사루(學士樓)에 오르면 펼쳐지는 <상림(上林)숲 천연기념물154호>은 <문창후(文昌候) 고운(孤雲) 최치원(崔致遠)>이 나무를 손수 심었다고 전한다. 

한편 <중국(中國) 신안(新安)>에 있는 <주자(朱子)의 사당(祠堂)>을 본받아 <중종85년 안동권씨와 성주이씨>가 창건한 송나라 때의 유학자(儒學者) <주자(朱子)와 우암(尤庵) 송시열(宋時烈)의 영정(影幀)이 봉안(奉安)>돼 있는 <산청(山淸) 단성(丹城) 신안정사(新安精舍)>에서 유숙(遊宿)하고 <적벽강(赤壁江 경호강)>에서 배를 타고 <진주(晉州)> 청수(淸水)를 지나 <포은(圃隱) 정몽주(鄭夢周)의 화상(畵像)>을 배알(拜謁) 했다. 


한편 <고운(孤雲) 최치원(崔致遠)은> 함양태수(咸陽太守)로 있을 때 경남산청, 전남구례, 경남하동, 전북남원이 함께 연결돼 있는 지리산(智異山국립공원제1호) 천왕봉(天王峰1915M) 하늘아래 첫 절집 <벽계암 법계사(法界寺해발1450M)>를 자주 찾았다. 


이곳 문창대(文昌臺)에서 건너편 <향적대>를 향해 활쏘기를 했다. 고운(孤雲) 최치원(崔致遠)의 <시호(諡號)>를 따서 법계사(法界寺)를 <문창대(文昌臺)>라 부르기도 한다. <면암(勉庵) 최익현(崔益鉉)>은 이곳에서 연구(聯句)를 짓고 거닐다 내려왔다. <법계사(法界寺)>에는 <고려초기3층석탑(보물제473호)>이 자리하고 있으며 <해인사(海印寺) 말사>로 신라 진흥왕(5년 544년)에 <연기조사>가 세웠다고 전한다. 

<산청(山淸) 산천재(山天齋)>를 지나 <남명(南冥) 조식(曺植)> 묘소를 배알(拜謁)하고 <합천> 삼가(三嘉縣)에 이르러 <모려(茅廬) 최남두(崔南斗)> 공(公)이 학문(學文) 강론(講論)을 하던 <향옥재(香玉齋)>를 방문했다. 


합천 <해인사(海印寺)>가 자리한 <가야산(伽倻山)>은 <문창후(文昌候) 고운(孤雲) 최치원(崔致遠)>이 숨어살다 일생을 마친 곳이다. <해인총림(海印叢林) 법보사찰(法寶寺刹) 해인사(海印寺)>에서 이틀 유숙(遊宿)했다. 


다시 <진주(晉州)>를 방문해 <촉석루(矗石樓)>를 관람하고 <사직에 대한 정충은 뭇 별이 북두를 옹위했고(社稷眞忠星北洪/ 천자께 조회하는 큰 의리는 물이 동으로 흐른다(朝宗大義水東流)> 라는 시(詩) 짓고 <창렬사(彰烈司)>를 배례(拜禮)했다. 


다시 <하동(河東)> <악양정(岳陽亭) 일두 정여창(鄭汝昌)>이 강학(講學)했던 <쌍계사(雙鷄寺)>에 들어가 학사당(學士堂) <문창후(文昌候) 고운(孤雲) 최치원(崔致遠) 화상(畵像) 배알(拜謁)>했다. <진감선사(眞監禪師)의 비(碑)>를 관람하고 청학루(淸鶴樓)에 모였다가 <호남경계>로 들어갔다. <구례 화엄사(華嚴寺)>와 <남원 천은사(泉隱寺)>를 모두 유람(遊覽)했다.

현재 <경남 산청군 시천면>에는 <남명(南冥) 조식(曺植1501~1572)>을 기리는 <덕천서원(德川書院)>이 있다. 남명(南冥)은 <경남 합천 삼가현(三嘉縣) 외가(外家 인천 李氏)>에서 태어났다. <22세>때 <김해(金海)>에 사는 남평 조씨에게 장가들었다. 이후 김해 대동면 예안리 주동마을 <처가(妻家)>에 정착했다. 그곳에 <산해정(山海亭)>을 짓고 학문에 정진하며 <8년간 후학(後學)을 양성(養成)>했다.


<남명(南冥)은 경상우도(慶尙佑道)>를 <퇴계(退溪) 이황(李滉)>은 경상좌도(慶尙左道)>를 대표했던 <영남유림(嶺南儒林)>의 양대 거목(巨木)이다. <남명(南冥)>은 61세에 지리산(智異山) 천왕봉(天王峰)이 병풍처럼 둘러싸고 있는 덕산(德山)으로 옮겨 덕천강(德川江)가에 <세심정(洗心亭)>을 세웠다. 또한 <산천재(山天齋)>를 세워 후학(後學)을 양성(養成)했다.<남명(南冥)의 학문사상>은 <경(敬)>과 <의(義)>로 집약된다.


특히 <주역(周易)>의 <경이직내(敬以直內)/의이방외(義以方外)>에서 <경(敬)>은 내적 수양을 통해 마음을 밝고 올바르게 해 근본(根本)을 세우는 것이며 <의(義)>는 <경(敬)>을 근본(根本)으로 해 제반사를 대처함에 있어 과단성 있게 실천(實踐)하는 것을 뜻한다. 

남명(南冥)은 <학문과 삶이 일치되는 것을 강조>했다. 백성들의 곤궁한 생활을 마음 아파하며 <위민정치>를 역설했으며 특히 <군사의 중요성>을 인식해 제자(弟子)를 가르쳤다. 당대의 석학(碩學)들은 남명(南冥)의 학덕을 계승해 <사람이 중심>이 됐다. <남명(南冥)의 제자>들은 <곽재우>, <정인홍>, <김년> 등 <3대 의병장>을 비롯해 50여 명의 의병장들이 있다. 


이들은 <임진왜란(壬辰倭亂)>의 국난극복에 선봉이 됐다. 남명(南冥)의 교육(敎育)은 <개성교육(個性敎育)>으로 <개인(個人)의 자질(資質)>에 따라 가르쳤다. <제자백가(諸子百家)를 섭렵(涉獵)>해 <자기것으로 만드는것>을 중시했다. 이밖에도 성리학(性理學)의 이론적인 측면만을 궁구함에 따른 폐단을 익히 알고 <실천(實踐)>을 중시했다. 


제자(弟子)들에게 성리학(性理學) 뿐만 아니라 <천문지리, 의학, 궁마, 항진> 등의 학문도 가르쳤다. 68세에 학문적 성과를 집약해 상소문 <무진봉사(戊辰封事)>를 올려 불합리한 현실을 개선 타개해 정치의 폐단 및 개혁할 대안을 제시, 도리(道理)를 다했다. 72세에 이곳 산천재(山天齋)에서 유명을 달리했다. 광해군 때 <문정(文貞) > 시호(諡號)>와 함께 <영의정>에 추증됐다. 

<매천(梅泉) 황현(黃玹 1855~1910))>은 전남 구례의 선비로 시인(詩人)이며 우국지사(憂國之士)이다. <매천(梅泉) 황현(黃玹)>은 <면암(勉庵) 최익현>이 <대마도>에 잡혀가 굶어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부산>에 와서 상문(喪門)을 했다. 저서 <매천야록(梅泉野錄)>에는 구한말 동아시아를 비롯한 세계사의 흐름과 존망의 위기에 처한 조국의 실상을 세세하게 기록했다. 


을사늑약(1910년)이 체결되자 “국가에서 선비를 길러온 지 5백년이 되었는데 나라가 망하는 날에 한사람도 죽는자가 없어서야 되겠는가(?)”라는 선비의 기상을 드러냈다. 그리고는 “나는 왜 목숨을 끊느냐 하면 <조선의 선비>들은 입만 열면 <선비>라고 말했다. 입만 열면 나라에 <충성(忠誠)>한다고 얘기했다. 그런데 나라를 빼앗겼는데 왜 선비들이 아무말하지 않고 가만히 있는가(?) 이 나라에 선비가 있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나는 목숨을 끊는다”라고 말했다. 


자결(自決)하면서 <가을밤 등잔 밑 책 덮고 지난 역사 생각해보니(秋燈掩卷懷千古)/ 인간세상 지식인 노릇 너무나 어렵구나(難作人間識字人)> 등 4수의 절명시(絶命詩)를 남겼다. 매천(梅泉) 황현(黃玹)의 죽음은 지식인(知識人)으로서의 책임을 다하고 선비의 도리(道理)를 다하기 위해 스스로 선택한 길이다. 전남 구례에는 <매천(梅泉) 황현(黃玹)>을 기리는 사당 <매천사(梅泉司)>가 자리하고 있다. 

덧붙여 지리산 노고단과 섬진강을 배산임수(背山臨水)로 해 천하명당 금환낙지(金環落地) <구름속의 새처럼 숨어사는 집>이라는 뜻의 <운조루(雲鳥樓)>가 전남 구례군 토지면 오이리에 있다. <운조루(雲鳥樓)>는 조선영조52년(1776년)삼수부사, 낙안군수를 지낸 <류이주(柳爾?1726~1797)>가 지은 99칸의 대저택이다. <자선 쌀 뒤주를 마련해 가난한 사람 누구나 쌀을 퍼 가시오>라는 <타인능해(他人能解)> 즉 <다른 사람도 누구나 이문을 열 수 있다>는 글귀를 적어 놓은 쌀 뒤주가 있다. 


조선시대 양반들의 남에 대한 배려 <노블레스 오블리제>의 전형이다._

시(詩) 유자효 <겨울 운조루> 전문 <겨울 운조루를 보았느냐/ 그 단아함 속에 깃든/ 단호함을 보았느냐/ 쑥대머리처럼 헝클어진/ 종부의 머리/ 문 닫힌 사당 앞에/ 지천으로 흩어져 날리고 있는/ 갈대의 잔해/ 쓸만한 자식들은 모두 떠나고/ 무엇에 놀랬는지/ 늘 도망쳐 다니는/ 젊은 종손이 지키고 있는/ 누백 년 늙은 퇴옥/ 호랑이뼈 대신/ 말뼈가 걸린/ 슬픈 권위의 잔해/ 시골 양반의 위엄과 음덕을 그늘처럼 깔고앉아서/ 이제는 눈 속에 묻혀 사라져 가는/ 겨울의 전설/ 그 서릿발 같은 아름다움을 보고 있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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