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 바다가 날이 날마다 조상도 없이/ 물결치고 있는 것은 오래/ 하늘이 되고 싶기 때문이리라/ 그렇지 않고서야 저 하늘이 /저토록 어리석은 듯 밤낮으로/ 구름을 일으키고 구름을 지워버리는 것은/ 바다에 내려오고 싶기 때문이리라/ 그렇지 않고서야 내가 빈병같이/ 나만으로 살수 없는 것은/ 내 살붙이만으로 살수 없는 것은/ 내가 단 한번 만이라도/ 남이되어 보고 싶기 때문이리라/ 그렇지 않고서야 나 하나 에워싼/ 이세상의 수없는 남들을 모르는/ 무지를 살 수밖에 없으리라/ 사람들이여 소년에게 놀라라/ 소년의 노래에 놀라라/ _<‘소년의 노래’ 詩 .고은>
<산숭해심(山崇海深) 산은 높고 바다는 깊다/ 유천희해(遊天戱海) 하늘에서 놀고 바다에서 논다>_19세기 조선 지성사의 꽃 <추사(秋史) 김정희(金正喜 1786~1856 충남<예산>출생)>의 정신세계와 오늘날 노벨문학상에 오르내리고 있는 <고은 시인>의 위 작품은 원융무애(圓融无涯)로 서로 통하고 있다.
<산처럼 높고 바다처럼 깊은 수명과 산처럼 높은 인품과 강물처럼 길이 전할 명예를 누리소서 그리고 하늘에서 노는 고니처럼 한가하고 바다 위를 나는 기러기처럼 한가하고 바다 위를 나는 기러기처럼 자유로운 삶을 누리소서>_
<산숭<span style="line-height: 23.7999992370605px">해심(山崇海深)>은 청나라 서예가 <옹방강(翁方綱)>의 실학정신을 칭송한 것으로 중국 송나라 때의 학자 <팽구년(彭龜年 1142~1206년)>의 시(詩) ‘광수(廣壽)’ <누가 장수(長壽)하기를 마다하겠는가? 장수(長壽)하는 방법으로는 덕(德)을 쌓는 것보다 나은 게 없지....>와 한나라 때의 은자(隱者) <엄광(嚴光)>의 사당에 <인품과 도덕이 산처럼 높고 밝은 명예가 강물처럼 길게 오래도록 이어질 것>을 칭송한 <산고수장(山高水長)>에 대한 기록(紀錄)이 <범성대(范成大 1126~1193년)>의 글에 전한다.
<추사(秋史)>의 학문에 대한 광대무변(廣大無邊)함을 엿 볼 수 있는 부분이다. <추사(秋史) 김정희(金正喜)>는 1809년 동부사지로 임명된 아버지 김노경(金魯敬)을 따라 북경(北京)에 갔다. 그때 청나라 북학파(北學派)의 주류 완원(阮元), 옹방강(翁方綱) 등에게서 금석학(金石學)과 고증학(考證學)을 배웠다.
추사(秋史)는 당시 중국 청나라 고증학파 최고학자 완원(阮元), 옹방강(翁方綱) 등과 교류하면서 경학(經學), 금석학(金石學), 문자학(文字學), 사학(史學), 지리학(地理學), 천문학(天文學)에 이르기까지 최고의 경지에 올랐다. 학문(學問) 사상(思想) 예술(藝術)의 학예일치(學藝一致)를 비롯해 이상적 경지에서 한자(漢字)가 본래 가진 회화미(繪畵美)를 절정에 이르게 했다.
1816년 <북한산순수비>가 <진흥왕순수비>임을 <김경연>, <조인경>과 함께 고증했다. 1819년 문과 급제해 한림학사를 거쳐 규장각시교, 성균관대사성, 병조참판 등을 역임했다. 특히 <서예(書藝)>를 순수한 <조형예술>로 승화(昇華)시켜 당시 동아시아를 장악한 서성(書聖) <왕희지(321~379)>의 문자미(文字美)를 뛰어넘은 것은 추사(秋史)의 글로벌리즘적 사고의 결정체로 평가된다.
또한 <추사(秋史)>는 제주도 유배시절 제자(弟子) 우선<(藕船) 이상적(李尙迪)>이 어려움을 무릅쓰고 청나라 연경에서 구해온 책을 제주도로 보내왔다. 추사(秋史)는 스승을 극진히 섬기는 고마움의 표시로 사제간(師弟間)의 변치않는 의리(義理)를 세한송(歲寒松)에 비유해 <세한도(歲寒圖 보물180호)>를 그려준다.
이밖에도 추사(秋史)는 <잔서완석루> <반야심경첩보물 547호> <죽로지실> 등 금석고증학을 바탕으로 완성한 추사체(秋史體)로 쓴 많은 서예 작품을 남겼다.
추사(秋史)의 르네상스적 작품 <서학(西學)> <경학(經學)> <금석학(金石學)> 등은 불교(佛敎) 선교종지(禪敎宗旨)를 요해(了解)한 동아시아의 대표적 대선지식인, 대문장가, 대시인, 대서예가, 고증학(考證學) 문호를 개설(開設)한 대학자, 일격화풍(逸格畵風)을 정착시킨 대화가 <추사(秋史)>의 면모를 부각시키는 작품들이다.
특히 북경(北京)에서부터 차(茶)를 가까이 했던 <추사(秋史)>는 제주도 유배시절 <해남(海南) 대흥사(大興寺) 초의선사(草衣禪師)>와 자주 서찰을 주고 받았다. 초의선사(草衣禪師)는 추사(秋史)에게 햇차를 선물했다. 그때 감사의 화답(和答)으로 <대흥사(大興寺) 대웅보전(大雄寶殿)> 편액을 써 보냈다. 또한 초의선사(草衣禪師)에게 전남 강진에서 차(茶)를 대접 받고 쓴 작품이 <명선(茗禪)> 이다.
1840년 추사(秋史)는 헌종 즉위와 순정왕후 섭정 시기, <윤상도의 옥>에 연류돼 1848년까지 <9년간> 제주도에 유배됐다. 이어 1851년부터 1852년까지 함경북도 북청에 유배 됐으며, 이후 1855년 <과천 관악산> 기슭에 은거하면서 학문과 회화로 후학양성(後學養成)에 진력했다. 1856년 71세로 생(生)을 마무리 귀천(歸天)했다. 추사(秋史)에 대한 평가와 칭송은 헤아릴 수 없이 많다.
덧붙여 1840년 조선의 사학엄단에 의해 서학(西學) 정약용, 정약정, 이승훈 등 100여 명이 처형 또는 유배되는 <신유사옥>으로 친분이 있던 <정약용>이 <전남 강진>에 유배됐다. 그때 <정약용>은 후학양성(後學養成)에 진력했다. 그곳에 천민신분으로 글짓기에 뛰어난 <애(愛) 제자 황상(黃裳)>이 있었다.
<추사(秋史)>는 1848년 제주도 유배에서 풀려나 올라오던 길에 가까웠던 <황상(黃裳)>을 찾았다. <황상(黃裳)>에게 차(茶) 대접을 받은 <추사(秋史)>는 예서(隸書), 전서(篆書)의 형(形)을 살린 죽로지실(竹爐之室)을 선물했다. <추사(秋史)>는 정(情)과 도리(道理)를 인생가치의 정점에 두고 사제간(師弟間)의 존경(尊敬)과 사랑 학자로서 뜨거운 우정(友情)을 지닌 원융(圓融)한 인격자(人格者)로써 오늘날 우리가 본받아 마땅하다.
<고려>는 고종 당시 1206년 <시베리아 바이칼 호수> 부근의 <테무진(1162년~1227년)>은 오논 강변의 평원에서 전 유목민 집단 집회를 개최해 <몽골제국>을 창설했다. 그가 바로 <세계정복>이라는 명쾌한 목표를 가지고 <실크로드 중심부>를 지배하던 <호라즘(Khwarezm)제국> 즉 지금의 <이란>, <우즈베키스탄>, <카자흐스탄>, <아프카니스탄> 일부 지역을 정복하며, <몽골대제국>을 건설한 ‘빛의 신’ <칭기즈칸>이다. 세계정복을 거의 마무리한 <징기즈칸>은 본격적으로 <고려>를 지배하려 했다.
이러한 <몽골>의 침략에 <고려> 조정은 난공불락의 요새인 <강화도 천도(1232년.고종19년)>를 결정했다. <해전(海戰)>에 약한 몽골군은 <소백산>을 넘어 <경상도>까지 남하(2차몽골군 침입) 했다. 이때 <대구> <팔공산 부인사(符仁寺)>에서 <고려>의 보물인 <초조대장경>이 몽골군에 의해 불에 타는 역사적 큰 슬픔을 남긴다.
한편 <처인성(處仁城.용인)>에서 몽골군을 지휘하던 <살리타이>가 <승려 김윤후>와 <부곡민>의 저항에 부딪히다 <김윤후>가 쏜 화살에 쓰러져 <2차 대몽 전쟁>은 끝이 났다. <살리타이> 죽음에 대한 보복으로 <몽골의 3차 침입(1235년. 고종22년)>은 <충주 이남>까지 내려왔다. 이에 <몽골군>을 물리치려는 염원을 담아 불력(佛力)의 나라 <고려>는 <팔만대장경(八萬大藏經)>을 만들며 <몽골군>과 처절하게 싸웠다. 이때 <경주 황룡사9층 석탑> 등 많은 <문화재>가 파괴됐다.
1241년 몽골의 <오고타이>가 사망하면서 부족간 갈등이 일어났다. <오고타이>의 <미망인 토레게네>가 섭정(1246년)하면서 대외 정복을 일시 중단했으나 <정종 구유크(貴由. 1246~1248년)>가 즉위하면서 전쟁이 다시 시작된다. 당시 <로마교황 이노센트 4세>가 <구유크칸>의 <재위식>에 <편지>를 보냈다는 기록은 참으로 흥미롭다.
<로마교황 이노센트>는 편지에 <“당장 살육을 멈추고 신앙을 가져라”>고 했다. 이에 <구유크칸>은 <“짐이 너에게 이르노라. 너희는 그리스도를 신봉한다며 다른이들을 무시하는데 과연 하늘은 누구에게 은혜를 베풀겠느냐? 지금이라도 너 교황은 일체의 권위를 버리고 짐에게 와서 투항하라. 만일 그렇지 않을 경우 짐은 너를 적으로 여길 것이며 그 뒷일은 하늘만 알 것이다”>고 했다.
특히 <고려>의 <삼별초>는 <여몽 연합군>을 막아내기 위해 <청주(충북)>, <해양(광주)>, <상주(경북)> 지역의 지방인들이 배에 몸을 싣고 <서해안>으로 해서 <74일간>의 항해 끝에 <진도>로 갔다. <진도의 용장사(龍欌寺)>를 궁궐로 삼고 <몽골>과 <괴뢰정부>를 타도하겠다고 선포했다.
<삼별초>는 <남해의 제해권(制海權)>을 장악하고 <전라도>의 여러 고을과 <밀양(密陽)>까지 장악했다. 이런 소식을 접한 개경정부는 <탐라(제주)>지역 공략에 대비해 <영암부사 김수(金須)>와 <장군 고여림(高汝林)>에게 군사 천명을 내주며 <제주도> 해안가를 따라 <120km>나 되는 <환해장성(環海長城)>을 쌓게했다. 하지만 <탐라(제주)>는 숙종10년 1105년 이전까지 <고려>에 조공을 바치는 독자적인 지역으로 관리의 수탈이 심해 <삼별초>가 들어오자 적극 호응하여 <삼별초>의 두 번째 근거지가 됐다.
<전라도 추토사(追討使) 김방경>이 <몽골장수 아해(阿海)>와 <여몽연합군>을 형성해 <삼별초>를 공격했으나 대패 1271년(원종12년)원나라 황제는 <삼별초>에 항복 친서를 들여 사신을 <진도>로 보냈지만 <배중손>은 원나라 사신을 억류하고 끝까지 싸우겠다는 의지의 표명으로 대동한 원나라 군사 90명을 죽였다. 이에 내륙지방에서도 <삼별초> 정부에 호응하는 반란이 연달아 일어났다.
제일 먼저 <밀성(密城.밀양)>에서 시작된 반란이 <청도(淸道), 일선(一善=구미>) 등 <영남 내륙> 전체의 호응을 얻었고 <개경>에서까지 <관청노비 숭겸(崇謙)과 공덕(功德)>의 주도로 <반란>이 일어났다. 한편 <삼별초>에 거절 당한 원나라 황제는 고려인 6천명을 징발, <여몽 연합군> 전함 4백척으로 <진도>를 급습 <용장성(龍欌城)>이 불바다가 되고 섬 전체가 연기와 울부짖음으로 가득했다.
<배중손>, <김통정>, <노영희>는 혈투를 벌였지만 <배중손>은 날아오는 화살을 피하지 못한 채 전사했다. <삼별초>의 수도 <진도>는 그렇게 무너졌다.
<전라남도 순천 옥천서원(玉川書院.전라남도문화재자료 제4호)>에는 <퇴계(退溪) 이황(李滉)>이 친필로 쓴 현판 <임청대(臨淸臺(전라남도유형문화재 77호)>가 자리하고 있다.
<임청대(臨淸臺)>는 조선 연산군 재위(1494~1506년) 당시 <무오사화(戊午士禍.1498년)>에 연루돼 순천에 유배됐던 <매계(梅溪) 조위(曺偉>)와 <문경공(文敬公) 한훤당(寒暄堂) 김굉필(金宏弼 1454~1504년)>이 귀양살이 3년 동안 천변(川邊)에서 소일하면서 돌을 쌓아 대(臺)를 만든 것이다.
<중국 진(晉)나라 때의 시인(詩人)> <도연명(陶淵明)의 귀거래사(歸去來辭)>에서 따온 <항상 마음을 깨끗하게 가지라(臨淸臺)>라는 뜻으로 시(詩)에 뛰어난 <매계(梅溪) 조위(曺偉)>가 이름 붙였다. 비석(碑石) 뒷면에는 <매계(梅溪) 조위(曺偉)>가 쓴 글이 새겨져 있다. <매계(梅溪) 조위(조위)>는 시(詩)에 뛰어나 성종(成宗)의 총애를 받았다.
고려말의 온건 개혁파 사림파(士林派)는 <정몽주>, <길재>, <김종직>으로 이어진다. <한훤당(寒暄堂) 김굉필(金宏弼 1454~1504 本貫 서흥(瑞興)>은 <경북달성> 출신이다. <경남 밀양> 출신의 <영남사림학파(嶺南士林學派)> <점필재(?畢齋) 김종직(金宗直 1431~1492년)>의 제자(弟子)다. 또한 <정암(靜菴) 조광조(趙光祖)의 스승>이다. <한훤당(寒暄堂) 김굉필(金宏弼)>은 의리(義理)를 중시해 옳지 못한 일은 그냥 넘기지 않았다. 강직하고 호방한 성격에 활달하고 당당했다.
<한훤당(寒暄堂) 김굉필(金宏弼)>은 유학(儒學)의 도통(道統)>을 이어받은 도학(道學)의 비조(鼻祖)>로 성리학(性理學)에 달통(達通)했다. <모든 학문의 시작을 소학(小學)에 두어야한다>는 <스승 점필재(?畢齋) 김종직(金宗直)>의 가르침에 따라 <인의(仁義)>를 목숨보다 소중하게 여겼다.
조선시대의 진정한 선비로 <만약 군주(君主)가 도(道)의 자리에 서서 법(法)을 만들고 신하(臣)와 백성(民)을 다스린다(治)면 질서(秩序)가 잡히고 전쟁(戰爭)은 사라질 것이다>라고 말했다.
계절의 순환 속에서 자연의 섭리에 따라 자기를 수양(修養)하고 학문(學問)을 연마해 후학(後學)을 가르쳤다. <한훤당(寒暄堂) 김굉필(金宏弼)>은 도학자(道學者)로서 그의 학문(學問)과 삶은 일치했다. 평생 <소학(小學)>을 실천(實踐) 궁행(躬行)해 <소학동자(小學童子)>라 자칭하며 겸양(謙讓)의 미덕(美德)을 보였다. 또한 <퇴계(退溪) 이황(李滉)>으로부터 도학(道學)의 으뜸 스승 즉 <근세(近世) 도학지종(道學之宗)>으로 칭송(稱頌) 받았다.
<한훤당(寒暄堂) 김굉필(金宏弼)>은 <스승 김종직(金宗直)의 문하(門下)>에서 <정여창(鄭汝昌)>과 <지동도합(志同道合)>의 인연(因緣)을 맺고 학문(學問)을 배워 죽을때까지 <사림(士林)의 지사(志士)>로 뜻을 같이했다. 한훤당(寒暄堂) 김굉필(金宏弼)은 스승 점필재(?畢齋) 김종직(金宗直)으로부터 진실로 학문(學問)에 뜻을 둔다면 <소학(小學)>을 필독서(必讀書)로 해 행동(行動)의 지침서(指針書)으로 삼아야한다는 가르침을 받았다.
<자신의 몸과 마음을 먼저 닦는게 우선>이라는 <소학(小學)>을 다시 읽고 찬찬히 생각하라>는 뜻을 받들어 평생 실천(實踐)했다. 한훤당(한훤당) 김굉필(김굉필)은 당시 조선사회의 소학(小學)을 실천윤리(實踐倫理)의 기본교육재(基本敎育材)로 삼고자 했던 유학(儒學) 정착에 결정적인 기여를 했다.
이때 <퇴계(退溪) 이황(李滉)>은 <지금까지 도학(道學)을 공부한 이들이 있었지만 그 결과는 <경서강독>이나 <문장>을 짓는데 그쳤다. <오로지 몸을 닦는 것을 일삼아 참다운 실천>으로 공부한 사람은 오직 <한훤당(寒暄堂) 김굉필(金宏弼)> 뿐이었다>며 칭송했다. 한훤당(寒暄堂) 김굉필(金宏弼)은 <당송팔대가(唐宋八大家)> 중 한 사람인 한유(韓愈768~824)가 지은 서사문(敍事文)의 걸작 <장중승전후서(長中承傳後敍)>에서 <남아가 죽을지언정 불의에 굴복해서는 안된다>는 대목을 즐겨 읽었다.
한유(韓愈)는 <널리 사랑하는 것을 인(仁)이라 하고 행(行)하여 이치(理致)에 맞는 것을 의(義)라 하며 이를 따라 가야만 하는 것을 도(道)라 하고 자기에게 충족돼 있어 외부에서 기대함이 없는 것을 덕(德)이라 했다.> 한유(韓愈)의 창려집(昌려집)에는 <귀한이건 착한이건 어른이건 아이건 구분없이 도(道)가 있는 곳이 스승이 있는 곳이다>라고 했다 이 말은 <실천하려고 노력하고 있다. 도(道)를 숭상해 그 자세가 삼엄했다>로 <실천(實踐)의 중요성>을 강조한 말이다.
한훤당(寒暄堂) 김굉필(金宏弼)의 실천력(實踐力) 있는 의리(義理)를 지키는 태도를 보여 주는 한 예가 <대사헌(大司憲) 옥계(玉溪) 반원형(半圓形)>이 제자(弟子)가 되겠다고 찾아왔을 때다. 그때 한훤당(寒暄堂) 김굉필(金宏弼)은 선비로써 반드시 지켜야 할 도학(道學)의 기초로 <소학(小學)>에 나타난 <수기수행(修己修行)>이 바로 <의리실천(義理實踐)>의 필수 조건이라는 것을 가르쳤다.
그러면서 <한빙계(寒氷戒) 18조>를 써 옥계(玉溪) 반원형(半圓形)이 계심(戒心)으로 삼게 했다. <한빙계(寒氷械)>는 <선비로서 가난하고 얼음처럼 찬 이성(理性)으로 얇은 얼음을 밟듯이 더욱 자신을 경계하라>는 뜻이다. <갓을 바로 쓰고 꿇어 앉아라. 욕심을 막고 분함을 참아라. 가난에 만족하며 분수를 지켜라. 사치를 버리고 검소함을 따르라. 날마다 새로워지는 공부를 하라. 말을 함부로 하지말라. 마음을 한결같이 해 두 갈래로 하지 마라. 마지막을 시작할 때 처럼 조심하라> 등을 생활속에서 실천하라는 내용을 담고있다.
소학(小學)은 <주자(朱子)>가 <제자 유자징>에게 지시해 고전의 핵심만 뽑아 엮은 <주자사상(朱子思想)>의 <핵심>이며 <유교(儒敎)>의 기반이다. <소학(小學)>부터 읽어야한다는 사림파(士林派)가 조선 정치권을 차지한 근본 이유는 사익(私益)보다는 공익(公益)을 추구하고 깨끗하며 도덕적이기 때문이었다.
<한훤당(寒暄堂) 김굉필(金宏弼)>은 조선 유림(儒林)의 <동방오현(東方五賢)>으로 <일두(一?) 정여창(鄭汝昌)>, <정암(靜菴) 조광조(趙光祖1482~1519)>, <회재(晦齋) 이언적(이언적)>, <퇴계(退溪) 이황(李滉)> 등을 꼽는다. 이 중 <한훤당(寒暄堂) 김굉필(金宏弼)>이 단연 수현(首賢)이다.
<한훤당(寒暄堂) 김굉필(金宏弼)>은 <정암 조광조>, <퇴계 이황>, <율곡 이이>, <다산 정약용>, <매천 황현>으로 이어지는 조선 선비의 상징적 사표(師表)다. <당나라 다경(茶經>)의 저자 <육우(陸羽)연구>에 전심(全心) 했다. 처가가 있는 <합천 야로>에 한훤당(寒暄堂) 서재(書齋)를 짓고 그곳 학자들과 교류를 가졌다.
21세 때 <함양군수>로 부임해 그곳의 <점필재(?畢齋) 김종직(金宗直)>의 문하생이 됐다. <한훤당(寒暄堂) 김굉필(金宏弼)>은 조선 선비 <최초로 성균관(成均館) 문묘>에 배향(配享) 됐다. 현재 <성균관 대성전>에는 <설총>, <최치원>, <안향>, <정몽주>, <정여창>, <조광조>, <이언적>, <이황>, <이이>, <송시열>, <송준길>, <박세채>, <성혼>, <조헌>, <김인후>, <김집>, <김장생> 등 <동방18현의 위패>가 모셔져있다.
연산군 4년(1498년) <점필재(?畢齋) 김종직(金宗直) 문하(門下)>의 <탁영(濯纓) 김일손(金馹孫)>이 성종(成宗 재위1469~1494년) 25년간의 역사를 기록한 <성종실록(成宗實錄>에 스승 김종직(金宗直)이 생전에 지은 사초(史草) <조의제문(弔義帝文)>을 넣으려고 했다. <조의제문(弔義帝文)>은 <세조에게 죽음당한 단종(端宗)을 중국 진(秦)니라 말기의 무장(武將) 항우(項羽)에게 죽은 초(楚)나라의 회왕(懷王) 즉 의제(義帝)에 비유한 것으로 세조의 왕위 찬탈을 은근히 비난한 글이다.>
<성종실록(成宗實錄)> 편찬 책임자 <이극돈(李克墩1435~1503)>이 이것을 문제 삼았다. 이를 계기로 조선 초기 세조의 왕위 찬탈에 협조해 정치적 실권을 장악한 귀족 대신 훈구파(勳舊派)들이 사림(士林)을 탄압하는 <무오사화(戊午士禍)>를 일으켰다.
이때 <점필재(?畢齋) 김종직(金宗直) 문하(門下)> <김일손(金馹孫)>을 비롯한 <사림파(士林派)> 신하들이 <부관참시(剖棺斬屍)> 당했다. <한훤당(寒暄堂) 김굉필(金宏弼)> 또한 <점필재(?畢齋) 김종직(金宗直).의 <제자(弟子)>로써 <평안도 희천(熙川)>에 유배됐다. 2년 후 <전남 순천(順天)>으로 유배지를 옮겼다.
1504년 나이 51세(연산군10년) 때 <갑자사화(甲子士禍)> 일어나 <무오당인(戊午黨人)>이라는 죄목이 더해져 <한훤당(寒暄堂) 김굉필(金宏弼)>이 <전남 순천>에서 죽음을 맞았다. <한훤당(寒暄堂) 김굉필(金宏弼)>의 고향은 <경북 달성> 이었다.
이때부터 <영남(嶺南)> 사람들이 <전라도> 땅에 뿌리 내리게 된 연유라 전한다. 이후 <점필재(?畢齋) 김종직(金宗直)>은 제자(弟子) <정암(靜菴) 조광조(趙光祖>)에 의해 명예를 회복했다. 경북 달성군 고향에는 <소학세가(小學世家)>를 이룬 <한훤당(寒暄堂) 김굉필(金宏弼)>의 <학문(學問)과 덕행(德行)>을 기리기 위해 <도동서원(道東書院>이 세워졌다.
<“공자의 도(道)가 동(東)쪽으로 왔다”>는 뜻으로 우리나라 서원(書院)중 으뜸인 <수위서원(首位書院)>이다. 덧붙여 한훤당(寒暄堂) 김굉필(金宏弼)의 제자(弟子) 정암(靜菴) 조광조(趙光祖)는 <조선 중종> 때 사림(士林)세력의 대표로 공신세력 훈구파(勳舊派) 실정(失政)을 개혁하는데 선두주자였다. 하지만 급진적 이상주의 정책으로 훈구파(勳舊派) 공신세력들과의 반목이 잦았다.
<기묘사화(己卯士禍)>를 겪으며 죽음을 맞았다. 그는 <정치를 하려면 먼저 인간이 되어야한다>는 것을 내세웠으며 덕(德)과 예(禮)로 다스리는 나라를 꿈꿨다. 경기도 용인 <심곡서원(深谷書院국가지정 사적530호)>에서 위패를 모시고 그의 덕행(德行)을 기리고 있다.
<우리나라 5대 서원(書院)>은 경북 안강 <옥산서원>을 비롯해 경북영주 신라 문무왕16년(676년) 의상대사가 창건한 목조 구조기술의 정수 무량수전(국보 제18호) 배흘림 기둥으로 유명한 부석사(浮石寺)가 있는 우리나라 최초의 사액서원(賜額書院) <소수서원>, 경북 달성 <도동서원.>, 경북 안동 <병산서원>, <도산서원>을 가리킨다.
이밖에도 <일두(一?) 정여창(鄭汝昌 1450~1504년)>은 조선 성종때의 대학자다. 고향 <경남 함양군 수동면 개평> <남계서원(1552년건립)>에서는 그의 학문과 사상을 추모하고 있다. <시호(諡號)는 문헌공(文獻公)>이다. 아울러 <일두(一?) 정여창(鄭汝昌)>은 <경남 하동>에 18년간 은거하며 <경남도문화재자료 제220호 악양정(岳陽亭)(1450~1504년)>을 건립해 강학(講學) 했다.
이곳의 <사우(祠宇)인 덕은사(德隱祠)>에서는 <중국 송나라 때 주자학(朱子學)>을 집대성한 <주희(朱熹)>를 비롯해 <정여창>, <김굉필>, <김일손>, <정여해> 등의 위패를 모시고 있다.
한편 학문(學問)을 좋아했던 <조선시대 유학자 전남순천 부사> <구암(龜巖) 이정(李楨 1512~1571 사천이씨>)은 <사림(士林)의 명예 회복>을 위해 <임청대(臨淸臺)를 복원(1563년)>했다. 이밖에도 <구암(龜巖) 이정(李楨)>은 <옥천서원(玉川書院)>을 세워 한훤당(寒暄堂) 김굉필(金宏弼)을 배향하기 전에 먼저 <경현당(景賢堂)>을 세웠다. 이곳에 <한훤당(寒萱堂) 김굉필(金宏弼)>과 <매계(梅溪) 조위(曺偉)>를 향사(香司)했다.
경현당(景賢堂) 기문(記文)은 <고봉(高峯) 기대승(奇大升)>이 썼다. 아울러 구암(龜巖) 이정(李楨)은 경현당(景賢堂) 옆에 <옥천정사(玉川精舍1566년)>를 세우고 성리학(性理學) 서적(書籍) <성리유편(性理遺編)>을 출간(出刊)했다. <구암(龜巖) 이정(李楨)>은 <영호남(領胡南) 사림(士林)>의 <명예로운 이름을 복원>하기 위해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특히 <임청대(臨淸臺)>는 <매계(梅溪) 조위(曺偉)>와 <한훤당(寒萱堂) 김굉필(金宏弼)>의 그 무서운 귀양살이의 고통 속에서도 스스로 자위하며 생활했던 옛 선현들의 일면을 엿 볼 수 있는 사적으로 후대에 귀감(龜鑑)이 되고 있다. <구암(龜巖) 이정(李楨)>은 <퇴계(退溪) 이황(李滉)>과의 교류를 평생 지속했다.
<70여 통의 편지>가 전해지고 있는데 <구암(巖巖) 이정(李楨)>은 <퇴계(退溪) 이황(李滉)>이 제자를 가르치던 <경북안동 도산서원(陶山書院)>을 가끔 찾았다. <퇴계(退溪) 이황(李滉)>도 끊임없이 <경남 사천>을 찾아 두 사람 시간을 보낸 모습이 <편지>에 잘 나타나 있다.
<구암(龜岩) 이정(李楨)>은 10살 연장자인 <퇴계(退溪) 이황(李滉)>을 깍듯이 <스승>으로 모셨다. <퇴계(退溪) 이황(李滉)>도 <구암(龜巖) 이정(李楨)>을 고제(高弟)라 하여 친구처럼 대하며 그리워했다. 그래서 지금도 <구암(龜巖) 이정(李楨)>과 <(退溪) 이황(李滉)>의 <학문(學問)과 덕행(德行)>을 기리고 추모(追慕)하기 위해 경남 사천 <구계서원(龜溪書院) 경상남도문화재자료40호)>에서 제향(祭香)을 지내면 <경북 안동 도산서원(陶山書院)> <퇴계(退溪) 이황(李滉)>의 문중이 내려와서 제향(祭香) 한다.
현재 10여 년 전부터 매년 가을 <구암(龜巖) 이정(李楨)>의 장원급제를 기리고 사천인의 자긍심을 높이기 위해 <과거시험 재현> 및 전국의 유림(儒林) 수 백 명이 모여 <한시(漢詩)>를 지으며 <인문학(學文學)>의 향기를 드높이고 있다. 고종 5년 9월 대원군이 전국 사액서원을 모두 철폐했을 때 <전국 47개 사적 사원> 중 하나도 훼철되지 않고 도봉서원(道奉書院)에 봉존됐다.
<구암(龜巖) 이정(李楨)>은 명종18년(1563) <사천의 구계서원>과 <경주의 서악서원>, <순천의 옥천서원>을 세웠다. <구암(龜巖) 이정(李楨)>은 조정에 있으면서 우리나라에 유학(儒學)에 관한 서적(書籍)이 매우 적은 것을 안타깝게 생각했다.
이에 학문서적(學問書籍)을 중국으로부터 구입해 <우리나라 유학(儒學)의 토대(土臺)>를 마련했다. <구암(龜巖) 이정(李楨)>은 <퇴계(退溪) 이황(李滉)>에게도 많은 서적(書籍)을 명나라에서 구입해 주었다. <퇴계 이황(李滉)>의 학문에는 <구암(龜巖)이정(李楨)>의 유학서적(儒學書籍)의 지원이 그 밑바탕이 됐다. <구암(龜巖) 이정(李楨)>은 조정(朝政)에만 있지 아니하고 외직(外職)으로 나가기도 했다.
30세가 되던 해에 <영천군수>를 시작으로 <선산군수>, <청주목사>, <경주부윤>, <순천부사>를 역임했다. <경주부윤> 때에는 신라(新羅)의 수도였던 경주(慶州)가 완전히 파괴돼 있었다. <3년간 왕릉 보수>와 옛 건물들을 수리해 <경주일원의 사적을 재건>했다.
여기에 덧붙여 <삼국유사>의 기록에 따라 632년 당나라로 유학갔던 <자장율사>는 중국 계율종의 본산인 <종남산>과 <문수보살의 주처인 오대산>에 머물며 <문수보살>의 현신을 만나 <석가모니진신사리>와 <가사>등을 받았다. <643년 선덕여왕>의 요청으로 귀국해 <황룡사 9층목탑>과 <태화사탑>, <불보종찰 통도사> 계단에 나누어 봉안했다.
이 세 사찰은 <부처님 사리>를 봉안한 <최초의 사찰>로 기록되고 있다. 이러한 <자장율사>와의 인연으로 <신라 최고의 국찰>이었던 <황룡사>와 <통도사>는 형제처럼 인식된다고 전한다. 덧붙여 <박정희 대통령> 재임시절 경주출신 <김수학>씨가 신라(新羅) 천년고도 경주(慶州) 복원을 건의해 오늘날의 경주(慶州)가 있게 됐다고 전한다. 이후 초등학교 졸업의 학교 종치기였던 <김수학>씨는 독학(獨學)으로 행정고시에 합격해 대한민국 번영을 가져 온 <새마을 운동>을 주도했다.
이후 내무부국장, 대구시장, 경북도지사, 토지개발공사사장, 국세청장 등을 지냈다. 청빈한 삶으로 일관했던 그의 평생 소원은 <구암(巖巖) 이정(李楨)선생>을 모신 <구계서원(龜溪書院)>에서 초헌관(初獻官)으로 봉향을 해 보는 것이라 했다. 그는 <구암(巖巖) 이정(李楨)>을 평생의 스승으로 가슴에 모셨다. 저서로는 <이팝나무 그늘아래서>를 출간했다.
<구암(龜巖) 이정(李楨)>의 스승은 <규암(圭巖) 송인수(宋麟壽 1499~1547)>다. 규암(圭巖) 송인수(宋麟壽)는 기질이 강직하면서 청명하고 순수했다. 청렴과 학문에 빼어나 배움을 실천했다. 1533년 김안로 탄핵으로 배척 당해 <제주목사>로 좌천됐다가 이후 <사천>으로 유배된다. 1537년 예조참의 겸 성균관 대사성으로 후학(後學)들에게 성리학(性理學)을 강론했다.
1543년 <전라도 관찰사>로 부임해 사건을 제때 처리하고 교화에 힘써 풍속을 바로잡고 (소학(小學)>을 장려했다. 이밖에도 유교경전(儒敎經典)의 핵심인 <논어(論語) 맹자(孟子) 대학(大學) 중용(中庸)>을 비롯해 <시경(詩經) 서경(書經) 주역(周易)>의 <사서삼경(四書三經)>을 간행 해 유학(儒學)을 진흥(振興)시켰다. 인재양성(人才養成)을 가장 급선무로 삼았다.
규암(圭巖) 송인수(宋隣壽)는 송(宋)나라 유학자 <정호(程顥)>가 주장한 <근본문제부터 착수해야한다>는 것과 장재<張載>가 말한 <남의 비난과 비웃음을 개의치 않아야 한다>는 것을 인용해 <옳다고 생각하면 단연코 실천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1544년 동지사가 돼 중국 북경에 갔을 때 중국 사람들은 그를 가리켜 청렴(淸廉)하기가 빙옥(氷玉) 같다며 <한 조각의 얼음과 옥>이라 했다.
1544년 3월 규암(圭巖) 송인수(宋麟壽)는 중종(中宗)의 어명을 받들어 <원로대신(元老大臣) 송흠(宋欽)>을 위해 <전남 장성>에 <기영정(耆英亭)>을 짓고 잔치를 베풀었다. <나이 많고 덕(德)이 높은 노인 중에서 가장 빼어난 사람을 기리는 정자>라는 뜻 이다. 바로 앞에는 <송흠(宋欽)>이 지은 <맑은 물을 보고 나쁜 마음을 씻는다>라는 <관수정(觀水亭)전남문화재자료 100호> 정자가 자리하고 있다.
특히 전라감사 규암(圭巖) 송인수(宋麟壽)는 <외로운 충성은 달처럼 밝고 가벼워(孤忠輕性明)/ 노 끝에 가라 앉았다 떴다 하는구나(櫓倬任流浮)/ 해는 지고 멀리 모래밭이 너무나 아름다워(日落芳洲遠)/ 가신 임의 혼을 부르며 몹시도 그리워하네(招魂意轉悠>라고 노래한 <진도> 벽파정(碧波亭)에 걸린 <충남 보은>이 고향인 충암(沖菴) 김정(金淨 1486~1521)의 시(詩) <벽파를 건너며>를 읽고 비감에 젖었다.
‘바른 정치를 하고자’ 했던 뜻을 이루지 못하고 죽은 <충암(沖菴) 김정(金淨)>을 애도(哀悼)하면서 위의 시(詩)를 지었다. <규암(圭巖) 송인수(宋麟壽)>는 <을사사화(乙巳士禍 1545년)>가 일어나자 한성부좌윤에서 파직 당하고 충북청주<忠北淸州> 시골로 갔다.
이때 <퇴계(退溪) 이황(李滉)>은 <규암(圭巖) 송인수(宋麟壽)>에게 시(詩)를 지어 보냈다. <규암이여/ 옛날 풍전에 묻혀있을 적에는/ 소쇄함이 세속 사람 같지 않더니/ 이제 청주로 돌아가 농사 짓기를 배운다 하니/ 청주에 풍년 들어 고야산(장자(莊子)에 나오는 선경(仙境)처럼 풍성하리라> 규암(圭巖) 송인수(宋麟壽)는 <양재역 벽사사건(1545년)>이 일어나자 사약이 내려져 <충북청주(忠北淸州)>에서 죽음을 맞았다.
한편 <기묘명현(己卯名賢)>으로 불렸던 <충암(沖菴) 김정(金淨)>은 중종시절 <조광조(趙光祖)>와 함께 개혁을 주도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했다. <순창군수>를 지냈다. <기묘사화(己卯士禍)1519년>로 <남해 금산> 유배, <진도> 유배, 이후 <제주도> 귀양살이를 했다. 특히 제주도 유배에서는 지형 기후 동식물 특산물 가옥구조 언어 신앙(무속)등을 관찰해 <제주풍토록(濟州風土綠)>을 썼다.
제주도 유배에서 집주위에 <탱자나무 울타리>를 치는 모습을 보고 귀양살이를 실감하는 시(詩)를 짓기도했다. 36세에 <제주도>에서 사약 받고 죽음을 맞았다. 현재 <진도 벽파항>에서 제주도 유배길에 오르면서 김정(金淨)이 쓴 시(詩) <벽파를 건너며(渡碧波口號)> <우주는 원래 그 유래가 깊었으니(宇宙由來來)/ 인생살이도 본래 떠다니는 삶이라네(人生本自浮)/ 조각배 한척에 몸을 싣고 이곳을 떠나면서(扁舟從此去)/ 고개를 돌려 바라보니 아득아득하구나(回首政悠悠)>가 붙어 있다는 벽파정(碧波亭)에는 정자의 흔적이 없다.
언덕 위에는 400여 년 전 <명량대첩>의 역사를 전하는 <충무공벽파진전첩비(忠武公碧波珍戰捷碑)>가 자리하고 있다. 현재 남종화의 본산지 <소치(小癡) 허련(許鍊)>의 <운림산방(雲林山房)>내 <진도역사유물관>에 <진도문화와 유배>판에 김정(金淨)이 쓴 시(詩) <벽파를 건너며>가 소개되고 있다.
이글을 마치면서 현장을 사는 기자로서 고성이씨(固城李氏) 가문의 일족으로서 아직도 넘어야 할 산이 많다는 것을 뼈저리게 느낀다. 세상과 인간에 대한 깊은 이해 없이는 결코 뛰어난 글을 쓸 수 없음도 자각했다. 사명감과 자부심은 모든 고난을 견디게 한다는 진실도 깨닫게 됐다.
기회가 되면 일일이 현장을 둘러보면서 이해의 폭을 넓히고 깊이를 더하고 싶다. 하지만 내 조상에 대한 내 가문에 대한 진실을 알게 하기 위해 그간 수 많은 분들께서 말없이 응원을 해 주신데 대해 진심으로 고마움을 전한다. 여러모로 훌륭한 주위 어른들께서 저를 어여삐 여겨 다함께 저의 몽매무지함을 눈 떠게 했다. 위 글은 정 장관님의 강연내용을 중심으로 해 여러서적들과 인터넷자료를 참고해 씌어졌다는 것을 밝힌다.
<2015년 대한민국 광복 70주년>의 의미는 새로운 세계를 열어보였다. 정종섭 장관님을 비롯해 자리를 마련해 주신 강의구 회장님께 진심으로 감사드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