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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의 정체성을 찾아서 - <3시리즈> 데라우치문고에서 발견한 전통문화
  • 기사등록 2015-08-28 11:35: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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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여 정종섭 행정자치부 장관은 앞에서 언급한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509호 <데라우치문고>는 우리의 국권이 침탈 당한 시기인 1910년부터 1916년 사이 <데라우치 마사다케(寺內正毅. 1852~1919년) 초대 조선총독. 제3대 조선통감. 제18대 일본국 총리대신이 조선의 문화재 조사를 통해 유출시킨 일본의 <우리문화재 반출>의 대표적인 역사라고 밝혔다. 


<데라우치문고>는 1990년 경남 고성(固城) 이씨(李氏) 가문(家門)의 조상에 대한 존경(尊敬)과 예(禮)로서 고려시대 <행촌(杏忖) 이암(李?)>에 대한 발자취를 찾아 나선 <후손(後孫) 이종영 선생>의 열정적인 노력으로 국내에 알려지게 됐다. 


당시 <문화재위원장 고(故) 임창순(한림대학교 부설 태동고전연구소장)선생>, <한.일 의원연맹>, <경남대학교(총장 박재규)> 공동 노력 끝에 1996년 1월 24일 80년 만에 경남대학교 개교 60주년을 맞아 야마구치여자대학(현 야마구치현립대학)에 소장돼 있던 <데라우치문고>가 80년 만에 경남대학교 박물관(관장 김봉렬)으로 반환 기증돼 고국으로 돌아왔다. 

이는 대학.민간.공공기관 협업으로 2년 간에 걸친 노력의 쾌거였다. 한일 양국 국제간의 공동연구를 위한 학문적 교류 및 국가간의 관계교류 개선에도 많은 기여를 했다. 반환된 <데라우치문고>는 편지(文章), 시(詩), 글씨(書), 그림(畵) 등 98종 135책 1축(1,995점)이다. 


지난 2006년 <경남대학교 개교60주년> 및 <데라우치 문고 반환 10주년 기념 특별전>이 예술의 전당, 서울서예박물관에서 4월 25일부터 6월11일까지 개최된 바 있는데 이 중 <기원(綺園) 유한지((兪漢芝) 예서첩(隸書帖) 보물 제1682호>은 19세기 전기 전서와 예서로 이름 높았던 <기원(綺園) 유한지(兪漢芝) 선생>이 예서(禮書)를 집대성한 서첩(書帖)이다. 


<당나라 시인 두보(杜甫)의 곡강(曲江)>을 비롯해 <칠언(七言), 오언(五言), 사언대구(四言對句)> 등 8편의 예서체(禮書體) 작품이다. <기원(綺園) 유한지(兪漢芝) 선생>은 <추사(秋史) 김정희(金正喜)>, <눌인(訥人)>, <조광진(曹匡振)>과 더불어 조선 후기 예서(禮書) 3대가로 꼽힌다. 


또한 <한대(漢代)의 4대 비(碑) 예기비(禮器碑) 조전비(曺全碑), 하승비(夏承碑), 장천비(長遷碑)>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서풍(書風)은 금석학(金石學)에 정통했던 선생의 면모를 잘 보여주고 있다.

한편 <행촌(杏忖) 이암(李?. 1297~1364 本貫 고성(固城)>의 자(子)는 고운(古雲), 시호(諡號)는 문정(文貞)이다. <고려 충선왕 5년. 1313년> 17세 때 문과에 급제한 당대 최고의 지성과 학식을 갖춘 대학자(大學子), 대문장가(大文章家), 정치가(政治家)로 고려시대 최고의 명필가(名筆家)다. 고려말 조선초의 <국서체(國書體)>로 사용됐다. 


<고운(孤雲) 최치원(崔致遠)>을 흠모해 자(子)를 고운(古雲)이라 했다. 이에 <행촌(杏村) 이암(李?)>은 동국(東國)의 趙子仰으로 불린다. 1361년 홍건적(紅巾敵)이 개경에 쳐들어오자 왕을 따라 남행(南行)했다. 이듬해 3월 좌정승에서 사퇴했다가 다시 1363년 왕이 경북 안동(安東)으로 피난할 때 호종했다. 


1등 공신(功臣)으로 <철성부원군(鐵城府院君)>에 봉해졌으며 <추성수의동덕찬화익조공신(推誠守義同德贊化翊祚功臣)>이라는 호(號)를 하사 받았다. 특히 초서(草書), 행서(行書), 묵죽(墨竹)에서 그 뛰어난 예술성의 향기는 높다. <제자(弟子) 목은(牧隱) 이색(李穡)>의 <목은집(牧隱集)>에는 <행촌(杏村) 이암(李?)>의 자화상이 그려져 있다. 


준법을 상징하는 석죽(石竹)을 배경으로 <행촌(杏忖) 이암(李?)>이 정자에서 <수행자(修行者)>의 도구인 <불자(佛子)>를 옆에 놓고 책을 읽고 있는 모습이다. 참으로 온후(溫厚)하고 여여(如如)해 그 고매한 인품(人品)의 향기(香氣)가 <750여 년>의 세월을 훌쩍 넘어 전한다. <행촌(杏村) 이암(李?)>은 동국(東國)의 조자앙(趙子昻. 조맹부1206~1368년)으로 불렸다. 


원나라 최고의 서예가 송설도인(宋雪道人) 조맹부는 몽골의 원(元)왕조가 중국을 지배하던 시절 정치, 경제, 시서화(詩書畵)에 넓은 지식을 가졌던 <송설체(松雪體)>로 일가(一家)를 이뤘다. 조맹부의 작품(作品) <작화추색도(鵲華秋色圖)대만국립박물관소장>는 43세 때 고향 <호주>에 잠깐 들렀을 때 <산동제남>의 기억을 되살려 <산동지방>에 한번도 가보지 못한 22세의 <공근>에게 <황하(黃河) 북쪽의 작산(鵲山)>과 <황하 남쪽의 화산(華山)> 풍경(風景)을 그려준 것이다. 

아울러 <행촌(杏忖) 이암(李?)>의 부친(父親) <이우(李瑀)>는 <김해(金海)>와 <강원도 회양> <부사(府使)>를 지냈다. <유불선(儒彿仙)>에 통달했으며 그의 동생, <행촌(杏忖) 이암(李?)>의 숙부(<叔父)> <각진국사(覺眞國師고려원종11년(1270)~공민왕4년(1355년)>는 경남고성(慶南固城)이 낳은 불교계(佛敎界)의 큰 <별>이다. 


<고려 충정왕>과 <공민왕>의 왕사(王師)>였던 <법휘(法諱) 복구(復丘)스님>이다. 각진국사(覺眞國師)는 이존비(李尊庇)의 세아들 중 둘째로 속명은 <이정(李精)>이다. <각진국사(覺眞國師)>는 <1400여년>의 역사(歷史)를 간직하고 있는 한국삼십삼관음성지(韓國三十三觀音聖地) <전남순천 조계산(曹溪山)> <승보사찰(僧寶寺刹) 송광사(松廣寺)> <보물제1043호 십육조사진영(十六祖師眞影)> 가운데 <1320년> <조계산(曹溪山) 수선사(修禪寺) 제13세(世) 사주(寺主)>다. <송광사(松廣寺)>의 고려시대 이름은 <수선사(修禪寺)>이다. 


<각진국사(覺眞國師)>는 <송광사(松廣寺) 16국사(十六國師)> 중 <불대사 자진원오국사 비(佛臺寺 慈眞圓悟國師 碑)의 회당화상(晦堂和尙)으로도 불린 <수선사(修禪寺) 제5세 원오국사 천영(圓悟國師 天英1215~1286년)>에게 <10세> 때 출가(出家)해 가르침 받은 제자(弟子)다. 


또한 두 번째 스승은 <8세 자각국사(慈覺國師) 도영(道英)>이다. 이밖에도 백제불교 도래설이 전하는 전남 영광(靈光) 모악산(母岳山) 불갑사(佛岬寺) 각진국사 비(覺眞國師 碑)는 (원종11년(1270~1355년) 공민왕 4년에 세워졌으나 현재는 남아 있지 않고 <이달충(李達衷)>이 지은 <동문선(東文選)>에 전해지고 있다. 

<각진국사(覺眞國師)>는 만년에 <불갑사(佛岬寺)>로 옮겨 충정왕 2년(1350년) 공민왕 1년 왕사(王師)가 돼 <각엄존자(覺儼尊者)>라는 호(號)를 받았으며 <1352년> 다시 왕사(王師)가 됐다.

 

<송광사(松光寺)>는 조계종(曹溪宗)의 중흥도량(中興道量)으로 <조계종(曹溪宗)을 창시(創始)>한 고려시대 <불일(佛日) 보조국사(普照國師 지눌(知訥)스님>께서 <선종(禪宗)의 기본(基本)>인 <새로워지려는 자기반성과 참 정신으로 돌아가자>는 교선(敎禪)일치를 천명한 <정혜결사(定慧結社)>운동을 제창해 기울어가던 <고려불교(高麗佛敎)>를 바로 세운 곳이다. 


<보조국사(普照國師)>는 송광사(松廣寺) 제1세로 희종6년(1210년) 열반(涅槃)했다. 고려 희종이 <불일보조국사(佛日普照國師)> 시호(諡號)와 함께 <감로탑(甘露塔)>이란 탑호(塔號)를 내려 3년 후 <무상주지스님>께서 1213년(강종2년) 독특한 형태의 <고려고승의 부도탑 >이 세워졌다. 또한 <조선시대>에는 <부휴선사(浮休禪師)>께서 <숭유억불(崇儒抑佛)정책>에 맞서 <불교(佛敎)>를 굳건하게 지켜냈다. 


더불어 <일제식민치하>에서는 <효봉(曉峰1888~1966년)스님>께서 송광사(松廣寺)에 <조계총림(曹溪叢林)>을 세워 10년간 주석(主席)해 <선불교(禪佛敎)>의 대중적 기틀을 튼튼히해 <승보(僧寶)의 빛나는 도량(度量)>을 마련했다. <효봉스님(曉峰)스님>께서는 <일본 와세다대학 법학부>를 졸업하고 조선인으로서는 <우리나라 최초의 판사>로 10년간로 활동하다 당대 최고의 <한암(漢巖)과 만공(滿空)스님>으로부터 도(道)를 인정받았다.


 38세의 늦은 나이에 출가(出家)했다. 한편 <효봉(曉峰)스님>께서는 <동산>, <청담>스님 등과 함께 불교의 근대화를 위해 <불교정화운동(佛敎淨化運動1954~1962년)>을 주도했다. <효봉(曉峰)스님>께서는 불교(佛敎)의 자비실천수행(慈悲實踐修行)의 <계.정.혜(戒定慧) 삼학(三學)> 가운데 단연 으뜸에 <선정(禪定)>을 꼽으셨다. 


<효봉(曉峰)스님>께서는 평생을 <구자무불성(拘子無佛性)>의 <무(無)자>를 <수행(修行)도구의 화두(話頭)>로 삼아 마지막까지 <“무(無)”>라는 말씀을 남기며 1966년 <밀양(密陽) 표충사(表忠寺) 서래각(西來閣)>에서 입적(入寂)하셨다. <효봉스님>은 불일암(不日菴)에 기거하셨던 <법정(法頂)스님>의 스승이며 <구산(九山)스님>의 스승이다.

한편 <송광사(松廣寺)>는 지난 1995년 <16국사진영(十六國師眞影)> 중 13국사진영(十三國師眞影)이 도난 당하는 청천벽력(靑天霹靂) 같은 사건(事件)이 발생했다. 현재 <승보종찰(僧寶宗刹)> 송광사(松廣寺)는 사부대중들과 불자들이 함께 힘을 모아 사진으로 영정(影幀)을 대체한 <16국사 진영(十六國師(眞影)>을 옛 모습 그대로 복원(復元)해 다시 <국사전(國師殿국보56호)>에 봉안(奉安)하는 <16국사진영봉안불사(十六國師眞影奉安佛事)>를 진행 중이다. 


이 불사(佛事)는 승보도량(僧寶道量)의 찬란한 위엄(威嚴)을 드높이는 대작불사이다. <각진국사(覺眞國師)>는 전남 영광 불갑면 <자운지탑(慈雲之塔)>의 주인(主人)이기도 하다. 또한 각진국사(覺眞國師)는 고려 공민왕 때 전남 장성 <고불총림(古佛(曺溪)叢林) 백암산(白巖山)</p>

백양사(白羊寺)>를 중창하고 <7,000여 그루의 비자나무숲>을 조성했다. <백양사(白羊寺)>

입구에는 <각진국사(覺眞國師)>가 짚고 다니던 지팡이를 꽂은 <이팝나무> 한 그루가 오랜 풍상을 견뎌내며 멋진 모습으로 서 있다. 


1350년 <각진국사(覺眞國師)>는 <운문암>, <영천암>, <청류암>을 3창(三創) 했다. <백양사(白羊寺)>는 <각진국사(覺眞國師)>의 속가 조카 <행촌(杏忖) 이암(李庵)>의 <원찰(願刹)>로 <백양사(白羊寺)>에는 <각진국사복구진영(覺眞國師復丘眞影전남유형문화재290호)>이 모셔져있다.


아울러 <국가지정 명승 제38호 백양사(白羊寺)>는 <조계종 제18교구 본사>로 하얀 양(羊)이 내려와 불법(佛法)을 들었다고 해 붙여진 이름이다. 백학봉과 쌍계루>는 대한 8경(大韓八景)으로 자연과 더불어 아름다움의 극치를 이룬다. 이밖에도 백양사(白羊寺)는 하얀 학(鶴)이 날개를 펴고 백학봉(白鶴奉)의 <운문암>, <약사암>, <천진암> 등을 품고 있어 육당(六堂) 최남선(崔南善)은 “흰 맛, 날카로운 맛, 신령스러운 맛이 있다”고 했다. 


<백양사(白羊寺)>는 <송광사(松廣寺)>와 더불어 <호남(湖南) 최대의 고찰(古刹)>로 <백제 무왕 33년(632년)> 때 지은 <1370여 년>의 역사(歷史)를 지닌 빼어난 사찰(寺刹)이다. <호남지역(湖南地域)>에 재난(災難)이 발생하면 국기단(國祈壇)에서 국태민안(國泰民安)을 바라는 마음으로 대자연의 신(神)과 하늘에 제사지낸다. 매년 단풍축제 때 <백암산국기제(白巖山國祈祭>가 열리고 있다. 


<쌍계루(雙溪樓)>는 백양사(白羊寺) 누각(樓閣)의 백미(白眉)로 고려시대(1350년)에 <각진국사(覺眞國師)>가 세웠다. 하지만 1370년 큰 비로 무너져 <1377년 청수스님>이 다시 세웠다. 아울러 <행촌(杏忖) 이암(李?>)의 제자(弟子) <목은(牧隱) 이색(李穡)>과 조선(朝鮮) 518년 간의 개국(開國) 일등공신으로 <경국대전(經國大典)>을 편찬해 <국민의 행복을 위하는 나라>를 꿈꿨던 억불숭유(抑佛崇儒) 정책의 <삼봉(三峰) 정도전(鄭道傳1342~1398)>이 기(記)를 썼다. 


<포은(圃隱) 정몽주(鄭夢周)>가 원운시(原韻詩) <쌍계루(雙溪樓)>를 지었다. <쌍계루(雙溪樓)>에는 면앙정 송순, 하서 김인후, 사암 박순, 노사 기정진, 월성 최익현, 송사 기우만, 서옹스님, 산암 반시연, 약천 조순 등의 <현판 180여 작품>이 걸려있다. 


이곳은 스님과 선비들이 소통(疏通)하고 교류(交流)했던 화합(和合)의 공간(空間)으로 유불(儒佛)의 종교(宗派)와 사상(思想)을 초월(超越)한다. <행촌(杏忖) 이암(李菴)>의 <동생>은 <운암대사(雲巖大師)>로 큰 스님을 배출한 <불교가문(佛敎家門)>이다. 특히 <조부(祖父)> <이존비(李尊庇)>는 환국(桓國)과 배달(倍達)의 역사에 대해 근본(根本)을 통하고 <환단사상(桓檀思想)>에 대한 깊은 안목(眼目)을 가진 대학자다.

<행촌(杏忖) 이암(李?)>의 <조부(祖父) 이존비(李尊庇1233~1287)>는 <외삼촌 백문절>에게 글을 배웠다. 그런 연유로 <행촌(杏忖) 이암(李?)>은 <조부(祖父) 이존비(李尊庇)>에 의해 나이< 10세> 때 <강화도 마니산 보제사(普濟寺)>에 들어갔다. 


그곳에 <학동초당(學童草堂)>을 짓고 <백문절>의 아들 <스승 백이정>으로부터 <3년> 동안 가르침을 받아 학문(學問)을 익혔다. <행촌(杏忖) 이암(李?)>은 그곳에서 <유가경전(儒家經典)> 및 우리민족의 <고대사(古代史)> 기록(記錄)을 탐독(耽讀)했다. 


특히 <낭가사상(郎家思想)>에 나타난 <한민족 역사의 원류>에 대한 내공이 깊어졌다. 그때 비록 <10세>의 어린 나이였지만 단군(檀君)이 하늘에 제사 지내던 <참성단(塹星壇)>에 올라 <“옛날처럼 동방의 맑고 깨끗한 나라로 일신하리라”>라는 큰 뜻을 품은 시(詩)를 지어 주위를 놀라게 했다. 일찍부터 그의 넓고 자유자재(自由自在)한 <낭가사상(郎家思想)>의 진면목(眞面目)을 엿볼 수 있는 부분이다. 훗날 이때의 공부가 <행촌(杏忖) 이암(李?)>의 학문(學問) 세계에 근간을 이뤘다. 


<36세>에 <강화도에 유배(流配)>하면서 <우주천리(宇宙天理)>를 연구했다. 1363년 공민왕 12년 <66세>에 은퇴(隱退)해 유배(流配地)였던 <강화도 선원리 행촌(杏忖)>에 정착(定着)했다. 그곳에서 <행촌(杏忖) 이암(李?>은 흠모(欽慕)하고 존경(尊敬)했던 신라시대 대학자 <해운(海雲)> 또는 <고운(孤雲)>으로 불렸던 <최치원(崔致遠)>의 호(號)를 따서 <해운당(海雲堂)>을 짓고 살았다. 


<행촌(杏村) 이암(李?)>은 <해운당(海雲堂)>에서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던 광대무변(廣大無邊)하고 원융(圓融)했던 우리민족 고유의 역사원류(歷史源流)이자 뿌리인 <도가(道家) 선가(仙家)> 사상(思想)의 북방고대사(北方古代史) <고조선신교사관(古朝鮮神敎史觀)> 역사(歷史) 정립(鼎立)에 나섰다. 


올바른 역사인식(歷史認識)에 의한 우리민족의 역사서(歷史書) 단군고기(桓檀古記) <단군세기(檀君世紀)>를 저술(著述)해 <공민왕 12년(1363년)>에 편찬했다. 아울러 <고조선이 만주대륙>에 포진한 <1세 단군>에서부터 <47세 단군>에 이르기까지의 <고조선 2096년>의 역사(歷史)를 정리한 <단군조선연대기(檀君朝鮮年代記)>를 엮었다.

   

<행촌(杏忖) 이암(李?)>은 여생(餘生)을 단군고기(檀君古記) <단군세기(檀君世紀)>완성에 모두 바친 <신교사관(神敎史觀)의 정립자>다. <행촌(杏忖) 이암(李?)>은 <36세> 때 강화도에 3년 간 유배(流配)돼 그곳에서 주역(周易)을 연구하고 우주(宇宙)의 이치(理致)와 천문, 풍수, 지리에 관한 책을 섭렵했다, 유배(流配)에서 풀려나 그곳 <경기도 양주 천보산 태소암>에 1년 정도 머물렀다. 


그때 그곳에서 <행촌(杏忖) 이암(李?)>의 현손인 <이맥(李陌1455~1528)>과 <포은(圃隱) 정몽주(鄭夢周)>의 제자(弟子) 고려<문종의 릉>이 있는 <전남 나주>가 고향인 <범장(范樟)>을 만났다. <소전(素佺居士)>로부터 석굴속에 감춰져 있던 인류문명(人類文明)의 황금시절이었던 환웅(桓雄)의 신시(神市 환단환국(桓檀桓國) 배달고조선(倍達古朝鮮) 시대를 기록한 고서(古書)와 신서(神書) 대조영의 발해 사서(史書) 조대기를 나누어 얻어 읽었다. 


세 사람은 잃어버린 한민족사 회복을 위한 사서집필(史書執筆)을 결의(決意)했다. <청평거사 이맥(李陌)>은 <이암(李?)의 4세손>으로 <삼신교의(三神敎意)>로 민족을 통일한 <환웅(桓雄)의 나라 신시(神市) 대진국(大眞國) 본기(本記)> <태백일사(太白逸史)>와 신교문화(神敎文化)의 원전(原典) <98글자의 천부경(天符經)>을 썼다. 


아울러 <복애거사 범장(范樟)>은 <고구려국본기(高句麗國本記) 북부여기(北夫餘記)>를 썼다. <이맥(李陌)>, <범장(范樟)>, <이암(李?)>에게 비기(秘記)를 전해 한민족의 창세역사(創世歷史)를 잇게한 <소전거사(素佺居士)>의 실체는 밝혀지지 않고 있다. 하지만 <삼신(三神)과 하나돼 온전한 사람이 된다>는 의미의 <전(佺)>자를 이름에 쓴 것으로 보아 <신교문화(神敎文化)>의 <전도(佺道)>에 회통한 인물로 짐작된다. 


단군고기(檀君古記) <단군세기(檀君世紀)> 서문(序文)에서 <나라를 위하는 길은 사대부의 정신보다 우선하는 것이 없고 역사보다 급한 것이 없음은 무엇 때문인가(?) 역사가 분명하지 못하면 사대부의 정신을 진작시킬 수 없고 사대부의 정신이 진작되지 못하면 나라의 뿌리가 흔들리며 나라를 다스리는 법도가 분열되기 때문이다. </p>


나라는 형(形)이고 역사는 혼(魂)인데 혼(魂)을 잃은 형(形)이 어떻게 보존될 수 있을까(?>라며 일찍이 역사의 중요성을 주장하며 <국통(國統)을 바로 세우는 것이 곧 구국(救國)의 길>이라고 밝히고 있다. <행촌(杏忖) 이암(李?)>은 단군고기(檀君古記) <단군세기(檀君世紀)>를 통해 웅숭원융(雄崇圓融)한 민족전통(民族傳統) 역사문화(歷史文化)의 뿌리를 유감없이 드러내 보이고 있다. 


또한 <소전거사(素佺居士)>로부터 들은 이야기와 고서(古書)를 바탕으로 환단시대(桓檀時代)의 도학(道學)을 논한 한민족 역사를 4언절구 시(詩)로 엮은 <태백진훈(太白眞訓)>을 전하고 있다. 행촌(杏忖) 이암(李?)은 고려 충숙왕(1323년) 당시 <류청>과 <오잠> 등이 국호(國號) <고려>를 폐지하고 원나라의 일개 성(城)이 되고자 하는 청원(請願)을 원(元)의 조정에 제출했다. 


원으로부터 <원나라의 삼한성(三韓省)으로 한다>는 칙령(勅令)이 내려왔다. 그때 <우리나라는 환단시대(桓檀時代) 이래로 모두 천상상제(天上上帝)님의 아들 천제자(天帝子)라 칭(稱)해 하늘에 제사(祭祀)지냈다. 애당초 분봉을 받은 제후(諸侯)와는 근본(根本)이 같을 수 없다>라는 통분의 상소문(上疏文) <태백일사 고구려국본기>를 올리며 <고려>가 천자(天子)의 나라라며 중국(中國)의 여느 제후국(諸侯國)과 같은 대접을 받을 수 없다>고 주장했다. 


단군고기(檀君古記) <단군세기(檀君世紀)>는 <고성이씨(固城李氏>) 가문(家門) <9세손 행촌(杏忖) 이암(李?)>으로부터 <26세손 이유립>까지 이어온 우리민족의 <혼(魂)>이요 <뿌리(根)>로 <700여 성상(星霜)>을 견뎌낸 우리 역사(歷史)의 원류(源流)이며 <북방고대사(北方古代史)>의 발자취를 그대로 전하는 위대한 역사서(歷史書)다.

 

오늘날 우리는 민족애(民族愛)를 근본(根本)으로 우리가 나아갈 미래 비전을 강력하게 제시하고 있는 <행촌(杏忖) 이암(李?)>의 역저(歷著) <단군세기(檀君世紀)>를 마땅히 알아야할 것이다. 특히 조선시대 세조(1457년)는 고조선(古朝鮮) 비사(秘史) 서적들을 개인이 소장하지 못하도록 명(命)했다. 


<행촌(杏忖) 이암(李?)의 4세손 이맥(李陌)>은 아버지 <이지(李?)>의 요청으로 <단군세기(檀君世紀)>를 필사(筆寫)해 보존했다. 또한 중종 때 대사간 과 춘추관 편스관을 엮임하면서 세조 때 압수 당한 고기록(古記錄)을 접하면서 북방고대사(北方古代史)를 보완해 고려국본기(高麗國本記) <태백일사(太白逸史)>를 편찬했다. 


이맥(李陌)의 아들 이린(李?)은 평안남도 개천군수로 재임, 손자 이방(李滂)은 평안북도 삭주에 근무하면서 후손들이 고문서(古文書) 수거령(手車令)에서 조금은 자유로웠다. 직계후손(直系後孫)들이 책임감 있게 조상(祖上)의 유업(遺業)인 우리나라 고대사의 보물 <단군세기(檀君世紀)>와 <태백일사(太白逸史)>를 지켜 전해졌다.

<행촌(杏忖) 이암(李?)>의 <스승 백이정(1247~1323년)>은 안향(安珦)의 문하에서 가르침을 았다. 이후 충선왕을 따라 10년간 원나라 연경에 머물면서 <성리학(性理學)>을 연구했다. 돌아올 때 <주자(朱子)의 가례(家禮)>를 가지고 들어왔다. <조선의 유학(儒學)> 주자학(朱子學)은 안향(安珦)이 들여왔지만 <백이정>이 성리학(性理學)을 보급 정착(定着)시키는데 기여했다. 


주자학(朱子學)은 백이정으로부터 시작해 <이제현>, <이색>, <정몽주(忠烈書院경기도유형문화재제9호)>, <정도전, 권근, 변계량>으로 이어졌다. <도학(道學)과 예학(禮學)>을 발전시킨 조선 성리학(性理學)의 뿌리가 바로 <행촌(杏忖) 이암(李?)>의 스승 <백이정>으로부터 시작됐다. 현재 <백이정의 묘>는 <충남 보령시>와 <남해군 남면 평산리> 두 곳으로 연구가치가 있다. 


<강화도 마니산(469M)>은 강화도에서 가장 높은 산으로 <한반도의 중앙>에 자리잡고 있다. 산(山)의 정상(頂上)에서 남쪽의 <한라산>과 북쪽의 <백두산(白頭山)>까지의 거리가 각각 같다. <마니산>은 강화도뿐만 아니라 우리나라 전민족(全民族), 전국토(全國土)의 <머리(頭)> 구실을 한다는 뜻으로 <마리산> 또는 <머리산>으로도 불린다. 


<마리>란 고어(古語)로 <머리(頭)>를 뜻하며 <강화도에서 가장 높은 땅의 머리>를 의미한다. 더욱이 산 정상에는 하늘에 제(祭)를 지내는 <4,000년> 넘은 것으로 추정되는 <참성단(塹星壇)>이 있다. 이곳 마니산 동북(東北)의 중복에는 <신라 선덕여왕> 때 개산(開山)한 <정수사(淨水寺)>가 자리하고 있으며 정족산 <전등사>가 또한 이곳에 있다. 조선시대에는 대표 종마목장(種馬牧場)이 있었다.

 

현재 경남 고성(固城) <행촌(杏忖) 이암(李?)>의 고향에는 그의 학문(學問)과 덕행(德行)을 기리는 <갈천서원>이 있다. 또한 우리의 역사(歷史)에서 <몽고군>의 진로(進路)와 <왜구>의 움직임을 한눈에 파악할 수 있는 <통영>과 <거제>로 이어지는 고성(固城)의 진산(眞山) <무량산(無量山 589M)> 남쪽 기슭에 <행촌(杏忖) 이암(李?)>의 생가(生家) 터가 있다. 


이곳에는 <행촌(杏村) 이암(李?)>을 비롯해 <증조부(曾祖父) 이진(李眞)>과 <선친(先親) 이우(李禹)>의 묘가 자리하고 있다. 그가 어릴적 뛰놀던 <유교사상(儒敎思想)>을 떠올리게 하는 <거류산(巨流山)>과 <풍류(風流)와 불교(佛敎)>를 떠올리게 하는 <무량산(無量山)>은 고성들판에 물을 공급하던 곳으로 올라보면 <남해(南海)> 바다가 한 눈에 펼쳐 보인다. 


특히 <무량산(無量山)>은 백두산(白頭山)의 정기(精氣)를 느낄 수 있을 만큼 한 없는 기운(氣運)을 간직한 곳으로 옥수(玉水)로 유명한 <천년고찰 옥천사(玉泉寺)>가 있다. 이외에도 <행촌(杏忖) 이암(李?)>은 원(元)나라 농서(農書)인 <농상집요>를 보급해 고려 후기 <벼 재배 보급> 및 <농업 생산력 증가>와 더불어 <농업기술의 발달>을 가져왔다.

 

또한 <고려>의 가장 오래된 정원 <영지(影池)>를 비롯해 <부처님 진신사리>가 모셔져 있는 <강원도 춘천>의 천년고찰 <청평사(淸平寺)에 세워진 <우리나라 서예계(書藝界)>의 <명품(名品)>으로 꼽히는 <문수원 장경비(文殊院藏經碑)>를 썼다. 


지금 비(碑)는 비록 소실되었으나 그 내용이 <고운(孤雲) 최치원(崔致遠 857~)> 이후의 석학(碩學)이라 불렸던 고려 말의 학자 문인 <익제(益齊) 이제현(李齊賢 1287~1367 (본관(本貫 경주慶州)>의 <익제난고(益齊亂藁)>에 전해져 오고 있으며 <대동금석서(大東金石書)>에 실려있다. <익제난고(益劑亂藁)>는 <고려가요(高麗歌謠)> 연구에 귀중한 자료이다. 여기서 <익제(益齊) 이제현(李齊賢)>은 정당문학(政堂文學 1325년)으로 <김해군(金海君)>에 봉(奉)해졌다. 


이후 <홍건적(紅巾賊 1362년)>의 침입 때 왕을 <충북 청주(淸州)>로 호종 <계림부원군(鷄林府院君)>에 봉(奉)해졌으며 <일곱 왕조에 네 번>이나 <상부(相符)>에 올라 당대 <명문장가>로 특히 <외교문서>에 통달했다. 우리나라 <정주학(程朱學)>의 기초 확립 및 <원(元)나라 조맹부(趙孟俯 1254~1322)>와의 우의(友誼)로 <송설체(松雪體)>를 도입해 고려말 조선초에 널리 유행시켰다. 은퇴 후 왕명으로 <실록(實錄)>을 편찬했다.

한편 경남 고성군 <고성문화원(원장 도충홍)> 주최, <운영위원회(위원장 허경무) 주관>으로<행촌(杏忖) 이암(李?)>의 예술정신을 기리고 전통문화의 계승발전과 신진작가 발굴을 위해 지난 2011년부터 <대한민국행촌서예대전>을 매년 개최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강화도 강화문화원>에서도 <행촌(杏忖) 이암(李?)> <서예공모대전>을 <강화향교유림회관>에서 개최하고 있다. 한편 <돌아온 문화재총서출판기념특별전> <고국으로 돌아온 데라우치문고전시>는 <교황 프란치스코 한국방문(2014.8.14(목)~18(월)>을 기념해 전시한 아티스트 <기베르티>가 제작한 <천상의 아름다움 바티칸 피렌체 성당의 명작 천국의 문>과 함께 <국립고궁박물관>에서 지난 <2014년 12월 17일부터 2015년 2월 22일>까지 전시했다. 


여기서 <천국의 문(Porta del Paradiso)>은 이탈리아 피렌체 산조반니 세례당 소장으로 세례당 동쪽에 설치된 아티스트 <기베르티>가 제작한 <제3 청동대문(1425~1452년)>을 가리킨다. <구약성서> 이야기를 부조로 나타낸 작품으로 두 개의 대문을 각각 5구획으로 나눠, 10구획 속에 청동에 금도금한 작품이다. 이 작품은 회화적 구성과 화려한 장식성을 나타내고 있으며 배경의 건물과 풍경에는 원근법을 사용했다. 


미켈란젤로는 당시 이 작품에 대해 <조각을 회화화 했다>는 비난이 일자 <천국의 문으로 손색이 없다>고 말해 오늘날까지 <천국의 문>으로 불리고 있다. 1966년 피렌체 대홍수 이후 27년간의 복원 과정을 거쳤다.

 

프란치스코 교황 한국방문을 계기로 당시 만들어진 2개의 세트 중 한 세트(3rd 에디션)가 <위로와 평화의 선물>로 공개됐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아시아국가 중 첫 방문지로 한국을 찾았다. <분단과 대립의 한반도에 평화와 화해의 새 시대 열리기를 바라는 마음이다>라며 <한반도 평화통일을 깊이 염원하고 왔다>고 밝혔다. “희망은 위대한 선물이다. 


평화는 단순히 전쟁없는 것이 아니라 <정의>의 결과라며 <자제>와 <관용의 수양>을 요구한다”고 말했다. “<정의>는 상호 존중과 이해와 화해의 토대 위에 서로에게 유익한 목표를 이루겠다는 의지를 요구한다”며 “다채로운 전통이 있는 따뜻한 나라 대한민국은 희망 평화 사랑의 선물”이라고 칭송했다. 


“북한이 한반도와 동북아의 평화 위한 길로 나오길 바란다”면서 인간 자유의 선각자 평화의 상징 <프란치스코 교황>은 <좋은 곳에 가지 못한 영혼들 좋은 곳으로 보내 드리는 <전국민적 천도재> 행사 하고 싶은 마음 간절하다>고 밝혔다. 


“전세계인이 염원하는 평화, 사랑이루는 통일 한반도 이루기를 바란다”면서 <6.25전쟁과 이산가족의 비극>을 언급했다. “<믿음>의 본질은 <사랑>과 <평화>다. 열린 마음으로 소통과 대화로 협력 증진하는 것은 대단히 중요하다”는 것을 강조했다.

덧붙여 <제10차 세계대나무협회총회> <대숲에서 찾은 녹색미래 2015담양세계대나무박람회2015 (2015.9.17~10.31일까지 45일)>가 전남 담양 죽녹원 일원에서 열린다. 영국, 독일, 브라질, 인도, 캐나다, 프랑스, 가나, 필리핀, 벨기에, 일본, 멕시코, 포르투칼, 호주, 칠레, 중국, 미국, 콜롬비아 등 <세계대나무협회 40여개국> 1,800여 명 참가하는 가운데 34만 제곱미터 국내최대 대나무 숲을 배경으로 몸과 마음을 힐링 할 수 있다. 


이번 행사는 친환경 대나무 성장관, 미래성장관, 대나무존 오감체험 및 미디아관, 친환경농업관, 친환경 대나무의 대나무 생태전체험관 등을 비롯해 문화관, 대나무 생태전시관체험의 다양한 친환경 프로젝트로 대자연의 아름다움과 자연의 위대함을 느끼고 엿볼 수 있다. 


아울러 인공과 자연의 조화를 이룬 대한민국대표 정원 조선최고의 정원의 백미 <소쇄원>을 비롯해 <가사문학관> 등 타스퀘어길> 등 대자연의 향취를 듬뿍 느낄 수 있어 강추한다.

 

또한 <2015경북문경세계군인체육대회(2015년 10월2일~10월11일)>가 <문경시 (국군체육부대) 등 8개 시.군(문경,포항,김천,안동,영주,영천,상주,예천)에서 <cism(국제군인스포츠위원회)>주최, 대회조직위원회 <국방부>주관으로 110개국 10,000여 명이 참가하는 국제적인대규모 행사로 개최한다. 


이번행사를 위해 <국군체육부대>는 <태릉선수촌의 45배>에 달하는 <148만㎡ 부지>에서 실내훈련장 18개, 실외 훈련장 10, 실내육상경기장, 군인아파트 2동(연면적 태릉의 15배) 등을 새로 건립했다. <5대양 6대주의 화합과 평화를 염원>하며 <삼족오>를 엠블렘으로 해 <우정의 어울림, 평화의 두드림>으로 <세계일류 명품 체육대회를 비전>을 목표로 막을 올린다. 


<전 세계군인들의 우호증진의 장>으로써 경제적이고 효율적인 친환경의 안전한 <세계평화축제 한마당>을 펼친다.는 1995년 이탈리아 로마에서 제1회 대회를 개최 했다. 현역군인이 참가하는 4년마다 열리는 <세계군인올림픽>이다. 


스포츠를 통한 우정을 바탕으로 <우의증진 및 세계평화에 기여>, 프랑스, 덴마크, 베네룩스, 등 134개국이 가입해 활동하고 있다. 우리나라는 1957년 가입했으며 북한은 1993년 가입했다. 이 행사가 열리는 경북문경은 <대한민국의 중심, 세계의 중심>이라는 슬로건을 바탕을 <2015경북문경세계궁인들의 도전과 열정 그리고 우정의 한마당 스포츠 제전>을 알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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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사등록 2015-08-28 11:35: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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