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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의 정체성을 찾아서 - <시리즈2>국민행복 중심 국가디자인 공공행정네트웍 <정부3.0>
  • 기사등록 2015-08-26 18:13: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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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중근의사는 내과의사 일까요(?) 외과의사 일까요(?)” 라는 뜬금없는 물음을 던져 좌중은 큰 웃음바다를 이뤘다. 하지만 다음 순간 비수같이 날아오는 한마디 “큰일입니다. 지금 그것도 나라의 중추적인 역할을 해 나갈 젊은 공무원들 연수를 해 보면 <안중근의사>를 잘 몰라요. 우리때 와는 많이 다릅니다.

 

우리세대와 젊은세대와의 사이에 이 만큼 차이가 납니다” 한 순간 긴장감이 흘렀다. 해운대 해수욕장의 여름 풍광이 정절을 이루는 지난 7월25일(토) 오후 6시였다. 

부산영사단(회장 강의구) 초청으로 정종섭 행정자치부장관이 해운대 그랜드호텔에서 젊은 시절부터 고민했던 <‘이 나라가 어떻게 되었으면, 어떻게 하면 좋을까?’>라는 공통의 고민을 제시한 가운데 <대한민국건국과 헌법국가>를 주제로 특별 강연을 시작하면서 운을 뗀 말이다.

 

이날 정 장관은 해운대 그랜드호텔에서 34개국 부산영사들을 비롯해 정경진 행정부시장, 이해동 시의회의장, 권기선 부산지방경찰청장, 원정희 부산지방국세청장, 문철호 부산MBC사장 등이 참석한 가운데 <대한민국(大韓民國)의 근본(根本)을 찾아 떠나는 여행길>에 선봉장이 됐다. 

앞서 강의구 부산영사단회장은 인사말을 통해 “대한민국 앞으로 어떻게 만들어 가야 할 것인가(?)를 함께 고민해 보고, 생각해 보는 자리를 마련했다”고 밝혔다. 이어 “민간 외교의 첨병으로써 대한민국과 부산을 위해 숨은 곳에서 공관장보다도 더 많이 일한다는 자부심 하나로 떳떳이 열심히 일하고 있다”며 인사를 건넸다.

 

덧붙여 강 회장은 “정 장관은 명문 명필가의 현존하는 최고의 선비로 인간의 고귀한 향기가 느껴진다”고 칭찬했다. 이어 “당대의 내공 깊은 헌법학자로만 알고 있었는데 근자에 글(書) 한 수를 하사 받았다”며 “글(書)의 강인함에 놀라 정 장관에 대해 열공해 봤다”고 말했다.

 

아울러 “정 장관은 <경주안강>부락의 <조선17대 효종임금의 사부였던 정덕후의 직계후손>으로 가문에 명필(名筆)이 많이 배출돼 최고의 명맥을 잇고있다”고 소개했다.특히 “대한민국 명산대찰의 현판을 많이 썼다”는 것을 알렸다.

 

“가까이는 범어사 소사전, 동화사 청어단, 비슬산 대견사 대궐보궁, 강화도 전등사 무설전 현판 등을 썼다”며 미처 알지 못한 사실들을 밝혔다. “사찰 현판은 높은 학덕과 고매한 인품의 명문 명필이 갖춰져야 비로소 현판을 내준다”면서 “짧은 인생의 역정 속에서 그 많은 지식을 함축적으로 어떻게 다 익혔는지.....”라며 내심 부러워했다.

 

“정 장관은 유불선(儒佛禪)으로 일컫어지는 동양3교(東洋三敎)에 대단히 해박한 <현존하는 최고의 선비>다”라며 무한한 존경을 표했다. “세상을 읽는 지혜와 통찰을 오늘 강의를 통해 배워보자”고 말했다.

이날 정 장관은 취임 1주년을 지나면서 국가철학으로 세계 최대 화두는 <행복>이라는 것을 강연을 통해 밝혔다. 그러면서 영토.국민.주권의 <정부 3.0> ‘국민행복시대, 국민이 주인 되는 ‘개개인 중심의 능동적 공개. 참여 및 맞춤형 제공’의 <정부 3.0 혁신> 개요를 자세히 설명했다.

 

이밖에도 정 장관은 <광복70주년을 맞아> 러일전쟁과 동시에 군대를 파견해 조선을 위협한 일본의 근대화 과정을 소개했다. 일본은 전쟁없이 철저한 계획하에 조선의 정치 경제 문화를 점령하기 위해 ‘군사 등 모든 편의를 제공했다. 그러면서 숨은 야욕의 일환으로 강압적 한일의정서 체결(1904년) 및 을사늑약 강제체결(1905년)’을 진행했다.

 

고종황제는 네델란드 <헤이그 평화회의 특사파견>을 결정해 일본은 국제사회에서 톡톡히 망신을 당했다. 그 결과는 약소국 <조선왕조 제27대 519년> 영욕의 역사가 멸망으로 이어진 <고종 퇴위> 및 <순종 즉위>를 비롯해 일본의 조선 내 정권장악<정미7조약> 체결로 인해 조선군대 강제해산, 행정권박탈, 조선경찰 일본경찰에 통합(1907년) 등 모든 통치권이 <통감부(統監府)>로 이전돼 식민지를 본격화했다. 

 

이어지는 <이완용_데라우치(寺內正毅.1852~1919년)> 조선병합(1910년) <일본제국주의 39년> 동안의 조선침탈의 역사적 진실을 재인식시켰다. <데라우치(寺內正毅)>는 제1대 조선총독. 제18대 일본국 총리대신을 역임했다. 국제관계속에서 이웃나라 일본이 조선에 가한 서러운 역사는 광복 70주년을 맞아 수 많은 고민과 시사점을 던졌다. 하지만 정 장관은 올해 <한일국교 정상화 50주년>을 맞아 일본과의 지속적인 교류 및 협력증진으로 관계를 개선해 양국이 미래를 향해 나아갈 수 있는 기회를 만들어야 한다고 전했다. 


정 장관은 “이러한 침탈의 역사 속에서도 한반도 대한민국의 아름다운 문화적 전통이 우리들 일상생활 속에서 계승발전 됐다”는 것은 “우리민족의 자부심”이라고 말했다. “이러한 원동력의 기저에는 자연과 더불어 여여한 풍류와 서릿발 같은 기개의 조선 성리학(性理學)에 바탕한 <선비정신>이 조화롭게 이어졌기 때문”이라는 것을 강조(!) 또 강조(!)했다.

<박근혜 대통령>은 지난 <2013년 광복절 경축사>에서 환단고기(桓檀古記)의 <단군세기(檀君世紀)>편을 인용했다. “고려 말의 대학자 행촌(杏忖) 이암(李?)선생은 ‘나라는 인간에 있어 몸(體)과 같고 역사(歷史)는 혼(魂)과 같다’고 하였습니다. 

만약 영혼에 상처를 주고 신체의 일부를 떼어 가려고 한다면 어떤 나라 어떤 국민도 그것을 받아들일 수 없을 것입니다. <일본>은 이런 문제를 직시할 필요가 있습니다. 특히 과거 역사에서 비롯된 <고통>과 <상처>를 지금도 안고 살아가고 계신 분에 대해 아픔을 치유할 수 있도록 <책임>있고 <성의>있는 조치를 기대합니다”라고 말했다. 


대한민국의 리더로써 인간존엄(人間尊嚴)과 생명외경(生命畏敬)을 유린한 이웃나라 <일본>을 향해 강한 메시지를 전달했다. 이로써 고통 받은 사람에 대한 따뜻한 <배려>와 과거에 저지른 잘못에 대해 진정성 있는 <반성>을 촉구하는 한편 <대한민국>의 뿌리인 <역사교육의 중요성>을 각성시킨 바 있다.

 

대한민국 국회는 지난 5월 20일(수)부터 21일까지 이틀간 <문화융성 인성중심 사회구현>을 위해 국회 잔디마당을 최초로 개방했다. 제35회 차의 날 기념 <열린국회와 함께하는 팔도차문화 큰잔치>를 펼쳤다. 


(사) 한국차인연합회(회장 박권흠), 대한민국국회(의장 정의화) 주최로 문화체육관광부(장관 김종덕), 농림축산식품부(장관 이동필), (사)성균관유교총연합회(회장 김영근), 중앙일보(대표이사 송필호 홍석현), (주)아모레퍼시픽 오설록(대표이사 서성환), 한국차생산자연합회 쌍계제다(대표 김동곤), (주)티젠(대표 김종태 )이 후원했다. 

이로써 <인성교육진흥법 시행령>이 지난 7월14일 국회를 통과해 지난 7월 21일부터 대한민국 일선 교육현장에서 <미래인격배양 예절법도교육>이 실시되고 있다.

 

정 장관은 “젊은 시절부터 쭉 일선 교육현장에 있으면서 어떻게 하면 이 나라가 좀 잘 될 수 있을까(?)를 고민해 왔다”고 밝혔다. 그러면서 이 나라가 어떻게 되었으면 좋을까(?) 어떻게 하면 좋을까(?)라는 <공통된 주제>를 가지고 다함께 고민을 해보자라고 문제를 제기했다. 


그러면서 “부산을 위해서 대한민국을 위해서 이 나라가 어떻게 되었으면 좋겠습니까(?) 여러분!”이라고 반문했다. 정 장관은 “30대부터 지금까지 대한민국 개혁과 대한민국 사회를 올바르게 만들어야겠다”는 일념으로 “지금 여기까지 왔다”는 것을 밝혔다. 


“역대 정부에서 대한민국 개혁과 대한민국 잘 되게 하려는 것에는 다 참여했고 그 이론도 만들었다”면서 “그래서 그간 서울대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며 교육현장에 쭉 있었다”고 말했다. 이제는 “여기까지 오면서 그간 공부하고 고민했던 생각들을 한번 실천해 봐야겠다”라는 생각을 전했다. 


그러면서 미래 비전에 대한 숙제를 고민하는 듯 “길을 하나 내야겠다”고 밝혔다. 정 장관은 “김영삼 대통령 문민정부시절 대통령께서 <뭘 하고 싶으냐?>”고 물었을 때 평생에 걸쳐 공부(학문)를 해보자는 생각에서 단연 “학문을 해서 이 나라가 잘 되는 길을 하나 내는 게 소원입니다“라고 말씀드렸다는 일화를 소개했다. 


늘 곁에서 떠나지 않던 ”이 나라가 잘 되려면 학문을 해 길을 하나 내야겠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라는 것, 하지만 한때는 “복잡한 세상에 남의 입에 오르내리지 않고 온화하게 공부와 교육으로 풍류를 즐기면서 사람을 천거한 퇴계(退溪) 이황(李滉)선생 같이 제자를 길러내고 많은 글(書)을 남겨 존경 받아야겠다”는 생각을 가졌던 때도 있었다고 했다.

하지만 “현실 참여의 개혁적 지식인이었던 율곡(栗谷) 이이(李珥)를 읽다보니 많은 선비들이 공부를 해 가지고 백성이 행복하지 않으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나는 그러한 선비를 알지 못한다. 책을 읽어서 실천(實踐)을 하지 않으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어려운 일 잘 못된 일 있으면 현실에 뛰어들어 해결해야한다는 부분에서 고민을 하게 됐다”며 솔직하게 속내를 털어놨다. 


여기서 정 장관은 <현실참여> 즉 <배움과 앎>, 그리고 행동으로의 <실천> 이라는 주자(朱子)의 주리론(主理論)에 근본(根本)을 둔 깊고 은미한 학문의 요체 성리학(性理學)의 ‘이우위설(理優位設)’ 즉 실천수행(實踐修行)의 <조선의 선비정신>을 깨우쳤다.


정 장관은 “지금 대한민국은 고용창출을 많이 해서 젊은이들과 다음 세대들이 행복하게 살아갈 수 있도록 경제적인 터전을 반듯하게 마련해야 한다”고 말했다. “행자부장관으로써 이번에 임기택 IMO사무총장 당선은 대통령의 외교적 노력과 <대한민국의 힘>”이라며 “대한민국을 제대로 만들어야겠다. <국가 개조의 틀 정부 3.0>이다”라고 다시한번 강조했다.

 

이밖에도 정 장관은 “박근혜 대통령은 후보시절부터 대한민국의 개혁을 위해 <국민만 바라보고 나아가겠습니다. 국민 눈높이에 맞추고 국민 중심의 행복국가를 만들겠습니다>”라는 비전을 밝혔다. “큰 틀에서 현재 전 세계적 최고의 화두는 이 시대 이 시점에서 <국민의 행복이다. </p>


국민을 중심에다 두고 국민이 무엇이 필요한지(?) 무엇을 원하는지(?) <국민이 갑>이 되고 <정부가 을>이 되는 <공공행정시스템>을 완전히 바꾸는 <공공행정 혁신의 틀>”에 대한 비전을 열정적으로 알렸다.

 

정 장관은 여기에 대해 이해하기가 좀 힘들지 몰라도 종전의 아날로그방식이 아니라 “세계에서 1위를 달리고 있는 우리의 ICT을 활용할 것 같으면 단 기간에 실천 가능하다”는 것을 알렸다. 


“<대한민국 전자정부>는 그 동안 노력하고 축적한 네트워크를 바탕으로 정부와 지방자치단체간 공공행정서비스 공공데이터 전부를 개방했다. 이에 2년에 한번씩 발표하는 <공공행정서비스>분야에서 OECD 국가 중 전세계 전분야에서 <3년 연속 1위>를 했다”는 설명을 덧붙였다. 


“일본은 14등 했다”는 것을 비교했다. “작년 부산에서 열린 <한_아세아 정상회의> 때 <행정장관회의>를 개최했다. 여직껏 우리는 민간차원에서부터 사회사업 하듯이 <아프리카>에 수 많은 도움을 줬다. 올해 초 행정장관 회의를 하기 위해 동반구에서 가장 큰대륙 <아프리카>를 방문했다. 


<한_아프리카장관 회의>도 중요하지만 이제는 국제사회에서 소프트웨어 부분에서 대한민국이 차지하고 있는 이러한 장점과 가치를 활용해야 한다. 국가이익 및 국가전략을 가지고 대한민국 전자정부가 아프리카 등 다른 나라의 지방자치단체간 공공행정서비스망을 네트워크화해 <아시아> 뿐만 아니라 <중동>, <사우디아라비아>, <남미> 등 전세계를 겨냥해 <공공행정망 정보네트워크 경영>을 실현해야 한다”는 비전을 밝혔다.

 

정 장관은 대통령께 이 일의 중요성에 대해 “우리는 60년대 농촌개발 및 70년대 새마을운동이 성공해 글로벌 브랜드화 돼 있는 것을 비롯해 지금의 정보화사업 사회의 체계적인 농촌발전 모델을 가지고 있습니다. 다른 나라의 <낙후된 농촌사업>과 한국이 국제사회에서 차지하고 있는 <공공행정서비스 정보네트워크> 분야, 이 두 가지를 도와주셔야 합니다”라고 말씀드렸다고 전했다. 


“대한민국은 한반도를 감싸고 있는 강대국들에 의해 일제식민지를 거쳤다” 또한 “6.25전쟁의 폐허를 딛고 나라의 토대를 만든 <이승만 대통령의 건국>”을 비롯해 “<박정희 대통령>께서 추진한 새마을 운동은 이미 글로벌 브랜드로 <산업화의 기적>을 일궈냈다”며 덧붙여 “<자유민주주의의 민주화>를 성공시켰다”는 것을 설명해 참석자 모두는 절대적인 공감을 표했다. 


아울러 “전세계에서 이 <3가지>를 함께 성공시킨 국가는 <대한민국>이 유일하다”며 끝없이 변모 발전해 세계속에 그 위상이 높아진 조국을 자랑스러워했다. <원조받던 나라>에서 <원조하는 공여국>으로 발전해 전세계의 주목을 받고 있다는 사실은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세계속에서 차지하고 있는 대한민국의 위상은 우리가 생각하고 있는 것 보다 훨씬 크다”라며 한국인으로서의 자긍심을 재인식 시켰다.

이어 정 장관은 우리의 역사속에서 우리와 뗄래야 뗄 수 없는 이웃 나라 <일본의 근대화 과정>을 소개했다. 일본의 근대화 과정에서 <사카모토 료마(坂本龍馬)1836~1867>는 <명치유신(明治維新)>의 핵심 인물로 <근대 일본>의 기틀을 마련했다. 


<사카모토 료마(板本龍馬)>는 하급무사계급 출신으로 전혀 공부를 하지 않은 사람이었지만 신분의 한계를 극복하고 일왕(日王)조정에 막부정권의 반환을 요구하는 <대정봉황론>을 주장해 <막부체제의 종식>을 관철시키는데 기여했다. 하지만 반대파에 의해 31세(1867년) 때 암살 당했다. 


명치유신(明治維新)의 성과를 보지 못했다. <사카모토 료마(板本龍馬)>는 <근대 일본의 아버지>로 불리며 지금까지도 일본인들이 가장 좋아하고 존경한다. 현재 일본 초등학교에서는 <사카모토 료마(板本龍馬)>가 주장한 <일본의 정신>을 교훈으로 아침마다 소리높여 교육한다. 


<어느 곳에서 죽을 것인지를 두려워 하지마라/ 죽는 때와 죽는 곳을 가리지 마라/ 역사의 불후가 되려면 오래살고 길게 살면서 대업을 이뤄야한다/ 대업을 이루는 것이 더 위대한 일이다>

<1854년> 일본은 <가나가와>에서 미국사절 <페리>와 도쿠가와 막부정권의 <하야시>가 미국의 강압에 의해 <12개 조약>을 조인, <시모다항과 하코다테항의 개항> 및 <도쿠가와 막부정권의 쇄국체제>를 타파한 <최초의 국제조약 미일화친조약> 일명 <가나가와조약>을 체결했다. 


이에 미국은 항구의 유보구역 및 외교관 시모다 주재 등의 승인을 요구했다. 미국은 일본에 <영사재판권(1857년)>을 설정했다. 이로인해 일본은 1858년 <미일수호 통상조약>을 체결, 본격적인 <근대국가개국(近代國家開國)체제>에 들어간다. <1868년> 일본은 260년 간의 <도쿠카와 정권>을 무너트리고 <명치유신(明治維新)>을 성공시켰다. 


이때 미국은 독립전쟁에서 승리했으며 로마는 5명의 황제가 뒤바뀌는 가운데 유럽에서는 <르네상스 혁명>이 일어났다. 세계사를 변화시킨 훌륭한 인물들이 모두 그때 태어났다. 일본은 명치유신(明治維新)의 성공과 함께 내각을 주도했던 <다카모리>, <오쿠보 도시미치>, <기도 다카요시> 등 명치유신(明治維新) 3걸(傑)을 포함한 <일본의 핵심 브레인>들이 세계를 배우기 위해 <1871년> 배를 타고 <세계순방(미국&유럽)> 길에 나섰다.

 

이 배에는 나라의 독립을 위해 <안중근의사( 1909년)>가 <만주 하얼빈역>에서 사살한 우리 민족의 원흉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도 타고 있었다. 그들은 <미국>에 상륙해 6개월 동안 미국의 철도, 농사, 교육,공공행정 등등 일본에 적용시킬 많은 것들을 보고 배웠다. 


그 다음 <유럽>으로 건너가 돌아 본 뒤 2년 만에 귀국했다. 돌아와 중지를 모아 내린 결론이 <대국주의 일본>이었다. 이 새로운 세력들은 앞으로 <여성>들이 중요한 역할을 할 것으로 내다봤다. 또한 미래 일본을 이끌어 갈 <젊은이>들을 아주 중요하게 여겼다. 이로써 전통적인 신분제도였던 <사무라이제도를 철폐>시키고 <부국강병>의 기틀 마련에 나섰다. 


<1872년> 일본을 이끌어갈 <미래 브레인을 육성>을 위해 <미국>의 <국가 공무원제도>를 도입했다. 아울러 미래국가 100년을 내다보고 교육제도를 편성해 우수한 인재를 육성할 <사범학교(1872년)>를 세웠다. 또한 <1874년> 일본은 <세계최강국 국가상비군>을 만들기 위해 시골에 있던 젊은들을 다 모았다. 


<해군>강국이었던 <영국>으로부터는 해군을 지도할 장교를 돈을 주고 초빙해 영어와 군사교육을 시켰다. 또한 <육군>강국이었던 <프랑스>로부터는 육군을 지도할 장교를 돈을 주고 초빙해 프랑스어를 교육하면서 신식군대를 육성했다. 

이러한 과정을 거쳐 근대적인 국가체제를 정비한 일본은 <명치유신(明治維新) 3걸(傑)> 가운데 우두머리격인 <다카모리>가 <대륙진출의 정한론(征韓論1874년)>을 주장한다. 일본의 조선침략의 역사는 이미 여기서부터 시작됐다. 조선만 까마득히 이 사실을 모르고 있었을 뿐이다. 하지만 <사쓰마> 출신의 죽마고우(竹馬故友)였던 <오쿠보 도시미치>와 <기도 다카요시>는 <내치(內治)를 주장>하며 이를 반대했다. 


이를 계기로 정한론(征韓論)의 주장이 사라지는 듯 했으나 이미 오래전 명치유신(明治維新)의 정신적 리더로써 정한론(征韓論)을 주장했던 <요시다 쇼잉(吉田松陰 1830~1859)>의 뜻은 물밑에서 제자들에 의해 그 뜻이 이어지고 있었다. 


<야마구치현> 출신의 <요시다 쇼잉(吉田松陰)>은 무사계급출신으로 법을 어기고 미국으로 밀항을 시도하다 발각 돼 징역살이를 했다. 1856년부터 2년 반 동안 <고향 야마구치현 하기>에서 후학양성(後學養成)에 힘썼다. 30세의 젊은 나이에 <도쿠가와 막부>에 의해 처형당했다.

 

<요시다 쇼잉>의 계보에는 <헌법 내각제를 확립>한 초대 총리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 1841~1909)>를 비롯해 <근대적 군대를 육성>한 3대 총리 <야마가타 아리모토(1838~1922)>가 있다. 이밖에도 <야마가타 아리모토(1838~1922)>의 군부 계보를 잇는 <한일병합(韓日兵合)>의 주역 초대 조선총독 <데라우치 마시다케(1852~1919)>, 2대 총독 <하세가와 요시미치(1850~1919)> 등이 모두 이 계보에 속한다. 


일본 역사에서 신화(神話)적인 특별한 <야마구치현 하기> 지역은 <일본의 힘>을 탄생시킨 모태(母胎)다. <명치유신(明治維新)>의 최고 설계자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가 성장한 곳이며 일본의 군사제도를 만든 <야마가타 아리모토>, <가쓰라 다로>, <데라우치 마시다케> 등 <근대 초기 육군의 실세>가 모두 이 지역 출신이다. 


세월이 흘러 <명치유신(明治維新) 3걸(傑)>이 모두 죽음을 맞아 역사속으로 사라지자 신분이 미천했던 우리 민족의 원흉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가 <일본 초대총리>로 정권을 잡는다. 뒤를 이어 <야마가타 아리모토>, <가쓰라 다로>, <데라우치 마시다케>가 차례대로 총리를 잇는다. 일본 역사에서 <야마구치현>은 지금까지 <총리 9명>을 배출한 특별한 지역이다. 여기에 3명의 총리는 특별하게도 <하기> 출신이다.

 

여기에 덧붙여 4년전(2011년) 일본<도후쿠 대지진>으로 <후쿠시마 제1원전>사고가 발생했을 당시 현장을 컨트롤타워한 <사카모토 료마(板本龍馬)리더십>을 내세웠던 <간 나오토(管直人)> 전 총리도 이곳 야마구치현 출신이다. 


현재<간 나오토(管直人)> 전 총리는 <한일교류>에 중추적인 역할을 하면서 한국을 방문해 <동아시아 탈원전>을 주장하는 강연을 펼치는 한편 <후쿠시마원전 4주기>를 맞아 노후핵발전소 <경주월성1호기 폐쇄>를 주장, 우리에게 경각심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일본의 <후쿠시바 원전>은 러시아 <체르노빌 원전>보다 모든 면에서 11배의 위험성을 지니고 있다는 지표가 이어지고 있다. 일본 인구 1억 3천만 명 중 60%이상이 이미 암을 비롯한 심각한 질병으로 병원을 찾는 환자가 급증하고 있다고 한다. 원전사고로 인한 <세슘>의 심각성은 우리 모두가 알고 있는 것 이상이다. <캐나다>는 이미 지난 5월부터 일본의 비자발급을 중단했다.

 

현재 일본 총리 <아베신조(安培普三)>은 우리민족에게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준 조선의 마지막 총독 <아베 노부유키(阿部信行 1875~1953)>의 손자다. 또한 일본이 만주국 건설을 하면서 <아시아>를 지배하려는 전략을 철저하게 세워 중국인과 조선인의 항일투쟁을 무력화 시켰던 <기시 노부스케(岸信介1896~1987)>의 외손자다. 


<아베 노부유키(阿倍信行)>는 제2차세계대전의 패망으로 조선을 떠나면서 <“비록 우리는 전쟁에 패했지만 조선이 승리한 것은 아니다. 장담하건데 조선인이 제정신을 차리고 옛 영광을 되찾으려면 100년이 더 걸릴 것이다. 우리 일본은 조선인에게 총과 대포보다 더 무서운 식민교육을 심어놨다. 조선인들은 서로 이간질하면서 노예적인 삶을 살 것이다. 그리고 나 <아베 노부유키(阿培信行)>는 다시돌아온다”>라는 정말 무서운 말을 하고 떠났다.

벌써 70년 전 얘기지만 우리는 이러한 일제식민지 속에서도 민족 전통에 바탕한 강인한 정신력의 혼(魂)으로 그 모든 고난을 극복하고 우리의 소중한 문화를 지켜냈다. 그래서 우리는 <대한민국 광복70주년> <한일국교수교50주년>을 맞아 <주권>회복을 위해 독립운동으로 희생한 분들과 건국으로 나라의 토대를 마련한 분들을 비롯해 6.25전쟁의 폐허속에서 <국민>의 경제력 회복을 위해 산업화를 이룩한 분들과 민주주의 쟁취를 위해 노력하고 기상을 드 높인 고마운 어른들에 대한 공경심(恭敬心)을 가슴 깊이 되새겨야 한다.


아울러 일본은 아직도 시대착오적인 발상으로 동해(東海)를 일본해(日本海)로 표기하고 독도(獨島)를 <다케시마>라 부르며 지속적인 영유권을 주장하고 있다. 이러한 외교 분쟁을 강행하고 있는 일본으로부터 우리는 바른 역사관으로 우리의 소중한 <영토> 독도(獨島)를 소중하게 지켜내야 한다. 


21세기 대한민국은 작은 나라가 아니다. <국민이 행복한 나라> 국민을 중심에다 두고 모든 공공행정시스템을 일원화 한 <전자정부 3.0>이 실현되고 있는, 전세계를 네트웍할 수 있는 <세계최고 IT강국> 블루오션 희망의 나라다.

 

일본은 1890년 <야마가타 아리모토 총리>가 취임하면서 <이익선(利益先) 외교 정략론>을 발표했다. 국가 이익의 초점이 <조선>이라는 것을 분명히 밝혔다. 이 계획의 뒷면에는 일본의 대국중심주의 건설의 <조선>, <만주>, <시베리아>, <중국>을 거쳐 다시 <동남아시아>에로의 전략이 숨어있었다. 


일본은 <야마가타>에 의해 1894~1895년 그 첫 시도로 <청일 전쟁>을 일으킨다. 청일전쟁에서 승리한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는 <청나라 리훙장>을 <야마구치현>으로 불러 <시모노세키조약>을 체결한다. 이에 힘이 실린 일본은 스승 <요시다 쇼잉(吉田松陰)>의 <정한론(征韓論)>을 대두시키며 <1873년> 조선을 한번 건드려 보자는 전략을 구사한다. 


이로써 <강화도> 앞바다에 일본 군함을 침입시켜 조선군대의 발포를 유도, 경고사격을 받자 함포를 발사, <초지진>과 <영종도>를 포격하는 <운요호사건(1875년)>을 벌인다. 이를 구실로 <부산항>, <인천항>, <원산항>의 개항을 요구 조선은 개항을 했다. 뿐만 아니라 <부산>, <목포>, <강화도>를 비롯해 <남해안>, <서해안> 일대에 혼란을 일으킨다. 조선은 전쟁을 피하기 위해 <강화도 연무당>에서 대포까지 배치된 강압적인 분위기속에서 불평등한 최초의 근대조약 <강화도조약(1876년)>을 체결한다.

 

여기에 군인(軍人)들에게 주는 군량미(軍糧米) 배급에 양반들이 돌을 섞어 군인(軍人)들이 반란을 일으킨 것이 <임오군란(壬午軍亂1882년)>다. 이때 <청나라>가 군대를 보내 난(亂)을 진압했다. 


이로써 다시 사사건건 <청나라>의 간섭을 받게 됐으며 <일본>이 주둔 할 수 있게 됐다. <1883년 조선의 개혁파> 민영익, 김옥균(1851~1894), 홍영식(1855~1884), 박영효(1861~1884), 윤치호, 조선의 최고천재 유길준 등 20명의 조선 젊은 지식인들도 일본의 명치유신을 주도했던 엘리트들처럼 선진국을 배우기 위해 대서양을 건너 <미국>으로 갔다. 미국에서 유럽으로 가보려 했으나 돈이 없어 귀국했다. <민영익> 혼자 사재로 유럽을 방문했지만 조선을 위해 큰 역할을 하지 못했다. 


<1884년 청나라>의 간섭이 심해지자 조선의 지배층 젊은 엘리트들로 이뤄진 <개화파>들은 일본, 청나라, 유럽 등의 선진서적을 탐독하면서 <국제조류>에 일찍 눈을 떠 <실학사상>을 일찍 받아들인다. 이에 <미국, 중국, 러시아, 일본 등 세계열강들>에 에워싸인 <19세기 조선의 근대화>와 <조선의 변혁>을 꿈꾸며 <기존체제를 타파>하고 <새로운 국가 수립>을 위해 <자주독립>과 <부국강병만>이 살 길이라며 <강력한 개혁>으로 변화를 모색했다.

<개화파> 민영익, 김옥균, 홍영식, 박영효 등은 <일본의 힘>을 빌려 자신들의 뜻을 이루려했다. <개화파>들은 <우정총국> 개국 축하연의 불길을 신호탄으로 <갑신정변(1884년12월4일)>을 일으킨다. 하지만 비밀이 새어나가 <민비>는 <청나라 위안스카이>를 찾아가 <청나라군대>를 끌어들인다. 


개화파들은 <청나라>를 몰아내고 사회제도를 고치기 위한 발표를 했으나 <청군의 무력>과 <일본>이 약속을 져버리고 철수해 <조선의 개혁>을 주도했던 갑신파 전부를 <죽음>으로 몰고갔다. 결국 <갑신정변>은 <새로운 세상을 꿈꾼 젊은이들>이 일으킨 <3일 천하>로 끝났다. 


이로써 김옥균, 서광범, 서재필 등은 <일본>으로 <망명>했다. 역사속에서 아쉬움을 남긴 <갑신정변>의 개화파들의 주장은 <근대적 기구> 만들어 <일의 분담>, <임금이 나라의 일을 혼자 정하지 않고 관리와 함께 결정>, <청에 바치던 조공 폐지>, <부정한 관리 처벌과 백성이 빚진 쌀 면제>, <죄인을 다시 조사해 죄없는자 석방>, <신분제 없애고 능력에 따라 관리임명>등 이다. 


현행제도와 크게 다르지않다. <김옥균>은 과거시험을 거부했다. <홍영식>은 과거시험을 쳐서 뭐하느냐(?)고 했다가 아버지가 굶겨 죽이려고 뒤주에 가둬 2주일 만에 풀려나는 고통을 받는다.

 

하지만 이들 개화파 홍영식은 청에 의해 살해 당하고 김옥균, 박영효, 서광범, 서재필 등은 일본으로 망명했다. <전통유학 지식>에 <서양의 지식을 접목>해 <변화>를 시도하려 했지만 역부족이었다. 이때 <서당교육>을 받던 가장 나이어린 <이승만>이 완전히 생각을 바꿔 <신교육>을 받아들이는 <기회>가 됐다. 


1884년 <갑신정변>의 실패로 김옥균, 서광범, 서재필 등은 일본으로 망명했다. 조선의 천재로 불렸던 최초의 국비 유학생 <유길준(1856~1914)>은 옥에 갇혀 <최초의 국한문 혼용체 서적 서유견문록(西遊見聞錄)>을 집필했다. 이후 서재필(1864~1951)은 18세에 미국으로 1895년 의사가 돼 조선으로 돌아왔다. 


<독립신문 발간>, <독립협회 설립> 및 <중국>으로부터의 독립 위해 <독립문>을 세웠다. 러시아 중국 미국 일본 등 강대국들에 휩싸여 있던 약소국 조선은 1904년 <청일전쟁>에서 일본이 승리하면서 이미 오래전에 예고돼 있던 정한론(征韓論)으로 <제2차한일협약>을 체결했다. 강제로 체결됐다고해 일명 <을사늑약(乙巳勒約)> 또는 <을사조약(1905년)>이라 한다. 


이로써 <조선식민지 39년>의 길고 긴 아픔의 역사가 시작된다. 더군다나 <1910년> 경술국치 조인 <한일병합>은 <조선 500년 종묘사직>에 종지부(終止符)를 찍은 날이다.

 

아울러 안중근 의사는 <만주 하얼빈역 (1909년)>에서 우리민족의 원흉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를 사살하고 현장에서 체포돼 <뤼순 감옥>에서 32세의 나이에 처형됐다. 올해 안중근 의사 순국 105주년이다. 안중근 의사는 조국의 독립을 위해 강직한 신념의 살신성인으로 행동한 독립운동가이며 교육자다. 그의 단지(斷指)가 찍힌 옥중에서 쓴 붓글씨 <一日不讀書 하면 口中生荊棘이라. 하루라도 책을 읽지 않으면 입안에 가시가 돋힌다>는 자라나는 청소년들에게 책읽기(讀書)의 중요성을 일깨우는 귀감(龜鑑)이 되고 있다. 


안중근 의사는 미래 평화를 염원하는 후손들에게 반드시 알게 해야 할 <민족 혼(魂)의 상징>이다. 처형되기 전 <“내가 죽은 뒤에 나의 뼈를 하얼빈 공원 곁에 묻어 두었다가 우리 국권이 회복되거든 고국으로 반장을 해다오”>라는 유언을 남겼다고 전한다. 하지만 아직까지 그의 유해는 발굴되지 못한 채 조국의 품에 안기지 못하고 있다.

 

정 장관은 ”지난 2010년 예술의 전당에서 열린 <안중근의사순국 100주년기념 글씨전시회>에서 사형장에서 죽음을 앞 둔 3분전에 찍었다는 사진을 자세히 보게 됐다“며 그때 ”곁에 있던 글씨도 자세히 봤다“는 기억을 되살렸다. 그러면서 ”극히 개인적인 체험이지만 순간 온 몸이 전율해 오는 특별한 경험을 했다“는 공감대를 형성했다. 


”어떻게 죽음을 앞 둔 사람의 눈빛이 저토록 고요하고 평화스러울 수 있을까(?)“ 그 순간의 강렬한 그 느낌을 지금도 떨칠 수 없는 듯 상황을 전하려 애썼다. ”그런데 가만히 헤아려보니 그때 안중근 의사의 나이가 30세였다“면서 정 장관의 <안중근 의사> 글씨 전시장에서 느꼈던 통절한 반성은 “아!아! 헛살았구나. 


그때 내 나이는 이미 50을 넘어 있었다“라며 ”내가 이렇게 살고 있는 것이 내 능력이 아니구나. 지금까지의 삶이 내것이 아니구나. <안중근 의사>가 없었더라면 내가 과연 이렇게 살아가고 있을까(?) 스스로를 반추해 봤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나도 이제 남은 인생을 나라를 위해 살아가야겠구나. 지금까지 공부한 것들을 다 내놓아야겠구나. 대한민국을 위해서 더 열심히 공부해서 젊은이들과 다음세대 후손들을 위해서 남은 인생을 살아야겠구나”> 라는 다짐과 진심어린 소회를 밝혔다. <안중근 의사>는 이미 20대에 동양삼국(東洋三國)이 평화롭게 살아갈 수 있을까(?)라는 민족적 고뇌(苦惱)를 했던 뛰어난 지식인(知識人)으로 <동양삼국평화론(東洋三國平和論)>을 집필했다. 정부는 그에게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했다.

 

아울러 “일본이 지난 11동안 지속적으로 독도(獨島)를 저희들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는 지금의 상황은 저들이 우리민족에게 100년 전에 했던 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며 속상해 했다. 정 장관은 “현재 미국 러시아를 비롯한 한중일 동북아시아의 긴장상태가 <19세기 조선의 현실>과 거의 비슷한 상황이다”며 “나라를 위해서 우리는 어떻개 해야 할 것인가(?) 급변하는 세계정세 속에서 지금 이 나라가 온전하게 갈 수 있을까(?)”라는 물음을 던졌다. 


그러면서 “이번 <대한민국광복70주년 광복절날에는 <독립운동가>들의 후손을 찾아서 국무위원식당에 모셔야겠다“며 ”선조들의 훌륭함을 기억시키고 자긍심을 가질 수 격려 하겠다“는 약속을 했다. 덧붙여 ”나라가 위기에 처했을 때 바른말 하는 사람이 얼마나 중요한지....“라면서 임진왜란의 위기 상황속에서 선조에게 충언(忠言)을 했던 <퇴계(退溪) 이황(李滉)>의 제자(弟子) <징비록(懲毖錄)>을 남긴 <서애(西厓) 유성룡(柳成龍1542~1607)>을 예로 들었다.

 

정 장관은 이날 “우리나라 경제계 물론 어렵지만 고용 창출해 우리 젊은이들에게 희망을 주어야 한다. 정치인들은 희망있는 정치로 생산적인 국가를 만들어야 한다. 공직자들은 생각을 바꿔 정부가 효율적이고 생산적이도록 빨리 탈바꿈해야 한다. 


국민들이 주는 세금을 하나하나 잘 쓰일 수 있도록 하는 제도적 장치가 필요하다”는 제언을 했다. 그러면서 “국민은 행복을 추구할 권리가 있다. <국민 중심의 행복 국가 정부3.0>은 <대한민국헌법 10조>를 행하고 있는 것이다. <헌법학자>가 하는 일은 <국가를 디자인>하는 일”이라는 것을 다시한번 직지(直指)시켰다. 이어 참석자들을 향해 “이 문제를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여러분!”이라는 뉘앙스를 남기며 어려운 숙제를 안겼다.

정 장관은 조선 중종.명종대를 대표하는 주자(朱子)의 주리론(主理論)을 근본(根本) 삼아 이우위설(理優衛設)을 계승 발전시킨 영남학파 성리학(性理學)의 선구자 사림파(士林派) 관료 동방오현(東方五賢) 중 한 사람인 문원공(文元公) <회재(晦齋) 이언적(李彦迪. 1491~1553)>의 학문과 덕행을 기리기 위해 경주부윤 이제민이 창건한 옥산서원(玉山書院. 사적 154호. 편액 秋史 김정희 作)이 자리하고 있는 <경주 안강>이 고향이다. 


<회재(晦齋) 李彦迪(이언적)>은 <하늘과 사람이 하나>라는 것을 확대해 <인간의 일과 하늘의 일을 일치>시켰다. 그래서 그는 <자연재해를 하늘이 부덕한 인간>에게 내리는 재앙이라고 해석해 <도덕성 회복>을 촉구했다. 그는 <경(敬)> 중심의 <수양 철학(修養哲學)>을 발전시켰다. 


<회재(晦齋) 이언적(李彦迪)>의 제자(弟子) 영남학파 성리학의 선구자 <퇴계(退溪) 이황(李滉)>은 <수양철학(修養哲學)의 완성자(完成者)>로써 <사단칠정론(四端七情論)>을 전개해 <천인일체(天人一體)>의 <본 모습을 회복(回復)>하기 위한 <한국적(韓國的)인 수양법(修養法)>을 완성(完成)했다. 


이 과정에서 이기론(理氣論)이 심성론(心性論)을 심화(深化)시키는 차원에서 더욱 발전해 깊이 있는 형이상학적(形而上學的)인 체계가 구축됐다. <퇴계(退溪) 이황(李滉)>은 한국이 낳은 <세계적(世界的)인 철학자(哲學者)>로 손꼽힌다.

 

이와 더불어 <자연(自然)과 인간(人間)은 하나>라는 <유(儒) 불(佛) 도(道)> 삼교(三敎)를 통일(統一) 하려는 한국철학(韓國哲學)의 전통(傳統)은 한국성리학(韓國性理學)에서 그대로 나타난다. 이와 함께 서경덕(徐敬德)은 <성리학자(性理學子>)이면서 <자연철학(自然哲學)>을 발전시켜 <노장적(老莊的) 성격>을 갖는 <유학(儒學)>을 발전시켰다. 


<남명(南冥) 조식(曹植)>도 같은 계열에 속한다. 그리고 <매월당(梅月堂) 김시습(金時習)> 역시 <성리학자(性理學子)이면서도 <유교(儒敎)와 도교(道敎) 불교(佛敎)>를 두루 섭렵해 자기 사상(思想)으로 녹여냈다. <정 장관>이 존경하고 흠모하는 <추사(秋史) 김정희(金正喜)>도 이와 <맥(脈)>을 같이한다. 


조선의 상징 성리학(性理學)은 <퇴계(退溪) 이황(李滉)>과 <율곡(栗谷) 이이(李珥)>에 이르러 <철학적 발전의 절정>에 달했다. 하지만 임란(壬亂) 이후 조선 정치가들의 치열했던 고민의 상징 <사색 정당(四色政堂)>의 <공리공론(空理空論)> 이론적(理論的) 무기 노릇을 하면서 서서히 퇴보했다.


한편 <정 장관>은 헌법학자, 최고의 행정관료, 현존하는 최고의 선비라는 고매한 프로필과 더불어 젊은시절부터 추사(秋史) 김정희(金正喜)에 대한 흠모(欽慕)로 필력(筆力)에 정진했다. 가풍(家風)으로 이어진 서도(書道)의 맥(脈)은 이미 앞에서 강의구 회장님께서 소개했듯이 그 묵(墨)의 수려함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지난 2014년 2월10일 ‘시간이 흘러도 위대한 생각은 녹슬지 않습니다. 스물여덟 글자로 백성의 눈을 뜨게 하겠다는 세종대왕의 혁신적인 생각처럼 수 백 년이 지나도 변함없는 위대한 가치들이 있습니다. 


포스코(POSCO)는 다 함께 더 나은 세상을 만들어가기 위해 보다 혁신적인 생각으로 세계 제일의 철강기업을 넘어 사랑받고 존경받는 기업 POSCO the Great를 향해 나아가겠습니다’를 캐치프레이즈로 세계시장에서 신뢰와 정직으로 한국의 위상을 드 높이고 있는 포스코(POSCO)의 포스코 미술관(강남구 역삼동)에서 <추사 김정희 글귀를 임서하다> 전시회를 열기도 했다.

 

<정 장관>은 전시에서 <“(春風大雅能容物) 봄바람처럼 큰 아량은 만물을 용납하고/(秋水文章不染塵)가을 물같이 맑은 문장은 티끌에 물들지 않는다”>는 한시(漢詩) 작품을 내걸어 사람의 향기를 전했다. 이미 항간에서는 신언서판(身言書判), 문.지.덕.겸.용.사.철.화(文.知.德.兼.勇.史.哲.和)까지 겸비한 유불선(儒佛禪) 3교(三敎)에 걸림없이 자유로운 원각(圓覺)을 이룬 고매한 인품의 소유자로 정평나 있다. 


이 전시는 <포스코(포항제철)>, <경찰청>, <포스코 경영연구소>가 함께한 <서예교류전>으로 <정준양 포스코 회장, 권오준 사장 및 임직원>, <강신명 서울경찰청장과 경찰청 임직원들>이 함께 묵향(墨香) 그윽한 작품들을 출품해 화제를 모았다. 이밖에도 정 장관은 <제20회 한국헌법학회회장>으로써 <헌법학원론>,<행정입법 국회통제권 보장필요> 등 다수의 <법(法)> 관련 저서(著書)들이 있다. <황교안 국무총리>와는 막역한 친구로 잘 알려져 있다.


이날 <정 장관>은 광복70주년을 맞아 <애국정신>과 <자유민주주의>의 철학으로 대한민국을 건국한 이승만 대통령의 발자취를 사진과 함께 엮어 <젊은이들에게 올바른 역사관을 정립>케 하는 <건국대통령 이승만의 생애(안병훈 엮음)>를 참석자들에게 선물했다. 


차별없는 세상을 꿈꾼 <이승만 대통령(1875~1965년)>은 강대국들과 맞서 <12년간 건국 대한민국>을 이끌며 정책으로 수립한 <의무교육>, <농지개혁> 등을 실천한 <민족의 선각자>다. 또한 1913년 하와이에 정착해 8개의 섬으로 이뤄진 하와이를 조선 8도에 비유하며 <독립과 자유의 나라 대조선(大朝鮮)>을 꿈꾸며 <정치가>, <사상가>, <교육자>, <학자>, <종교인>, <애국자>라는 화려한 수식어가 붙는 이름에 걸맞게 한국 이민자들이 미국 땅에 처음으로 세운 하와이 호놀룰루 <한인연합기독교회(감리교)>에서 독립운동을 했다.

 

<최초남녀공학학교>를 세워 <교육>에 진력했으며 <태평양잡지(1914년>)를 발간해 다양한 소식을 알렸다. 더불어 고국 땅에서 펼친 등은 그리스도에 대한 사랑과 믿음을 바탕으로 우리 <젊은이들에게 글로벌적 문화와 교육>을 통해 세계를 향해 나아가는 <일류국가>로의 원대한 희망을 품었기 때문이다. 


<대한민국건국대통령> <우남(雩南) 이승만>은 <풍부한 국제경험>과 <탁월한 식견>을 바탕으로 일찍이 <장제스 대만총통>과의 각별한 우정으로 <한국과 타이페이>를 오가며 교류 증진에 힘썼다.


또한 <베트남 고딘 디엠 대통령>과의 상호 방문을 통해 우의를 다졌으며 <베트남 국립대학>으로부터 <명예법학 박사학위>를 받기도 했다. 특히 <원자력의 효용>에 일찌감치 눈 떠 오늘날 <한국원자력연구소(1980년)>의 독자모델 <한국형 경수로 개발>이 결실을 맺는데 산파역이기도 했다. 이를 바탕으로 <지난 2010년 47조원> 규모의 <아랍에미레이트(UAE) 원자력발전소> 건설 사업을 수주하는 쾌거를 이뤘다. 


이에 응용물리학자 <정근모 전 과학기술처 장관(응용물리학자)>은 <“이승만 대통령이 없었다면 원전 수출을 꿈꾸는 것은 불가능했다”>고 밝힌 바 있다. 이 시점에서 우리 모두는 오로지 <영토> <국민> <주권>이라는 <자유민주주의 대한민국>을 지키기 위해 시대를 앞서간 지식인으로 자기희생의 삶을 살았던 이승만 대통령의 생애를 되돌아 봐야한다.


<이경신 부산시바르게살기협의회 회장>은 <독도>관련 질문을 통해 “일본 젊은이들은 조선침략의 역사를 잘 모르고 있는 것 같다”고 말하자 정 장관은 “현재 <독도>에 관련한 역사적 자료는 풍부하다. 하지만 일본은 젊은이들에게 <조선침략의 역사>를 가르치지 않는다. 일본 젊은이들은 조선 침략의 역사를 잘 모른다. <일본 젊은이들에게 독립기념관>을 보여줘 자신의 나라가 <대한민국>에게 어떻게 했는지 <직접 현장을 방문>하게 해야한다”며 <올바른 역사관 정립>에 무게를 실었다. 

<부산영사단 강의구 회장>은 “최근 부산 영사단은 <피지>영사관을 문 열었다”면서 “현재 부산영사단은 <34개국>과 명예영사관 체결을 맺고있다. 2020년까지 <50개국>을 목표로 개설 하겠다”는 목표를 밝혔다. 이에 부산MBC 방송국 사회자는 “글로벌 도시 위상을 드높이는 첨병 역할을 해줄 것을 믿는다”라며 “더욱 내실 있고 왕성한 활동을 할 수 있기를 부산시민들과 함께 응원하겠다”는 멘트를 덧붙였다.

 

<이해동 시의회 의장>은 축사를 통해 “민간외교의 선봉에서 우리 부산이 명품 국제도시로 발전하는데 중추적 역할을 해주신 명예영사단 여러분께 진심어린 존경과 감사의 박수를 보낸다”고 말했다. 이어 “국정에 바쁘신 가운데서도 좋은 말씀 전해 주시기 위해 이 자리에 오신 정종섭 장관님께 감사 드린다”며 ‘사람과 기술 문화로 융성하는 글로벌 해양 도시’ 부산방문을 진심으로 환영했다. 


또한 “뜻 깊은 소통과 부산발전을 위해 자리를 만드신 <부산영사단 강의구 회장님>과 <박사익 사무총장님>, <정경진 부시장님>께 감사드린다”고 인사했다. 특히 “급변하는 국제 환경의 불확실성 복잡성 속에서 외교의 중요성과 세상을 읽는 지혜 및 시대를 읽는 통찰력으로 글로벌 무한 경쟁시대에 부산을 세계에 널리 알리기 위해 민간외교로 명예를 드높이고 있는 <부산명예영사단> 관계자 여러분들깨 감사”를 전했다.

 

<정경진 행정부시장>은 “뜻 깊은 자리에서 서병수 시장님의 해외출장으로 축사를 대독하게 됐다”면서 “부산발전을 위해 늘 애쓰시는 <부산영사단 강의구 회장님>을 비롯해 국정에 바쁘신 가운데서도 특강을 위해 부산을 찾아주신 <정종섭 장관님>을 진심으로 환영한다”고 인사했다. 특히 “사람과 기술 문화로 융성하는 부산은 , <세계원조개발총회>, , <한아세안특별정상회의> 등 각종 국제행사의 성공적 개최했다. 


이를 발판으로 글로벌 도시의 역량을 높이고 있다”면서 앞으로 “세계적기업 유치 및 세계 여러 도시들과 글로벌 협력강화로 나아갈 것”을 소개했다. 또한 “인도, 중국, 유럽지역 주요도시 세일즈 시정을 적극적으로 펼쳐 <지역기업세계시장 개척지원>, <의료관광객 유치협력> 등 경쟁력 강화로 <경제문화 교류협력>의 폭 을 넓혀 나가겠다”고 밝혔다.

 

그리고 신라 고도 경주시 일원에서는 '유라시아문화특급' <실크로드경주2015. Silk Road Cultural Festival in Gyeongju 2015>가 오는 <8월21일부터 10월18일(59일간)까지> 열린다. 이번 행사는 정부의 <유라시아 이니셔티브>를 문화적 영역에서 풀어내는 의미를 담고있다. 인도, 말레이시아, 몽골 등 실크로드 주변의 20개국을 포함해 총 47개국 1만여 명이 참여하는 다양한 문화콘텐츠 소통이 기다리고 있다. 


더불어 환상적이고 창의적인 마력의 고대문화에 대한 역사적 상상력 체험 및 신비로운 신라 쳔년의 미소 석굴암 등을 21세기 IT로 접목해 <문화융성>과 <창조경제>의 두 날개가 함께한다. 이밖에도 문화재청(청장 나선화) <지방의례문화 행사>로 올해 처음 선정된 <경주월성(사적 제16호)의 월성호위군 활동 및 교대식>행사는 눈여겨 볼 만하다. 이외에도 경주에는 한국문단(韓國文壇)의 거두(巨頭) 김동리, 박목월의 <동리목월문학관>이 불국사(佛國寺) 가까이 자리하고 있다. 

한편 강원도 <강릉 오죽헌시립박물관>에서는 지난 <8월 6일부터 오는 31일>까지 <조선왕조실록> 중 <태조>부터 <명종>까지의 실록 <오대산사고 조선의역사를담다>라는 주제로 <오대산사고본조선왕조실록>과 <의궤특별전>을 개최하고 있다. 


오는 2018년 동계올림픽을 문화올림픽으로 구현하기 위해 우리나라 기록문화의 정수, <조선왕조실록> 및 <의궤>를 전시함으로써 우리의 기록문화 유산을 대내외에 널리 알리고 있다. 특히 <광복 70주년> 및 <2018년 동계올림픽을 문화올림픽>으로 구현하기 위해 전시 중인 <오대산 사고본 기록물>들은 일제강점기 때 일제에 의해 1932년 반출됐다가 지난 2000년 2011년 세차례에 걸쳐 우리나라로 반환된 문화재다. 

<강원도오대산사고>는 <조선후기5대사고> 중 하나로 옛 <강릉부> 관할이었다. 이번 특별전에는< 대한제국선포>와 관련된 <황제즉위식 및 황후황태자책봉> 등 <고종대례의궤40책>과 <조선제9대성종대왕재위25년>간의 역사를 기록한 <성종대왕실록>을 포함한 <실록10책, 왕실유물17점> 등 <총67점>의 유물이 전시 중이다. 이 전시는 <문화재청>과 <강원도> 주최 <강릉시> 주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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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사등록 2015-08-26 18:13: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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