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경제신문/편집국]
學而-1
子曰 學而時習之 不亦說乎 有朋自遠方來 不亦樂乎
人不知而不? 不亦君子乎
子(아들 자//경칭(敬稱)과 스승의 뜻으로도 쓰임, 남자, 사람) 曰(가로 왈)
배우고(學而) 때로(時) 그것을(之) 익히면(習)
또한(亦) 기쁘지(說) 아니(不)한가(乎)?
學(배울 학) 而(말 이을 이) 時(때 시) 習(익힐 습) 之(갈 지//어조사(語助辭), 대명사(그것)로도 쓰임),
不(아닐 부(불)) 亦(또 역) 說(기쁠 열(=悅)) 乎(어조사 호)
學而-1-1. 공부가 과연 기쁘고 즐거운 일인가?
먼저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논어라는 책이 <공자의 독백>을 담은 책이 아니라 <공자와 제자들간의 대화>를 기록한 어록집이라는 사실이다. 다시말해 논어는 공자가 자신의 생각을 정리해서 직접 쓴 책이 아니라, 공자의 제자들이 스승인 공자로부터 배우면서 들었던 간단한 메모들을 한데 모아서 엮어놓은 것이기 때문에, 논어는 비록 공자의 사상을 담고는 있지만 일관되게 체계적으로 쓰여진 책이 아니다.
내용도 같은 성격의 글들을 모아놓은 것이 아니어서 학이편이라고해도 모두 학문에 관련된 것이 아니고 심지어 같은 글귀가 다른 편에서도 중복되어 나오기도 한다. 사실 20개 나눠진 각 편의 제목도 그 편에 나오는 글귀의 가장 첫 단어를 뽑아쓴 것에 불과하다. 따라서 논어는 반드시 처음부터 끝까지 순서대로 다 읽어야 하는 것도 아니며, 자신이 원하는 곳만 골라 읽어도 된다.
그런데 이런 논어의 첫구절은 <공부하는 것이 기쁘다>는 다소 의외의 구절로 시작하며, 이 구절에서 <공부>하는 것을 뜻하는 <학습>이라는 말도 생겨났다. 우리는 이 학습이라는 말 속에 두가지 의미가 담겨있음을 알 수 있다. 먼저 학(學)은 내가 전에는 몰랐던 것을 새롭게 알 수 있도록 배운다는 것이요, 그 다음 습(習)은 학(學)을 통해 배운 것을 완전히 내 것으로 만드는 과정이다.
그런데 공부하는 것이 기쁘다? 상식적으로 이 대목에 동의하는 사람이 과연 몇이나 될까? 대체로 학(學)은 기쁘고 즐거울 수 있다. 그러나 습(習)은 매우 고통스런 과정이다. 만약 시험과 평가라는 것이 없다면 학생들도 학교에서 공부하는 것이 싫거나 힘들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진학과 선발과정을 통과하기 위해서는 고통스런 습(習)의 과정을 거쳐야만 한다. 그래서 누구나 공부가 싫은 것이다. 성적이 우수한 학생이라도 정말 좋아서 예습 복습을 하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스스로 학문을 좋아한다고(好學) 입버릇처럼 말하던 공자의 입장에서라면 충분히 그럴 수도 있겠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의 답은 분명 No 일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말은 논어라는 책의 가장 첫부분에 의도적으로 배치가 되었다. 왜일까? 물론 학문을 권장하는 의도도 내포되어 있겠지만 공부벌레가 아니라도 공부하는 것이 기쁘고 즐거운 경우가 분명 있다. 예를 들어 공부한 결과가 나에게 큰 이익을 확실히 보장해 줄 때 그렇다는 것이다.
만약 구직자가 열심히 새로운 것을 배워서 그 내용을 확실히 익혔을 때, 꿈에 그리던 직장에 100% 취업이 보장된다면 공부하는 것이 왜 기쁘고 즐겁지 않겠는가? 공자의 제자들이 그랬다. 공자가 활동하던 시기의 중국은 춘추전국시대라는 혼란기였다. 따라서 먹고사는 문제가 매우 어려웠을 것이다. 그런데 공자가 누구인가? 당시 모든 사람이 인정하는 예법의 최고 권위자였다. 따라서 국가의 모든 것이 예법으로 결정되던 춘추전국시대에 공자에게서 그 예법을 제대로 배웠다면 그는 국가경영에 꼭 필요로 하는 예법을 완벽하게 체득한 인재가 되는 것이고 따라서 취업과 진로가 보장되는 것이었다. 그러니 왜 공부가 기쁘고 즐겁지 않겠는가?
한편 학이시습지(學而時習之) 에서 시습(時習)은 <때로, 때에 춰서, 때때로, 때를 정해서 배운다> 등으로 다양하게 번역된다. 그런데 이 유명한 논어의 첫구절을 자신의 이름으로 삼은 사람이 있으니 바로 조선 초기의 천재 문인이자 생육신의 한사람인 <매월당 김시습(金時習), 1435~1493>이다. 또한 향교나 서원의 유생들의 기숙사(동재,서재)에 시습재(時習齋) 또는 습시재(習時齋)가 많은 이유도 권학의 의미를 담고 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