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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영도다리 그리고 민족음악가 채동선


1950년 6월 25일 시작된 한국 전쟁은 1953년 7월 27일 휴전 협정이 조인될 때까지 3년 1개월 동안 계속되었다. 1950년 8월 18일부터 1953년 8월 15일까지 1000일간 부산은 대한민국의 중심이었다. 하루도 쉴 날이 없었던 정치적 격동과 생존이 절박했던 피난민들의 몸부림은 두 번 다시 되풀이 돼서는 안 될 역사의 악몽이었다.

해방 후 오갈 데 없는 일본과 만주지역의 동포를 품에 안았듯이 부산은 전국 각지에서 몰려드는 피난민을 품에 안았다. 피난민들은 미군 야전용 식량박스, 깡통을 펴서 만든 양철판, 나무판자, 가마니 등으로 얼기설기 엮은 판자집을 지었다. 이런 판자집들은 용두산 산비탈을 중심으로 영도까지 4만여 채가 지어졌다. 피난대열에 참가했던 서울과 전국 각지의 문화예술인들은 궁핍하고 힘든 피난 생활 속에서도 작품 활동을 지속했다.
 
눈물 젖은 두만강을 불렀던 국민가수 김정구가 절망의 나날을 보냈고 소그림으로 유명한 화가 이중섭도 생존을 위해 부두 노동자로 일하며 담뱃갑 은박지에 못으로 그린 그림들을 한 끼 식사와 맞바꾸기도 했다.
“오발탄”, “학마을사람들”로 유명한 소설가 이범선은 병을 앓는 자식을 위해 미군부대창고에서 약품을 훔친 후 마지막 양심의 선을 넘고야 말았다며 인간에 대해 환멸을 느꼈던 8개월간의 피난살이를 생생하게 묘사한 “나의 피난기”를 남겼다.

박화목의 시 “옛생각”의 제목을 바꾸어 불후의 명곡 “보리밭”을 작곡했던 윤용하는 외로움과 가난에 지쳐 43살의 나이로 부산에서 세상을 떠났다. 예술인들의 사랑방 역할을 했던 밀다원, 금강다방, 태백다방, 스타다방, 릴리다방 등은 예술인들이 모이고 정보를 교환하는 창작공간 활동이었다. 피난살이의 어려움을 다룬 “곡예사”를 집필했던 황순원을 비롯하여 “밀다원시대”를 단편으로 남긴 김동리, “세월이 가면”, “목마와 숙녀” 등의 시를 남긴 박인환, 하늘이 내린 춤꾼이라 불리우는 이매방 등 시인, 화가, 음악가, 무용가, 소설가, 국악인들은 피난살이의 시름과 허탈, 울분을 달래며 절망적인 현실 속에서도 희망의 끈을 놓지 않았다.

민족음악가 채동선 역시 부산에서 피난살이를 했다. 기차를 이용하여 피난하라는 제의를 받았지만 본인만 특별대우를 받을 수 없다며 가족과 함께 한 달 넘게 걸어 영도 봉래동 대한도기 옆 판잣집에서 살았다.
채동선은 서울 상대, 숙명여대, 배재고등학교, 이화여고 등 전시학교에서 독일어를 가르치며 생계를 꾸리다 피난생활의 고단함을 이기지 못하고 영양실조와 복막염으로 1953년 2월 2일 52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1901년 6월 11일 전라남도 벌교에서 태어난 채동선은 8살 때부터 수십리나 떨어진 순천공립보통학교까지 어른들에게 업혀서 통학을 할 만큼 대부호 집안의 아들이었다. 경기고등보통학교 재학 중일 때 채동선을 음악에 빠져들게 만든 건 홍난파의 바이올린 독주회였다. 홍난파로부터 바이올린을 배우던 그는 1919년 3.1 만세운동에 가담했다는 이유로 왜경의 감시를 받게 되자 일본으로 떠났다.

동경 와세다(早田 : 조도전)대학에서 영문학을 전공하면서 오오노 타다토모(多忠朝 : 다충조)로부터 바이올린을 사사(師事)받고 일본 교향악단 단원으로 선발된 뒤 연주 여행을 다녔다. 1924년 독일로 유학을 떠나 베를린의 슈테르센음악원에서 공부하며 리하르트 할체로부터 바이올린을, 빌헬름 클라테로부터 작곡법을 지도받았다.

1929년 가을 독일에서 귀국한 뒤 11월말 귀국 독주회를 가졌고 1939년까지 모두 4차례의 독주회를 가졌다. 1940년부터 1945년까지 “새야 새야 파랑새야”를 비롯하여 12곡의 민요를 편곡하고 별유천지(別有天地)를 비롯한 12곡의 민요를 찾아내는 등 우리 전통문화에 대해 남다른 애정을 보여주었다.

해방 이후 이데올로기(Ideologie : 인간·자연·사회에 대해 품는 현실적이며 이념적인 의식)적으로 혼란에 빠진 좌경음악가와 극우세력의 중간에 서서 민족주의적인 단합을 이끌어내기 위하여 노력했으며 애국적 정열이 담긴 노래들을 작사, 작곡했다.
정지용의 시들은 채동선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가곡 12곡 중 8곡이 정지용의 시로 작곡되었다. “향수”와 “압천”, “산엣색시들녘사내”, “다른하늘”, “또 하나 다른 태양”, “바다”, “풍랑몽”을 잇달아 작곡했다. 월북 작가라는 이유로 정지용의 시와 저서들이 금서(禁書)가 되는 바람에 “고향”을 위하여 만들었던 곡은 박화목의 “망향”, 이은상의 “그리워”로 불리우며 오늘날까지 사랑을 받고 있다.

한국 전쟁이 일어난 지 64년 포성이 멎은 지 올해로 61년이다. 이중섭 갤러리와 포토존 그리고 일본인 아내 야마모토 마사코(山本方子 : 산본방자) 전망대가 범일동에 만들어졌듯이 영도다리 근처에 정지용의 시와 민족음악가 채동선의 음악적 만남을 주제로 하는 갤러리나 음악 카페를 만들어야 한다.

한국 전쟁 임시수도 부산 1000일 문화제와 호남향우회를 중심으로 영호남이 하나 되는 채동선음악회가 부산에서 열리는 날을 기대해본다. 영도다리는 오늘도 민족음악가 채동선을 기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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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사등록 2014-06-17 00: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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