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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안스님 특별초청 법문...2014년 ‘4월 잔인한 달’ - 김해바라밀선원 세월호 위령제 및 4월 초하루 법회 개최
  • 기사등록 2014-05-01 00: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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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은 잔인한 달
죽은 땅에서 라일락 꽃을 피우며
추억에 욕망을 뒤섞으며
봄비로 잠든 뿌리를 일깨운다

겨울은 오히려
우리를 따뜻하게 감싸 주었었다
망각의 눈이 대지를 덮고
마른 구근으로 가냘픈 생명을 키웠다

슈타른베르가제 호수를 넘어
여름은 소낙비를 몰고 갑자기 우리를 찾아 왔다
우리는 회랑에 머물렀다가
햇볕이 나자 호프가르텐 공원에 가서
커피를 마시며 한 시간 동안 이야기 했다

,,,,,,,,,,,,,,,,,,,,,,,,,,,,,,,,,,,,,,,,,,,,,,,, 하략
_ T.S 엘리어트의 '황무지(荒蕪地)' 제1부 <사자(死者)의 매장> 중에서


김해바라밀선원에서는 통도사 반야암 회주 대한불교 조계종 고시위원장 지안 스님 특별 초청 법문 및 세월호 위령제를 4월 초하루(29일)를 맞아 개최했다.

이날 지안 스님께서는 법문을 통해 “부처님 오신날이 일주일 앞으로 다가온 음력 4월 초하루입니다. 여러분께서도 잘 알고 느끼고 계시겠지만 올해는 뜻하지 않은 세월호 참사 사건으로 전 국민이 안타까워하는 마음과 슬퍼하는 마음으로 가슴속에 상처를 안고 있는 그런 실정이 되었습니다. 우리 불교계에서도 봉축행사를 애도하는 행사로 바꿔 하자는 여론이 확산이 되고 있고 각지역 마다 예정돼 있던 제등행렬 같은 행사가 취소되고 있다고 전해지고 있습니다.

우리 중생이 사는 세계는 어떤 세계이냐(?) 하면 나고 죽는 세상 입니다. 중생세계의 속성을 한마디로 말하자면 태어나고 죽고 하는 일이 끝없이 반복되고 있는 곳입니다. 이것을 생사의 업이라 합니다. 우리가 지금 이렇게 살아서 법당에 와서 기도를 하고 있지만 우리 인생도 때가 되면 또 이 세상 인연을 마감해야 할 때가 분명하게 오는 것입니다.

다만 우리는 우리에게 주어진 일생을 안락을 누리면서 편안하게 살다가 때가 되면 시절 인연 따라서 순명의 이치 속에서 떠나 가야합니다. 그렇지 못하고 불의의 사고로 인해서 그것도 수 백 명의 어린 학생들이 한꺼번에 죽었다는 사실은 중생의 업이 좋지 않아 그렇다 이렇게 말 할 수 있지만 안타깝기 짝이 없는 일입니다.

영국 시인 T.S 엘리어트(Eliot)는 ‘황무지(荒蕪地)’라는 시(詩)에서 '4월을 가장 잔인한 달' 이라고 표현했습니다. 서양 사람들은 주로 양력으로 치니까 양력 4월이 1년 12달 중에서 가장 잔인한 달이라고 한답니다. 올해 2014년 우리 한국의 4월은 정말 잔인하기 짝이 없는 4월이라 생각되기도 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어떤 순간에 최악의 절망스러운 상태를 맞이 했더라도 그 최악의 절망속에서 다시 원력을 세워서 희망을 찾아내야 합니다. 그래서 부처님 말씀에 ‘최악의 절망상태에서도 최대의 희망은 있다’ 이런 말씀이 설해져 있습니다.

 

법문에 앞서 잠시 '영가천도(靈歌遷度)의 법문송'을 읊어드렸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과거 무수 번뇌로 부터 생사를 반복해 온 존재들 입니다. 우리가 금생에 태어나기 이전에 전생에 다 죽었던 사실이 있는 사람들 입니다. 전생에 죽었던 일이 없으면 금생에 태어날 수 없습니다. 그 말은 예를 들어 말하면 어제 해가 지지 아니하면 오늘 해가 뜰 수 없는 이치와 같은 것입니다.

그래서 세세생생으로 우리는 생사를 해가 뜨고 지면서 밤낮이 되풀이 되는 것 처럼 그렇게 반복해 온 존재들입니다. 이것을 ‘생사(生死)의 강물’이다 라고 하는데 이것은 윤회(輪廻)의 이치가 강물처럼 흘러간다는 이치입니다. 윤회의 이치에서 생각해 볼 때 한 생의 불행이 또 영원히 지속되는 것은 아닙니다. 마치 날씨가 변하듯이 맑은 날이 있는가 하면 흐린날도 있고, 비가 오는 날도 있고, 겨울이거나 눈이 오는 날도 있는 것과 같습니다.

그래서 인생은 그때 그때의 상황에 따라서 항상 우리 불자들의 입장에서 말한다면 신심 원력을 가지고 희망을 찾아내는 일을 해야 됩니다. 절망스러운 일이 생겼을 때에도 그 속에서 항상 희망을 찾아내는 일을 해야 됩니다. 죽은 영가도 마찬가지 입니다. 죽은 고인도 희망을 찾아야 됩니다. 사람이 죽었는데 죽은 사람한테 무슨 희망이 있습니까(?) 이렇게 묻는 사람은 아직도 불법(佛法)을 모르는 사람입니다.

우리가 마음속에 원을 가지고 있는 것은 생사와 상관없습니다. 육체가 살아 있거나 육체가 인연을 마치고 죽어서 영가가 돼 있거나 우리의 원력은 우리들의 업식 속에서 항상 그대로 간직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특히 대승불교에 와서는 원력(願力)으로 인생을 살라고 했습니다. 원력으로 인생을 살면 괴로움 속에서도 즐거움을 찾을 수 있고, 슬픔 속에서도 기쁨을 찾을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항상 우리 마음에 큰 원(願)을 세워 두어야 합니다.
 
원래 불교는 세가지 마음을 개발하면서 살아야 된다고 했습니다. 절에 와서 기도하는 이 기도의식이 우리의 마음을 닦게 하는 것인데, 기도를 열심히 하면 물론 우리가 바라는 소원도 이루어지는 경우가 있지만 세 가지 마음이 개발됩니다. 이것을 ‘삼신개발(三信 開發)’이라 말합니다. 첫째 기도를 열심히 하는 사람은 자비심(慈悲心) 즉 비심(悲心)이 커집니다. 비심(悲心)은 내 개인을 위한 자리의 마음과 똑 같이 남을 위한 이타(利他)의 마음을 동시에 쓰는 것입니다. 동정하는 마음, 남의 고통을 같이 슬퍼하고 안타까워하는 마음, 이것을 비심(悲心)이라 합니다.


그래서 부처님은 비심(悲心)으로 중생을 교화 제도 하려고 하셨던 성인(聖人) 입니다. 가령 세월호 사건을 가지고 말할 때 어린 학생들이 배 속에 웅크리고 있는데, 누군가 어른이 그 학생들을 향해서 ‘얘들아, 조심조심 밖으로 나오너라’라는 이 말 한마디만 해 주었더라면 대부분의 학생들이 다 살아났을 것입니다. 그런데 어처구니 없이 아무도 그 말을 해 준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안 죽을 학생들이 죽었습니다. 이래서 나라가 비통에 잠기게 된 것입니다. 우리는 항상 어떤 상황이든지 비심(悲心)을 키워야 합니다. 그래서 첫번째 불교의 신행(信行)은 비심(悲心)을 개발하는 것입니다.

그 다음 둘째 신심(信心), 즉 깊은 마음, 사람 마음은 이 사람 저 사람 다 깊이가 다릅니다. 내가 쓰는 마음, 남이 쓰는 마음이, 똑 같은 생각을 하고 있으면 같은 생각이기 때문에 다 똑 같은 마음이라 할 수 있겠지만, 그러나 그 깊이는 다 다르다. 깊은 마음은 진실한 마음, 거짓이 없는 마음으로, 아주 정성스런 마음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불자들은 깊은 마음을 개발해야 합니다.

셋째 원심(願心), 즉 항상 마음속에 원을 담고 있어야 합니다. 불교를 믿는 사람, 불교를 믿지 않는 사람의 차이는 이 삼심(三心)을 개발 하느냐, 개발하지 않느냐 그 차이로 말 할 수 있습니다. 사람 마음은 그릇과 같습니다. 그릇은 빈 그릇으로만 영원히 있으면 사용 가치가 없습니다. 그릇에다 물건을 담는 일 없이 빈 그릇으로서만 계속 놔 둔다면 아무런 가치가 없습니다.

사람 마음도 원력(願力)이 없으면 빈 마음, 빈 그릇과 같은 마음이 됩니다. 뭔가 담아 있어야 됩니다.

천정에 밝혀져 있는 형광등이 공장에서 등으로 만들어져서 어느 방에 전선하고 연결돼 그 전선에 스위치를 올려서 전기가 등 안에 까지 전달되면 불이 오는 이치와 같은 것입니다. 그런데 이 등이 전선에 연결되는 일이 없다면 안 만들어진 것과 똑 같습니다. 우리 중생이 지금 말씀드리는 삼심(三心)을 개발하지 아니하면 그 인생(人生)은, 그 사람은 인간(人間)의 가치를 망각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불교는 삼심(三心)을 개발하며 살아야 합니다.
 
사람은 태어나서 누구나 세가지 인연(因緣)을 맺게 됩니다. 인연(因緣)의 자초지종을 갖고 말할 때, 내가 이 세상에 태어나려면 ‘사랑과의 인연(因緣)이 제일 우선하는 부모’를 만나 사람 몸을 받아 태어나게 됩니다. 또한 부모가 어디에 계셨는가(?) 부모가 계신 장소가 정해 집니다. 그것이 고향입니다. 즉 땅과의 인연, 지역(장소) 지연(地緣)입니다. 그리고 태어나는 때가 있습니다. 해(年). 달(月). 일(日). 시(時) 4가지, 여덟 글자로 사주사주팔(四柱八字) 를 뽑는 사주입니다. 그래서 사람은 누구나 태어날 때 부터 세가지 인연을 갖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불법이 우리에게 어째서 소중하고 불법인연(佛法因緣)이 지중한 것인가를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한 생을 살면서 때에 따라서 다른 인연 관계를 만들어 가면서 살아가게 됩니다. 부모는 선택이 안됩니다. 요즘 아기가 태어날 때 사주팔자를 좋게 하기 위해서 여러 가지 과학적인 의료기술을 이용하는 경우를 종종 보게 됩니다. 하지만 인연법(因緣法)의 근본 이치에서 본다면 인위적으로 만든 것은 별 의미가 없습니다. 이 세상은 본래 무위법(無爲法) 입니다.

세가지 인연을 좋게 선택하지 않고 무위법(無爲法) 속에서 무작위로 맺은 이 인연을 좋도록 하는 방법이 부처님 법을 만나서 부처님하고 인연을 맺는 것입니다. 부처님 법(法)이 인연법(因緣法)을 알도록 하는 법문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불교에서는 이 세상 모든 것을 '인연소치'라 합니다. 부처님은 역사적인 한 인물로 태어났습니다.

여행을 하다보면 부처님의 생모 마야부인 능이 있는 부처님 태어난 곳이라고 하는 네팔의 티아브르코트라는 지역과 인도의 카필라성 등 지금도 부처님 석가족의 왕궁터 였다라고 서로 주장하고 있는 두 곳이 있습니다. 그리고 붓다의 일생을 여덟 폭의 그림으로 표현해 놓은 도솔래의상, 비람강생상, 사문유관상, 유성출가상, 설산수도상, 부처님께서 보드가야 보리수 나무 아래서 정각을 이룬 수하항마상, 녹야전법상, 쌍림열반상 등 ‘팔상도(八相圖)’로 부처님의 일생이 전해지고 있습니다.

부처님 법(法)이 인연법(因緣法)인데 부처님 법(法)과 가까이 하면서 살면, 태어날 때의 세가지 인연 즉, 선택의 여지없이 부모를 만나고, 고향이 정해지고, 사주팔자가 정해지고 그것을 바탕으로 해서 성장 하고, 지역을 옮겨가며 이사를 가고, 시절따라 어떤 일을 해야 하고, 이 인연이 좋은 쪽으로 발전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불교는 교리적인 의미를 간추려서 쉽게 현대적으로 설명할 때 인연(因緣)을 발전 시키는 그런 법(法)을 배우는 것입니다. 기도도 그러한 하나의 방편입니다.

불교가 역사적으로 발달하면서 근본불교 시절, 인도의 분파불교 시절, 티벳의 밀교 얘기등 여러 가지 지역이나 시대에 따라서 불교를 이해하고 실천하는 수행(修行) 방법이 다릅니다. 불교도 나라마다 다 다르듯이 정서에 따라 불상의 모습도 다 다릅니다. 그러므로 오늘의 한국 불교는 대승불교 즉 대승의 사상을 가지고 실천해야 합니다. 대승불교에서 부처님은 법신(法身)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부처님 생애에서는 석가모니 부처님이 인도에서 태어나서 어떤 활동을 하다가 어떤 과정을 거쳤다라든지....
 
‘법화경 여래 수량품’에는 조금 알아 듣기 어려운 법문이 씌어져 있습니다. 오늘 특별히 이것을 소개하면서 바라밀선원에서 열심히 신행 생활하고, 공부를 하는 사람들이 그 공부가 좀 더 높은 수준으로, 완숙한 경지로 나아가야겠다는 뜻에서 이 말을 소개합니다. ‘부처님 일대기에 나오는 얘기로, 사람들은 붓다가 정반(淨飯) 암봉에서 태어나 출가해서, 6년 수도한 끝에 보리수 아래서 정각을 이뤘다고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것은 인간 석가모니를 두고 역사적인 사실로 하는 말입니다.

그런데 대승불교의 법화경에는 부처님을 법신으로 바꿔서 말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그렇게 알고 있지만은, 그런데 그건 아주 어린아이들에게 설명해 주기 위한 그러한 뜻에서 하는 말이지, ‘나는 구원 법전에, 그때 인간으로 몸 받기 이전에, 카필라성에 태어나기 이전에, 상온육안을 통해서 출가하기 이전에, 구원법전에 부처로 성불(成佛)했다.’라고 씌어져 있습니다. 불교는 마음의 종교입니다. 우리가 마음을 가지고 생각해야 합니다.

내 몸을 가지고 말 할 때는 부모, 고향, 사주팔자 이지만,,, 마음을 가지고 말할 때, ‘마음이 내 몸 안에 들어 있다’고 생각 한다면 이것은 불교를 모르는 사도(詐盜)입니다. 능엄경에 보면 마음은 태어나거나 죽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마음 자리를 법신(法身)이라 합니다. 마음을 가지고 말할 때, 반야심경(般若心經)에서 공(空)을 말할 때, 불생불멸(不生不滅)이라 하지 않습니까? 즉 우주의 공간이 생기는 것도 아니고, 없어지는 것도 아닙니다.

그래서 불교의 근본 교리를 차근 차근 공부해 가지고 나중에 대승의 법을 배우면 무한한 법희선열(法喜禪悅)을 느끼면서 새로운 부처님 법을 스스로 느끼고 깨닫게 됩니다. 이러한 경지에 이르도록 우리가 공부를 잘 해 나가야 됩니다. 그래서 일단 우리는 불교를 신행(信行)하는 이 정성을 좀 지극히 가져 가지고 열심히 기도도 하고, 그 동안 인해(仁海) 주지가 열심히 노력을 한 결과 김해바라밀선원이 조금 자리가 잡히고, 신도님들이 다른 사찰의 신도님들 보다도 신행의 자세가 좀 돈독해지면서 모범이 되고, 앞서 가는 느낌입니다. 계속 알뜰한 마음으로 정진을 잘 해 나가시기 바랍니다. 우리 모두는 비심(悲心), 신심(信心), 원심(願心)을 개발해야 합니다.“라는 대법문을 펼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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