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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적 오체투지(五體投地) 열반(涅槃) 향연(香煙), 경남 지리산 함양 ‘서암정사’>
저잣거리를 벗어나 어딘가로 떠난다는 것은 설렘을 동반한다. 더군다나 이른 가을 아침 희뿌연 안개비가 내리는 날 이라면 더 말해 무엇하랴. 대자유에 묵언(黙言)을 덧붙여 달리는 버스 안에서 대자연의 고즈넉한 들녘이 주는 황금빛 물결을 카메라에 찰칵!찰칵! 담는다.
무엇을 담는다는 것은 언제나 숨을 멈출 정도의 팽팽한 긴장감과 몰입, 정성, 열정이 필요하다. 하지만 부처의 가르침은 한결같이 불생불멸(不生不滅), 즉 공(空)을 최고의 선(禪)으로 일깨우고 있지 않는가?
버스 창 밖 빗방울들이 쇼팽의 건반을 오가며 쉼 없이 타 내린다. 평생 동안 물방울 하나에 열정을 바친 턱 수염이 허연 노화가(老畵家)의 모습이 떠 오른다. 슬픈 이별과 감동적 만남이 씨줄과 날줄로 교차하는 인간사를 조금씩 알아가며, 무채색 필름을 이리저리 되돌리는 가운데 석가모니 부처님의 마지막 유언 ‘인간에게 이별은 어쩔수가 없는 일’이라며 ‘게으르지 말고 부지런히 수행정진하라’는 제행무상(諸行無常)이 뇌리를 스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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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서암정사’ 여행은 도심속 포교당 기치를 내걸고 지난 4월 초, 김해시 내동에 개원한 대한불교 조계종 통도사 ‘김해바라밀선원’ 주지 수담 인해스님께서 주최했다. 서암정사 방문은 ‘김해바라밀선원’에서 벌써 두 번째 방문이다. 첫 방문에서 언제나 지리산이 주는 대자연의 넉넉함에 마음을 뺏기며, 무심결에 석굴법당 안으로 들어선 순간, 강력하고 기이한 형언할 수 없는 영혼의 울림들에 마음을 주체할 길 없어 가슴을 쓸어 내려야 했던 그 오묘하고 신비로운 진언때문에 오랫동안 마음이 쓰였던 곳이다.
지난 10일에는 소설 ‘화엄경’을 쓴 출가 경험이 있는 화가, 시인, 소설가라는 화려한 수식어를 동반하고 있는 고은 선생이 노벨문학상 수상 여부를 놓고 첨예한 촉각을 세우며 기대감을 가졌던, 대한민국의 수 많은 문화예술인들에게는 또 한번 한반도라는 대명제에 대해 목숨을 걸 수 밖에 없지 않은가(?)라는 조용한 커뮤니티의 접점이 일고 있다.
어느 순간 오늘 여행의 목적지 함양 칠선계곡의 황홀한 비경 건너편 웅혼한 민족 영산 지리산이 발아래 펼쳐지는 대자연 속 ‘서암정사(주지 법등스님 )’에 도착했다. 현재 바라밀선원에서는 천태종을 비롯한 여러 종파에서 불교의 정수를 담고 있는 경전으로 존중되고 있는 매우 아름답고 위신력을 가진 종교의 고전이며, 동아시아 불교의 주도적 형태인 대승 불교 전통에서 가장 중요하고 널리 읽혀 온 경전‘묘법연화경(妙法蓮華經)’_‘진실한 가르침의 연꽃 經’_을 주지 인해스님의 강의 및 사경전시 수행으로 병행해 나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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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암정사’는 벽송 지엄대사가 중창한 고찰 해인사 말사 ‘벽송사’로부터 서쪽으로 약 600M 지점에 위치하고 있다. 주위의 천연 암석과 조화를 이루는 천혜의 자연 자원의 토대위에 조성된 대방광불 불국토 서암은 절 입구의 사천왕상을 비롯해 굴을 통과하면 화엄의 세계로 들어서는 넓고 큰 대방광문, 대웅전, 석굴법당, 광명운대, 사자굴 등을 조성해 서쪽으로 향한 대웅전 앞에서 바라다 보이는 가이없는 지리산의 뻗친 기운들이 올올이 전해지는 하늘 밑 지리산, 발아래 지리산 풍광을 접할 수 있는 명품 사찰의 위대한 이력을 선물하고 있다.
이 곳의 주인 원응스님은 지난 30여 년 전 여러사람의 공덕으로 자연의 섭리가 빚어낸 신성한 이곳 지리산에서 불사를 시작해 자연 암반에다 직접 먹으로 밑그림을 그리며 10여 년 간의 세월을 바쳐 장엄한 극락세계 불국토 입체조각 ‘석굴법당 조성과 화엄경 80권, 60만자 금니사경(金泥寫經)’으로 정각(正覺)을 이뤘다.
원응스님은 향연 26세에 출가해 부처에 귀의한지 7년 만인 지난 1961년에 지리산에 들어와 46세때 지리산 화엄의 세계에 입문했다. 이 곳 지리산에서 부처의 길 54년 동안 수행정진하면서 선재동자의 구도길 따라 나서 불국토를 이룬 이 시대가 주목해야 할 원응의 장엄(莊嚴)한 스펙트럼 석굴법당은, 오귀스트 로댕의 지옥문에 버금가는 예술성이나 그 영혼의 마음 조각들이 넋을 위로하는 숭고한 정신적 염력의 총화로 빚어진 결과물들이라 한국의 자랑 석굴암을 완성한 김대성의 그 숱한 자비구현의 정신이 오롯이 응결되어 있다고해도 과언이 아니다. 원응의 굴법당은 인드라망 불교문화예술의 걸작으로 바라 보는 이들로 하여금 미켈란젤로, 레오나르도 다빈치, 안토니 가우디의 융합적 통섭으로 위대한 전율을 금(禁) 할 수가 없다. 징을 쪼은 석공은 이종원 처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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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지난 1985년부터 하루에 100자씩 16년간 한결같이 석굴법당의 원만한 불사를 염원하며 사경수행 전통을 부활해 금니사경을 써내렸다. 두루마리로 집대성한 화엄경 80권, 60만자 금니사경(金泥寫經)은 여러차례의 실명의 위기를 겪으면서도, 향이 그윽히 피어 오르는 염력(念力)의 총화로 완결했다.
이로써 사경전시관을 한번 참배하는 것만으로도 그 진실된 광명(光明)의 큰 공덕(功德)이 전해진다. 현재 대웅전 지하에는 지난 2010년, ‘사경전시관’을 마련해 금니사경을 비롯해 화엄경 먹사경, 금강경보탑 사경, 사경부채 등 예술성 높은 다양한 작품들이 일반에 공개되고 있다. ‘원응스님의 사경작품’은 지난 2004년 대만 ‘자광사’ 주최로 장개석 총통의 ‘대만국부기념관’에서 첫 초청 전시회를 가진 바 있다. 그 인연으로 대만 자광사 재단 이사장과 주지스님은 지금까지도 지속적인 교류를 이어가고 있다.
서암정사 조실 원응스님은 그 동안 직접 농사를 짓고 곶감을 팔아 생계를 유지하기도 했다. 73세라는 노구를 이끌고 올 곧게 하루하루 최선으로 영원을 살며 자신의 세계를 구축, 일생일대 연기(緣起)의 법칙 신뢰 프로세스 신세계를 향해 나아간 그 저력의 지평 너머 석굴법당 조성 배경에는 6.25 전쟁의 참화로 지리산에서 이름없이 비참하게 희생된, 무수히 죽어간 원혼들의 비탄어린 울부짖음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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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몽사몽간에 우연히 길을 지나다 듣게 된 그 소리들을 통해 이 모든 일들이 인간의 끝없는 이기심과 탐욕의 공동과보임을 절감하고 이들의 원한을 달래기 위해 끝없이 기도하면서 “이곳에서 희생되어 원한에 사무쳐 방황하는 무수한 유무주고혼들이 하루 속히 증오의 괴로움에서 벗어나 조국분단의 비극이 종식됨과 동시에 모든 인류가 부처님의 광명(光明) 안에서 평화를 누리는 극락정토의 세계를 이루게 하리라”는 서원을 세워 자연석벽에 아미타부처, 관세음보살, 지장보살, 8대 제자, 나한 등 선재동자의 구도길에서 만난 선지식들을 입체적 예술조각으로 새겨 불교미술의 극치 ‘대방광불 불국토’ 대자대비 부처 세계 진수로 무아의 감동을 선사하며 불교의 영원한 이상세계 화엄의 장엄을 이뤘다.
또한 비로자나 부처님과 문수, 보현, 선재동자 등 불보살들을 모신 비로전 조성으로 화엄회상을 나투어 화엄정토 도량을 구축했다. 현재 극락정토 및 화엄정토의 융합적 장엄세계(莊嚴世界) ‘서암정사’ 참배객들은 자손만대에 길이 전승될 문화유산 원응스님의 정신적 오체투지(五體投地) 열반(涅槃) 향연(香煙)의 위대한 감동을 마주 대하게 되면 그 모든 것을 내려 놓을 수 밖에 없으리라.
이밖에도 대웅전은 이국적인 대만풍의 붉은빛 안료로 전체 벽면을 마무리한 뒤 금박무늬의 화려함을 더한 아(亞)자형 한국 전통 목조건물로 중층구조 겹처마 형태를 지닌 선의 미(美)가 돋보이는 인상적인 형태로 지난 2012년에 완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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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혜의 상징 용화향도(龍華香徒) ‘문수사리동자’>
선재(善財)는 선시(善施)로 현역되며 산스크리트어 수다나(Sudana)로 ‘풍족한 베품’을 뜻 한다. 선재(善財)는 복성장자(福城長者)의 아들로 자신의 틀에 갇히어 지내다 일체의 진상을 알고자 문수보살의 안내로 보리심을 발해, 진리의 세계로 들어가기 위해 힘차고 당당하게 선지식을 찾아 남쪽으로 구도의 길을 떠난다. 이 길에서 선재동자는 수승한 행의 인연에 의해 깊고 광대한 연기로 53명의 선지식(一切智), 즉 착하고 아름다우며 훌륭하고 고귀하며 올바른 벗, 칼야나 미트라(Kalyana mitra)를 만나 구도의 편력을 펼친다.
이와 더불어 신라시대 문수보살은 타인을 이익케 하겠다는 원을 세워 남쪽으로 향했다. 선재동자는 복성에서 문수보살을 만나 말씀을 듣고 보리심을 발해 남쪽으로 ‘구도 여행’을 떠난다. 선재동자의 구도 여정은 깨달음의 차원이 ‘인고(忍苦)의 척박한 땅덩어리에서 실제로 피와 땀이 뒤엉킨 중생의 살 냄새에 부대끼면서 열린다’는 축적된 경험에 바탕한 지혜를 설하고 있다. 너무나도 순수한 보리를 향한 마음의 인격화에 힘입어 마지막 보현보살에 이르기까지 53명의 선지식을 차례로 만나 법(法)을 묻는다. 선재동자의 진리를 찾아서 하염없이 발길을 재촉하는 맑디 맑은 동흔은 고려 불화 ‘수월관음도’에 잘 표현돼 있다.
‘문수보살’을 언급한 최초의 경전 <다라니집경>에서 문수보살은 몸은 흰색이며 정수리 뒤에 빛이 있으며 칠보의 영락과 보관, 천의 등 갖가지로 장엄하고 사자 위에 앉아 날카로운 칼을 지녀 모든 장애와 번뇌를 없애는 ‘지혜’를 나타내고 있다. 대승보살의 정신이 고스란히 살아 움직이는, 제일보 문수는 문수사리동자로 ‘오직 끝없는 미래만 지닐 뿐 과거를 지니지 않는다’는 용화향도(龍華香徒)의 귀감으로 바로 문수 즉 선재동자를 가리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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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평왕때 경주 ‘단석산’에서 도를 이루어 칼로 바위를 자르고 그 안에 ‘미륵삼존불’을 모셨다고 하는 화랑(花郞) 김유신을 따르던 낭도의 이름 ‘용화향도(龍華香徒)’는 불교의 미륵신앙에서 내세불인 미륵불이 도솔천에서 용화수(龍華樹) 아래로 내려와 3번 설법한다는 것에서 유래해 청소년들이 도를 닦고 무술을 연마하던 ‘화랑집단’을 일컫는다.
원응스님은 ‘종극에 있는 자만이 항상 제일보를 내딛게 된다’라며 ‘처음과 끝이 있을 뿐’이라는 <화엄경 입법계품>에 나오는 ‘선재동자의 구도 길’을 자신의 삶의 목표로 삼아 아교풀에 갠 금박가루를 붓 끝에 묻혀 ’후세에 전하고자 하는 마음의 공덕을 쌓기 위해 경문을 베끼는 ’금니사경(金泥寫經)‘을 시작해 지금 여기까지 왔다.
한편 자장스님에 의해 중국 청량산에서 모셔온 부처의 진신사리를 모신 5대 ‘적멸보궁’(양산 통도사, 오대산 월정사, 설악산 봉정암, 태백산 정암사, 사자산 법흥사) 중 하나인 경남 양산시 하북면 ‘대한불교 조계종 통도사’에는 경상남도 문화재 ‘문수사리보살최상승무생계경’(보물 제738호. 1982년 11월 목판본 3권 1책(상. 중. 하) 이 있다. 이 경은 근기가 높은 분이 아니면 믿지 못하고 믿을 수 없다고 전해 진다.
고려 우왕 12년(1386년)에 간행된 석가모니가 금강좌(金剛座)에서 설법한 불경으로, 인도의 지공(指空.디아나바드라)이 고려 충숙왕 앞에서 이 책을 보고 설법한 적이 있다고 전한다. 닥종이에 찍었으며 크기는 가로19.2cm, 세로 26.1cm이다. 요지는 애신, 사신, 유심, 무심, 성상을 버리고 수행해 무생법인을 증득하라는 내용이다. 지공이 한역(한역)했는데 <고려대장경>에도 포함돼 있지 않은 중요한 경문(經文)으로 불교 교리 연구의 귀중한 자료로 인증된다.
문수보살은 불교의 실천을 상징하는 보현보살과 함께 석가여래와 비로자나불의 협시보살로 통한다. 문수신앙은 ‘신라 고승 자장’에 의해 우리나라에 최초로 이식됐다. 삼국시대 이래 문수보살에 대한 신앙이 성행 했으며, 문수보살은 중생구제를 위한 십대원(十大願)을 세워 허공같이 넓은 마음으로 중생을 끊임없이 제도해 보리를 깨닫고 정각을 이뤘다는 기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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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의 대표적 문수 신앙처는 강원도 ‘오대산’과 ‘금강산’이며, 경남 하동 ‘칠불암’의 문수동자 설화 등이 전해져 내려오고 있다. 오대산 ‘상원사 청량선원’의 문수보살과 문수동자상이 유명하며 강원도 평창군 진부면 <상원사>에 조선 전기 작품 ‘목조문수동자좌상(국보 제221호. 1466년. 세조 12년. 크기 98cm)이 있다. 이 문수동자상은 세조의 둘째 딸인 의숙공주 부부가 문수사에 봉안한다고 적혀져 있어 세조때의 ’흥불정책‘에 힘 입어 왕실에서 조성한 수준 높은 목조상이라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화엄경>에 의하면 중국의 청량산에서 수행한 ‘자장’이 청량산의 태화지(太和池)에 있는 문수보살 석상 앞에서 7일 동안 기도하며 보살로부터 범어로 된 사구게(四句偈)를 받았다고 전한다. 노승으로부터 범어게송에 대한 해석을 듣고 부처님의 가사와 발우를 받았으며 신라에 구층탑(황룡사)을 세워 나라를 편안하게 할 것을 부탁 받았다는 기록이다. 이때 노승에게서 강원도 오대산이 ‘문수보살의 상주처’라는 가르침을 받은 자장은 643년(선덕여왕 2년) 귀국해 ‘황룡사에 구층탑’을 세우고, 오대산 중대에 ‘적멸보궁’을 건립해 문수신앙의 중심도량 발자취를 남겼다.
덧붙여 ‘보현보살’은 문수보살의 지(智)와 대응하는 실천적이고 구도자적인 행(行)의 보살이다. 그 형상은 여섯 개의 상아를 지닌 흰 코끼리를 타고 일체의 장소에 몸을 나투어 청량의 빛으로 중생을 길러내는 ‘자비’를 상징한다. ‘석가여래’와 ‘비로자나불’의 좌우 협시보살로서 늘 함께 표현된다. ‘석가여래’가 주인공인 <법화경>과 ‘비로자나불’이 주인공인 <화엄경>에 보현보살의 행원이 설해져 있기 때문에 보현보살은 두 부처님의 협시로 등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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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청 <내원사> 국보 제233호 ‘석남암사지 납석사리호’ 및 보물 ‘비로자나불’과 ‘삼층석탑’>
경남 산청군 삼장면 ‘내원사’는 대한불교조계종 해인사 말사로 지리산 천황봉에서 동남쪽으로 뻗어내려 온 능선 양 옆으로 흘러내리는 장당골과 내원골이 만나는 옛 절터에 지난 1959년 새롭게 자리 잡았다. 신라 태종 무열왕 때 ‘무염국사’가 창건한 절로 입구의 반야교는 천상의 세계로 들어가는 듯, 맑은 물소리가 절 어디에서나 들려 마치 선정에 든 듯 하다.
경내에는 지리산중턱에 있던 폐사지 ‘석남암사지’에 있다가 현재 내원사로 옮겨 온 <우리나라에서 발굴된 최초의 유물>로 추정되는 석조여래좌상 ‘비로자나불상(보물 제1021호)’이 있다. 이 석불좌상은 통일신라시대의 풍부한 입체감과 우아한 자비의 얼굴 모습을 간직한 세련된 조각솜씨의 전형이다. 두 손을 가슴에 모으고 있는 8세기 비로자나불상의 예로서 이상적 사실주의 양식을 보여주고 있으며 지난 1990년 보물로 지정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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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지난 1978년 7월에 개관한 부산박물관의 ‘부산직할시 승격 50주년’ 기념전시에서 국보 2점 중 1점이 바로 경남 산청군 삼장면 지리산 폐사지 <석남암사지>에 있던 석조비로자나불 대좌의 중대석 안에 납입된 것으로 전해지는 곱돌로 만든 ‘납석사리호(국보 제233호)’이다. 이 사리호는 뚜껑이 있는 형태로 흑갈색을 띠며 전체적으로 잘 마연해 다듬어져 있다. 항아리의 아가리 끝 일부분이 파손되고 몸통에 약간의 파열선(破裂線)이 있으나 거의 완형이다. 바닥부분은 굽이없이 평편하고 넓어 안정감을 준다.
뚜껑은 꼭지가 없으며 윗면이 평편한데 중간부분에 2줄, 가장자리에 2줄, 옆면에 2줄의 가는 선을 돌렸으며, 안쪽은 둥글게 마연한 후 가운데에 지름 3.6cm 가량의 연화문을 새겼다. 항아리는 어깨부분과 몸통 중간, 그리고 약간 아래쪽에 2줄의 가로선을 돌려 장식하였으며 그 위에 8~11자를 15행으로 돌아가면서 명문(銘文)을 얕게 음각했다. 글자 크기가 일정하지 않고 불규칙하게 나열되어 있어 판독이 어려운 부분도 있으나 대체적인 내용의 파악은 가능하다.
명문의 내용은 ‘영태 2년 병오년(丙午年) 7월 2일 석(釋) 법승(法僧). 법연(法緣) 두 스님이 두온애랑(豆溫哀狼)의 추복(追福)을 위해 무구정광다라니(無垢淨光陀羅尼)를 함께 봉안하여 석남사 관음암에 안치하였다. 이 공덕으로 두온애랑의 영신(靈神)과 발원인 두 스님은 함께 모두가 삼악도(三惡道)의 업(業)을 멸하고 성불(成佛)하기를 원한다’라는 내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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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태는 중국 당나라 연호(年號)로 신라 혜공왕(惠恭王) 2년 766에 해당된다. 이 시기에 제작된 ‘곱돌사리호로’는 경북 봉화 서동리 3층 석탑 및 측서사 3층 석탑 출토 사리호, 대구 동화사 비로암 3층 석탑 출토 사리호 등이 있다. 이러한 선례로 보아 곱돌사리호가 통일신라시대에 유행한 형식이었음을 알 수 있다.
이 사리호는 불상의 대좌 중대식에 법사리(法舍利)를 봉안한 최초의 사례로 비로자나불의 조성 기록과 함께 영태 2년 신라 혜공왕 2년 766이라는 명문을 통해 신라 비로자나불 좌상의 제작 연대를 8세기로 끌어 올린 귀중한 자료이다. 바닥에도 명문이 남아 있으나 서체가 정연하지 않고 긁힌 곳이 많아 판독이 어렵다._ <부산박물관 ‘부산직할시 승격 50주년 기념’ 전시 도록에서>
한편 내원사 삼층석탑(보물 제1113호)은 통일신라 후기에 세워진 석탑으로 2단 기단위에 3층의 탑신을 쌓아 올렸다. 기단과 탑신의 몸돌에서 기둥모양을 본떠 새긴 것이 뚜렷하게 보이지만 불에 타서 심하게 손상된 상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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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석암당 혜수 대종사’ 청백가풍 잇는 부산 서대신동 ‘내원정사(內院精舍)’>
원응스님은 지리산 자락 서암정사에서 그 무구한 세월 동안 달 빛을 벗 삼아 바람과 구름 우주의 삼라만상 대자연 속에서 귀의(歸依)해 해탈(解脫) 했다. 원응스님은 부산 서대신동 꽃마을에 위치한 부산시 전통사찰 제30호로 지정된 ‘내원정사(주지 정련스님)’ 석암당 혜수 대종사의 첫 상자이다. 내원정사는 ‘대한불교조계종 직할교구’이다.
석암당 혜수 대종사는 근세 격동기에 민족의 정신적 지주로서 후학들의 등불이 되었던 훌륭한 분으로, 청백가풍(淸白家風)을 열어 오면서 선(禪). 교(敎). 율(律)에 모두 달통해 후세에 길이 그 정신이 전해 내려오면서 귀감이 되고 있다.
현재의 아름다운 불법도량은 도심 속에서 지난 1973년 석암당 혜수 대종사를 모시고 대작불사를 시작해, 창건 이후 1983년까지 1차 불사로 5천평의 대지위에 60평 전통목조의 대웅전을 위시해 112평의 관음전, 85평의 요사채, 25평 종루 등 총 12동의 대소당우를 비롯해 10여년 동안 주지 김정련스님의 큰 원력으로 연건평 1,000여평에 이르는 오늘의 웅장한 가람의 위용을 갖췄다.
1차 가람불사로 1982년 ‘대적광전’ 조성이 완료 됐을 당시 구산스님, 자운스님, 성철스님, 석주스님, 월산스님 등 원로스님 30여명이 찾아와 불교정화 이후 가장 크게 조성된 대웅전이라는 평가와 더불어 이후 진행될 불사에 대한 격려를 아끼지 않았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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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내원정사 법당 ‘대적광전’ 내부에는 주불 대신 충북 법주사 5층 탑을 축소해 지난 1967년 중국에서 모셔온 황금빛 찬란한 독특한 미(美)를 자랑하는 ‘부처님 진신사리탑’을 봉안했다. 또한 보기드문 황금색 눈부신 아름다운 입체조각 탱화의 화려한 광명(光明)에 탄성이 절로 나오는 신기함을 멈추기란 쉽지 않다.
이밖에도 지난 1981년 서구청에서 설치해 직영하는 2,000여평 규모의 양묘장이 갖춰진 자연생태도량이 있다. 천혜의 자연경관과 더불어 도심속 정법구현의 포교도량으로서 그 역할을 다하고 있는 내원정사는 지난 1985년 2차 불사로, 1만 5천평 부지위에 연건평 1,100평 규모의 현대식 ‘불교유치원’을 설립해, 현재까지 매기 15개반 600명의 원생들을 배출해 내면서 불교유아교육의 장으로 확고한 자리매김을 해 나가고 있다.
지난 주 금요일 아침 출근길에 ‘내원정사’를 방문했을 당시, ‘김해바라밀선원’ 주지 인해스님께서 지금 강의 중인 보물 ‘묘법연화경’을 ‘동국대학교 박물관’에 한 달 동안 대여전시 하기 위한 준비로 분주해 직접 볼 수 있는 기회가 밀쳐졌다. 내원정사에는 또하나의 아름다운 보물 ‘목조 비로자나불’을 소장하고 있다.
지리산 함양 ‘서암정사’ 조실 원응스님은 ‘스승 석암당 혜수 대종사’의 청백가풍의 선맥(禪脈)을 이어 받아 내원정사에서 수시로 불법(佛法)을 개진하고 있다. 내원정사 총무 지일스님과는 사형간이다. 내원정사에서는 현재 아름다운 삶의 소리, 참된 나를 찾아가는 길 ‘휴식형’, ‘수행형’, ‘문화 & 생태체험형’, ‘맞춤형’ ‘템플스테이’를 실시하고 있다. 또한 오는 11월 3일(일)부터 7일(목)까지1080배 및 사경.참선 등으로 대한불교조계종 내원정사 '창건 40주년기념 제7회 내원정사 개산정진 대법회'를 매일 오후 2부터 4시까지 개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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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원정사는 부산 금정산과 백양산의 흐름을 천마산과 다대포의 몰운대까지 이어주는 구덕산(九德山)에 위치해 있다. 구덕산(九德山)은 예로부터 ‘도솔산’으로 불려온 불연(佛緣) 깊은 산으로, 도솔천에의 상생을 꿈꾸며, 도(道)를 깨닫기 전에는 진리(眞理)에 어두워 영혼이 윤회(輪廻)를 거듭하고 있다는 가르침으로 중생교화에 힘써고 있다. 그러므로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들 혼탁한 삶 속에서 내원정사가 존재하고 있다는 것은 사부대중에게는 큰 축복이 아닐 수 없다.
미륵보살(彌勒菩薩)이 머무르고 있다는 천상의 정토 도솔천, 세계의 중심인 수미산(須彌山) 꼭대기에서 12만 유순(由旬) 위에 있는 욕제 6천 중제 4천인 도솔천은 이상적인 불교세계로서 내원(內院)과 외원(外院)으로 나눠져 있다.
특히 내원(內院)은 석가모니가 인도에서 태어나기 직전까지 머무르면서 중생교화를 위한 하생(下生)의 때를 기다렸던 곳이다. 이 땅에 미륵신앙이 싹트기 시작하면서 도솔천은 자연스럽게 불교의 이상세계 극락정토로 인식돼 왔다. 한편 선재동자는 보타락가산에서 관세음보살을 뵙고 중생구제의 대비심을 가슴깊이 새기며, 선지식의 대표격이라 할 수 있는 ‘미륵보살’과의 감격적인 상봉을 하게 된다.
이때 미륵보살은 ‘이제는 흔들림 없는 깨침의 세계’로 들어서려는 선재에게 보리심의 공덕을 강조했다. 보리심으로부터 과거, 현재, 미래의 모든 여래가 출현하니 해탈문에 들어서 큰서원을 이룬 것은 모두 문수사리의 위덕과 신통력이라는 가르침을 받는다고 설하고 있다. 미래불(未來佛)인 미륵보살(彌勒菩薩)이 현재 이 내원에서 설법하며 남섬부주(南贍部洲)에 하생(下生)해 성불(成佛)할 때를 기다리고 있다고 하니 불가(佛家)의 연기(緣起)는 경이롭기 그지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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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과 인간’ 그리고 <빨치산 토벌관> 및 <산청. 함양 추모공원에서>>
우리나라 근현대사에서 일제 봉건 청산에 불만을 품고 지리산으로 들어간 농민 유격대 빨치산의 역사와 지리산 내원골이 고향이었던 최후의 빨치산 정순덕의 이야기는 쓰라리다.
6.25동란전 여순사건 반란군과 동란후 인민군 패잔병들이 합세하는 바람에 공산폭도라는 정체성이 덧씌워져 생명을 유린당했던 그들의 피가 지리산 그 맑은 골짜기 마다 붉은 단풍빛으로 물들었다는 한국 현대사의 비극!
정순덕은 빨치산이 완전히 토벌된지 10년 후까지 잡히지 않고 어느덧 지리산의 전설이 되어가던 중 1963년 고향 내원골에 식량을 구하러 내려왔다가 총을 맞고 생포되면서 은거지 발각과 함께 일제시대부터 이어져 왔던 험난한 지리산 빨치산 투쟁에 종지부를 찍었다.
이후 사형선고를 받은 정순덕은 무기징역으로 감형되어 비전향 장기수로 복역하다가 전향서에 도장을 찍고 풀려났다. 불편한 몸을 이끌고 비전향 장기수들을 정성껏 수발하다가 지난 2004년 지병으로 한 많은 생을 마감했다.
생명은 존엄하다. 전쟁으로 인한 고통은 위험한 전쟁의 영역 속에서 전쟁에 휩싸인 인간 모두가 겪는 보편적 현상으로 폭력 행위의 무제한성으로 말미암아 전쟁의 희생자 치고 애매하고 억울하게 죽지 않은 원혼이 어디 있겠는가(?) 양민의 무모한 학살은 인간 죄악이라고 하지만 그 어떤 전쟁에서도 죄악은 허용돼 왔다.
세계유일의 분단국인 우리의 현실에서 어떤 경우에도 국민은 하늘과 같고, 역사는 정의의 편에 있으며, 인명은 절대의 가치가 있다는 것을 지금 우리 모두는 통감해야 한다. 슬픔과 고통의 음지(陰地), 과거를 극복하고 역사의 새 시대를 열어가는 상생(相生)의 양지, 화합을 창출해 미래의 초석을 낳는 디딤돌로 승화해 희생된 영령들이 우리 후손에게 남겨주고 있는 진정한 자유와 번영의 소중한 가치를 다시한번 되새겨야 한다.
지금 산청. 함양 사건추모공원에는 지난 1951년 6.25전쟁 중 억울하게 희생된 무고한 민간인 705명의 영령들이 잠들어 있다. 또한 눈물이 마르지 않는 어머니가 품속에 고이 잠든 어린 자식을 안고 애통해 하는 모습을 형상화 한 산청. 함양사건 역사교육관에서는 비무장. 무저항의 민간인을 재판이나 적법절차를 거치지 않고 무차별 살해한 비인도적 반인륜적 범죄행위를 고발하고 인간의 존엄을 깨닫게 해 다시는 이와 같은 비극이 일어나서는 안된다는 역사의 산 교육의 장으로 후세들에게 각인 시키고 있다.
여기 영문도 모르고 억울하게 희생된 영령들을 위로하는 강희근의 헌시(獻詩) 중 일부를 소개한다._ /그러나 역사는 의인(義人)들을 내고/ 진실 화안히 드러내니/ 이제는 냇물이 제 소리 내며 흐르고/ 노을과 이슬 저희 허리 펴고 다니기/ 시작했습니다./ 오! 반세기/ 자리에 한 번 앉아 보지 못한 7백여 원혼들이여/ 이제는 나라가 법으로 그대들 양민이라 하고/ 겨레가 입으로 그대들 님이라 부릅니다./ 자리에 앉아 편히 쉬세요/ 진달래 피고 보리가 익는데/ 님들이 그리워 새들이 재잘거립니다./ 님들이시여 힘 들어도 오히려 불쌍한 죄인/ 죄인들/ 새들의 노래 안에 불러 들이세요/ 중매재 고개마루/ 깨곰이 달리고 산머루 탐스레 익으면/ 거기 그 빛깔로 도란도란 오세요/ 오세요 저희 살아남은 자 곁으로/ 나라 잘못된 나라되지 않게 염원 알알이 목에 걸고 어서 오세요/
한편 이기윤(전 육사교수)은 한국 현대소설의 6.25 체험과 인간상을 서술한 ‘전쟁과 인간’을 통해 “전쟁은 비참하다. 그 결과에 따라 승패가 나누어지더라도 전쟁으로 인한 상흔(傷痕)은 승리자와 패배자가 공통으로 안게 되는 또 하나의 결과인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쟁에서 휴머니즘을 운위하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 전쟁은 무기의 싸움이 아니라 인간의 싸움이기 때문이다. 나아가 전쟁이라는 극한상황(極限狀況) 속에서 움직이는 개별적 인간의 삶에 그 초점이 맞추어질 때, 우리는 그러한 상황과 대결하는 인간을 발견함으로써 그 비정성(非精性)과 휴머니즘을 동시에 포착할 수 있는 것이다”라고 했다.